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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에게 나를 드러내 보이겠다.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5-07 조회수724 추천수4 반대(0) 신고

 

 

<그에게 나를 드러내 보이겠다.>


“내 계명을 받아 지키는 이야말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나도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나 자신을 드러내 보일 것이다.”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요한 14,21-26)



  요한 복음서에서 정말 올바로 이해하기 난해한 대목이 몇 개 있는데, 이 대목이 대표적입니다. 14장에서 세 제자들이 차례로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이 세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을 통해서 예수님의 신비가 조금씩 벗겨지고 있습니다. 모두 예수님을 직접 눈으로 뵐 수없는 미래의 제자들인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려고 쓴 대목입니다.

 

토마스가,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

필립보가, “주님, 저희가 아버지를 뵙게 해 주십시오. 저희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하겠습니다.”

다른 유다가, “주님, 저희에게는 주님 자신을 드러내시고 세상에는 드러내지 않으시겠다니 무슨 까닭입니까?”


  이 중에서 다른 유다의 질문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示唆하는 질문 내용이고 답입니다. 많은 교우님들이 종교 다원 시대에 살면서 하나의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진정 유일하신 하느님이시고 그 아드님이시라면 왜 인간들이 다양한 종교를 지니고 그들 나름대로 믿음을 지켜나가는가? 그나마 유일신을 믿는 종교는 차치하고라도, 전혀 다른 신앙을 이야기하고 있는 불교, 힌두교, 유교 등등은 과연 우상 숭배이며, 어찌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느님과 예수님의 진리가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가?

   왜 하느님의 진리가 세상에 낱낱이 드러나지 않고 더디게 감추어져만 있는지 궁금해집니다.


  여기서 C. M. 마르티니 추기경의 글을 통해 일부나마 깨달을 수 있습니다. -성서묵상 요한복음 참조. 마르티니 지음. 바오로 출판사. 1986. p116

  

  마르티니 추기경은, 유다의 질문이 신앙은 단계적으로 성숙해가는 것인데 그것을 완전히 깨닫지 못한데서 오는 질문이라고 봅니다. 신앙은 과시나 전시효과가 아니라 인격적 결단을 통해 신앙이 성숙해가는 것이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서 7,3-4절에서 예수님의 사촌 형제들이 “이곳을 떠나 유다로 가서, 하시는 일들을 제자들도 보게 하십시오. 널리 알려지기를 바라면서 남몰래 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일들을 할 바에는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십시오.” 라고 요청하는데, 마르티니 추기경은 그렇게 말한 숨은 의도가 예수님을 널리 알려서 그 인기에 편승해서 자신들의 출세나 덕을 보고자하는 속셈이 담겨 있는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사실 오늘날에도 많은 장사치나 정치가들이 교회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이익과 선전을 위해서 교회를 이용하고 있으며, 많은 개인들도 거룩한체하며 자기 과시에 교회를 이용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나주 율리아파입니다. 교회의 교도권에 순명하지 않습니다.


  또 잘 드러나지 않는 것이 있는데 비록 신앙을 이용하여 자신의 성공을 도모하지는 않으나, 신앙자체의 성공을 도모하려는 것입니다. 자기가 예수께 귀의한 것이 당당하게 알려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모두가 자기처럼 한꺼번에 신앙에 빠지기를 바라게 됩니다.

  마르티니 추기경은 신앙은 개개인이 인격적 결단을 통해서 받아들여지고 전파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음에 심겨진 씨앗과 같아서 때가 되어야 싹이 트고 자라게 된다고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방법이 따로 있으며 그 방법을 믿고 기다리는 것이 올바른 태도라고 합니다. 아무리 좋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라도 하느님의 뜻에 맞아야하는 것입니다. 인간의 업적을 내세우는 것보다 하느님의 역사를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유다는 우리가 빠지기 쉬운 인간의 업적주의를 묻고 있는 것입니다.


  토마의 질문은 신앙을 위해 어떤 책을 읽고 어떤 수행을 해야 하는지, 그 실천요강을 묻고 있는 것입니다. 초보 단계에서는 그런 수단들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느 경지에 이르러서는 예수님의 인격에로 통합을 이루어야 합니다. 예수님만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고 하실 수 있습니다.


  필립보의 질문은 하느님을 뵙고 싶다는 열망을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모두 이 열망에 한 번쯤은 빠지게 됩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성사를 통해서 아버지를 보여 주시고 있다는 것을 잊은 소치입니다.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라는 말씀을 우리는 “교회를 보았으면 곧 나를 본 것이다.”라는 말씀으로 이해하여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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