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미사의 소프트웨어 I[제 48-2회]/ 정훈 베르나르도 신부님.
작성자양춘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7-05-02 조회수581 추천수8 반대(0) 신고

 

 

미사의 소프트웨어 I[제 48-2회]/ 정훈 베르나르도 신부님.


☞[48-1에서 계속]

이러다 보니 관심은 엉뚱한 곳으로 향합니다.

평소에 따분한 강론을 하는 신부에게는“오늘은 신부님께서 제발 한 번만이라도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 주셨으면...”하면서 사제가 개그맨처럼 되기를 바라거나, 반대로 강론 꽤나 한다는 신부가 강론을 시작 하면“우리 신부님께서 오늘은 어떤 이야기로 우리를 기쁘게 하실까?”

하면서 웃긴 이야기에 배꼽을 잡고 뒤집어질 준비를 합니다.

또 안 웃기던 신부가 모처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면, 어떤 사람은 졸고 있다가 깨어나서, 마치 알아들은 것처럼, 따라 웃으면서도 쑥스러워하지 않습니다.

또 사춘기 소녀 같이 사제를 사모하는 신자는 강론을 듣는 것이 아니라, 맨 앞에 앉아서 침을 흘리며“우리 신부님은 슈퍼맨 닮았어.”,“어쩜 목소리도 저렇게 멋있지!”하면서 강론을 듣는 것이 아니라 개인적으로 사제를 감상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방식으로 강론 시간을 허비하면 강론을 하는 사제나 듣고 있는 신자나 서로에게 아무런 의미나 희망도 없게 되며, 하느님 말씀에 대한 존중이나 예의를 갖추지 못한 상황이 되고 맙니다.

이런 영적인 환경에서 대부분의 신자는 미사 중에 강론을 왜 하는지 헛갈려 버리거나, 매번 강론 때마다 언짢아하거나 제대로 듣지 않고 딴 생각만 했다는 죄책감에서 맴돌 뿐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소프트웨어를 굳건히 간직하신 분이 많기 때문에, 아무리 부족한 강론이라 하더라도 내 삶과 인격이 거룩하게 변화하는데 도움을 받아야 하는 것이 미사의 현실이란 생각은 떠오르지 않습니다.

일방적으로 고정된 자기 생각에 갇혀서 강론을 재단하고 난도질하는 것은 서슴지 않지만, 나름대로 강론을 통하여 하느님 말씀에 대한 이해를 넓히는 새로운 어떤 시도도 스스로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강론을 매일 밥 짓듯이 해야 하는 본당 사제 중에 강론을 하면서 기뻐하는 분은 많지 않습니다.

그것은 강론 준비가 힘들다기보다는 ‘잘 해보았자 본전’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사제가 무슨 말을 어떻게 하여도 신자들이 잘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면, 강론하는 것이 점점 힘들어집니다.

그러나 강론은 인내심을 단련하거나 여러 분심으로 허비하는 시간이 아닙니다,


또 한 가지 지적할 잘못된 소프트웨어는 강론이 사제 혼자 일방적으로 떠드는 주입식 교육 시간이 아닌데, 강론을 대하는 태도가 너무 수동적인 면이 강하다는 점입니다.

“신부님은 전문가이시니까 우리는 그냥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자.”하는 정도의 선입관이 강론의 주된 소프트웨어로 깔려 있습니다.

아마도 많은 신자가 스스로 아직 신앙으로 세상을 살아가는데 미숙하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미사 참례나 고해성사 등 성사 배령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에 죄책감을 느끼고 있고, 성경 공부는커녕 성경 읽을 시간도 별로 없는 자신보다 아무래도 신부님이 훨씬 더 낫다고 여기기 때문에 사제의 강론에 전적으로 복음 해석을 의지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강론은 사제가 단지 신자들보다 조금 예습하는 심정에서, 그 날 말씀이나 신앙적 문제를“신자들이 이렇게 하느님 말씀을 섭취했으면 좋겠다.”하고 요리한 것입니다.

같은 재료로 여러 음식을 만들 수 있듯이, 그 날 말씀의 전례에서도 다양한 성경 해석이 가능합니다.


강론은 치아가 없는 아이를 위해서 엄마가 만드는 이유식처럼, 일단 한 번 씹어서 신자들이 먹기 좋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유아들도 이가 나기 시작하면 자꾸 단단한 것을 씹어야 치아 발육이 잘됩니다.

나이를 먹어서도 계속 이유식을 찾으면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자꾸 강론에만 의존하려다 보니 많은 부작용이 나타납니다.

역설적으로 들리겠지만, 사제에게 의존하는 복음 해석은 결국 강론 시간에 자기가 할 수 있는 것을 아무것도 남겨 놓지 않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을 오래 할수록 강론이 귀에 들어오지도 않고, 그 시간에 다른 묵상을 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평소에 신자들은 강론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고 이야기하지만, 실상은 강론을 통해 내가 거룩하게 변화하고 하느님 말씀으로 살아가는데 별 도움을 받지 못합니다.

하느님 말씀이 강론보다 당연히 중요하다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강론은 어디까지나 하느님 말씀을 보조하는 풀이입니다.

그런데 하느님 말씀보다 인간인 사제의 말에만 의존하다보니, 정작 하느님 말씀을 듣는 일에는 관심이 없고,“강론이나 잘 들으면 되지.”하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사제에게 일방적으로 의존하는 성향은 생각보다 훨씬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요리를 하는 사람에 따라 같은 재료를 가지고도 전혀 다른 맛을 내듯이, 강론은 사제 개인의 기본적인 성향이나 성격, 인간적 재주나 준비 정도에 따라 그 맛이 달라집니다.

또 훨씬 복잡한 정황들, 보기를 들면 정치 경제 사회적인 문제를 비롯하여 본당의 현안 문제나 사제 개인의 심리적인 상태까지 많은 변수도 하느님 말씀을 해석하고 강론을 하는데 직접 간접으로 조미료 역할을 합니다.

하느님 말씀인 독서와 복음이 생명의 양식이라면, 강론은 소화제에 불과합니다.

그래서 강론은 원래 우리 생각처럼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하느님 말씀을 되새길 수 있는 여러 길 중에 하나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49회 강론은 사제가 완성하는 것이 아니다. 로 이어 집니다.] 

     

          

  천주교 서울 대교구 중림동[약현]성당 주임 정훈 베르나르도 신부.

 


                   
                                                      [명상 음악]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