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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의 거처(居處)" --- 2007.5.6 부활 제5주일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07-05-06 조회수602 추천수7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7.5.6 부활 제5주일
                                                      

사도14,21ㄴ-27 요한 묵21,1-5ㄴ 요한13,31-33ㄱ. 34-35

                                                    

 

 

 

 

 

"하느님의 거처(居處)"

 



‘사이’에 대한 묵상으로 강론을 시작하겠습니다.


우리는 흔히

‘사이가 좋다’

‘사이가 나쁘다’

‘사이가 멀다’

‘사이가 뜸하다’

‘사이가 가깝다.’라는 말을 쓰기도 합니다.

 

‘부모와 자식 사이’

‘남편과 아내 사이’

‘스승과 제자 사이’ 등

이미 사이에는 ‘나와 너’가 전제 되어 있음을 봅니다.

 

고립 단절된 나 혼자 라면 사이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새삼 네가 있어 나요, 내가 있어 너라는

철저히 관계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임을 깨닫습니다.


대화의 철학자 부버는

인간을 사이존재(Zwischensein)로 정의합니다.


인간이 나와 너 ‘사이’의 열린 공간에서

이러한 ‘사이의 영역’ 자체로 존재하면서

서로 나누는 대화가

인간의 존재론적 근본구조이기 때문입니다.


사이는 자유와 탐구의 공간입니다.


사이의 자유의 공간이 지켜져야

인간관계도 깊어질 수 있습니다.

 

서로 사이의 공간이 유린될 때

숱한 상처로 그 좋던 관계도 속절없이 무너집니다.


사이는 창조의 공간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새 아기가 태어납니다.

친구 사이에서는 우정이 태어나고,

진리를 찾는 도반 사이에서는 숱한 깨달음이 태어납니다.


사이는 생명과 사랑의 공간입니다.


사이를 잘 가꾸고 보살펴줘야

너도 나도 내외적으로 성장 성숙합니다.


진정 너를 존중하고 사랑한다면

나와 너의 자유와 창조의 공간이 사이를,

생명과 사랑의 공간인 사이를 지켜줘야 합니다.


언젠가 쓴 시 한 구절도 생각납니다.


‘사랑은 하느님 안에서 제자리를 지켜내는,

  사이를 견뎌내는 고독의 능력이다.’


과연 여러분의 사이들은 어떤 상태입니까?


그러나 저절로

자유와 창조,

생명과 사랑의 사이 공간이 되는 게 아닙니다.


바로 이 사이에 하느님이 계실 때

비로소 자유와 창조, 생명과 사랑의 공간이 됩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제자들 사이에 자리 잡으시면서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인사하시며 평화를 선물하셨습니다.

 

또 미사 중에 사제는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라는 선언으로

축복을 주시는 주님이

우리 사이 현존하심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하느님은 저 하늘 높이 계시지도 않고,

저 멀리 밖에 계시지도 않습니다.


바로 나와 너의 사이에

하느님이, 부활하신 주님이 계십니다.

 

너 없는 나 혼자만의 하느님 체험,

참으로 위험하니 환상이거나 착각이기 십중팔구입니다.

 

오늘 2독서 요한 묵시록의

하늘 옥좌에서 울려오는 큰 목소리가 이를 입증합니다.


“보라, 이제 하느님의 거처는 사람들 가운데 있다.

  하느님께서 사람들과 함께 거처하시고,

  그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 친히 그들의 하느님으로서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다시는 죽음이 없고,

  다시는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얼마나 은혜로운 말씀인지요!


부활하신 주님으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내려온 새 예루살렘의 예표,

이 거룩한 천상잔치 미사를 통해

앞당겨 체험하는 현실이 아닙니까?

 

어좌에 앉아계신 분의 말씀은 얼마나 통쾌한 복음인지요,

평생 화두로 간직하시기 바랍니다.


“보라, 내가 모든 것을 새롭게 한다.”


그렇습니다.


바로 지금 여기 나와 너 사이가 하느님의 거처입니다.


우리 사이 계신 하느님의 사랑이, 생명이

우리를 끊임없이 새롭게 합니다.

 

하여 늘 새 하늘과 새 땅을 살게 합니다.

 

하늘이, 땅이 새로워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우리 마음을 새롭게 하시기에

늘 새 하늘 새 땅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사이에 계신 하느님이

우리 사이를 끊임없이 정화시켜 주시고 성화시켜 주십니다.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고,

상처를 치유해 주시고,

죽음,

슬픔,

울부짖음,

괴로움이란 먹장구름들을

성령의 바람으로 말끔히 날려 버리십니다.


우리 사이에 하느님 거처하시기에

비로소 살맛나는 세상입니다.


굳이 성지 찾아 멀리 갈 것 없습니다.

 

우리 사이에 계신 하느님이시기에

지금 여기가 성지이고,

하느님의 생명과 사랑을

먹고 마시고 호흡하고 느끼면 충분합니다.

 

우리 사이에 하느님 계시기에

주님의 새 계명도 쉽사리 실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을 보고

  너희가 내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사랑,

결코 기분 사랑,

감정 사랑,

말 사랑,

마음 사랑이 아닙니다.


의지적 노력과 몸으로의

희생적 실천이 동반하는 사랑입니다.

 

사랑한다는 말 안 해도

묵묵히 사이에 계신 주님의 사랑을 본받아

서로의 사이를 존중하고 지켜주며, 섬기면서

함께 살아가는 것보다 더 큰 사랑도 없습니다.


사실 우리 사이에 주님 계시지 않으면

너와 나와의 대화도 충분한 효과를 거둘 수 없습니다.

 

너와 나와의 대화라지만

자칫하면

나만의 독백(monologue)의 대화가 될 수 있기에

주님을 사이에 두고 하는 삼자 대화(trilogue)여야

비로소 겸손히 귀 기울여 듣게 되므로

진정한 대화(dialogue)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일꾼이자 성령의 사람,

바오로와 바르나바 두 사도들,

누구보다 그들 사이에 현존하신 부활하신 주님께

늘 깨어있었음을 봅니다.

 

두 사도들,

그들 사이에 현존하신 부활하신 주님에 힘입어

선교지마다 제자들의 마음을 북돋아 주고

계속 믿음에 충실하라고 격려하면서

원로들을 임명한 후에는

곧장 그들을

그들 사이에 계신 주님께 의탁했다하지 않습니까?


선교 여행 후,

두 사도는 교회 신자들을 불러

하느님께서 자기들과 함께 해 주신 모든 일과

또 다른 민족들에게

믿음의 문을 열어주신 것을 보고하였다 합니다.

 

선교 열매의 공을

늘 그들 사이 함께 계셨던 하느님께 돌리는

겸손한 바오로와 바르나바 두 사도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거처는 저 멀리 하늘위에 있는 것도 아니고

죽어서 가는 곳도 아니요,

바로 지금 여기 우리 사이에 있습니다.

 

마태복음 마지막 28장 20절에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며

제자들은 물론

우리 모두에게 주신 부활하신 주님의 약속 말씀이 생각납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오늘도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 같은 미사를 통해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사시기 위해

우리 사이로 오시어 모든 것을 새롭게 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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