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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오늘도 '해미성지'를 가며
작성자지요하 쪽지 캡슐 작성일2007-05-07 조회수648 추천수4 반대(0) 신고

                   오늘도 '해미성지'를 가며

      


<1>

어렸을 때부터 순교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들으며 자랐다. 초등학교 4년 시절인 1957년 우리 고장에 천주교회 공소(公所)가 생긴 이후 공소에서 생활하시는 노인 복사(服事)님 방을 자주 찾게 되었다. 텔레비전은 물론이고 라디오도 흔하지 않던 시절이었다. 또 만화책도 귀하던 때였다. 저녁에 공소를 갈 적마다 남포불이 켜진 복사님 방에서 노인 복사님으로부터 순교사화(殉敎史話)를 즐겨 듣곤 했다.

그러니까 나는 전깃불도 없던 시절 시골의 공소 방에서 어른으로부터 순교사화를 들으며 자란 세대 중의 한 사람이고, 그것을 조금은 자랑스럽게 여기는 사람이다.

순교사화를 들으면서 어린 시절부터 한 가지 의문을 갖게 되었다. 내가 만약 박해시대를 산다면, 그리하여 나에게도 순교 상황이 닥친다면, 나도 과연 순교를 할 수 있을까? 온갖 고통들 속에서도 끝내 배교하지 않고, 그 끔찍하고도 참혹한 고문들을 다 이겨내고 순교를 할 수 있을까?


▲ 1935년에 발굴되어 1995년까지 서산시 음암면 상홍리 공소 근처 백씨 문중 선영에 임시 안치되었던 60명 정도의 순교자 유해 외로 계속 발굴된 유해들은 2003년에 건립된 '유해참배실'의 유리관 안에 안치되었다.  
ⓒ 지요하

왠지 자신이 없었다. 순교자들이 치른 갖가지 고난과 끔찍한 고문들을 생각하면 오금이 저렸다. 너무 무섭고 참혹했다. 나는 도저히 순교를 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무서운 고문에 못 이겨 결국은 배교를 하고 말 거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러면 이상하게 마음이 슬퍼졌다. 나는 도저히 순교를 할 수 없을 거라는, 더 나아가 배교를 하고 말 거라는 생각은 내게 묘한 절망감을 안겨주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순교의 뜻을 많이 생각했다. 온갖 고난과 고문을 겪고도 모자라 결국엔 목숨까지 바치는 것을 일러 '승리'라 하고, '영광의 순교화관'을 썼다고 하니, 정말로 엄청난 모순이고 역설이었다. 그 모순과 역설 속에 진정한 영광이 존재하는 이치(진리)는 나를 고민하는 아이로 만들었다.

하느님 때문에 많은 사람이 극심한 고난을 겪고 고문을 당하고 죽어갔다는 사실, 하느님 때문에 내가 오늘 이런 고민을 한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했다. 하느님에 대한 '믿음' 때문에 사람이 고통을 겪고 죽기까지 한다는 사실에서, 그 '때문에'라는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느님 때문에 세상이 존재하고, 하느님 때문에 내가 세상에 태어났고, 하느님 때문에 내가 세상을 살지만, 도저히 순교는 할 수 없을 거라는 이상한 절망 속에서 괜한 고민도 많이 했지 싶다. 정말이지 나는 하느님 탓에 '때문에'라는 한마디 접속부사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 순교자들이 생매장 장소로 죽음의 행렬을 하면서 기도하던 "예수 마리아! 예수 마리아!" 소리를 "여수머리"로 알아들었던 당시 주민들의 입으로 전해져 내려와 오늘날에는 '여숫골'이라는 이름의 땅이 되어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 지요하

청소년 시절 한때는 성당에 가는 것을 기피하여 부모님 속을 많이 썩였다. 당돌한 말과 행동으로, 노골적으로 신앙생활을 기피하여 어머니가 고해소(告解所)에서 눈물을 흘렸을 정도였다.

당시 태안 성당 초대 주임이셨던 콜롬비아인 고대연 야고버 신부님은 어머니를 위로하며 "그 아이는 하느님에 대한 기본적인 믿음 때문에 하느님에게서 멀리 가지 못하고 곧 돌아올 테니 너무 걱정말라"는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나는 군에 입대한 후 하느님 신앙을 회복하기 시작했고, 월남 전장에서는 착실하게 신앙생활을 했다. 한때의 방황도 실은 하느님 때문에 생긴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아무리 하느님을 부정하고 거부해도, 그것은 기껏해야 조물주에 대한 '응석'일 뿐이라는 생각도 했다. 하느님께 반항을 하면 할수록 무의미를 키우는 일 일뿐이고, 꼭지 떨어진 오이 신세가 될 뿐이며, 이왕 하느님을 믿을 바에는 제대로 충실히 믿자는 생각도 했다.

월남 전장에서 고국의 아버지께 꽤 많은 편지를 드렸는데, 그 편지들에 그런 얘기들, 즉 하느님 신앙에 관한 얘기들을 많이 적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2>

젖먹이 시절에 전주 전동성당에서 부모님·누님과 함께 영세를 하고, 걸음발타던 시절에 고향으로 돌아와 태안 성당의 뿌리와 같은 신자로 오래 신앙생활을 해오면서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은, 청소년 시절 한때의 방황을 제외하고는 내 신앙생활이 한 번도 휘거나 굽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짧은 '방학' 한 번 없이 정말로 올곧게 신앙생활을 해왔다.

나에게는 눈에 보이지 않는 '첫'이라는 표식이 많이 붙어 있다. 첫 미사복사, 첫 학생회장, 첫 청년회장, 첫 전례(주송) 봉사자, 첫 레지오 단원, 첫 교리교사 등등의 표식이다. 지금까지 도합 열두 분(두 분의 보좌 신부님을 합하면 열네 분)의 신부님을 모시면서 본당 공동체를 위해 제법 많은 일을 했고, 나름으로 열심히 살아왔다.


▲ 생매장할 신자의 수효가 적을 때는 번거로움을 덜기 위해 개울 한 가운데에 있는 둠벙에 빠뜨려 죽이는 수장형이 시행되기도 했는데, 주민들은 천주학 죄인들을 빠뜨려 죽인 둠벙이라 해서 '죄인둠벙'이라고 불렀고, 지금은 '진둠벙'으로 불리고 있다.  
ⓒ 지요하

그리고 지난 2004년 '본당설정 40주년 기념 행사준비위원장'을 끝으로 성당의 직책에서는 완전히 떠나 있다. 본당 초유이자 마지막인 40주년 행사위원장을 마치면서 신부님께 메일로 소청을 드렸다.

"업적과 명성을 크게 쌓지 못한 처지이긴 하지만, 저는 작가입니다. 주변으로부터 전혀 보호받지 못하는 대신 스스로 저 자신을 방어하며 작가로서 좀 더 충실히 살고 싶습니다. 작가는 한없이 게을러야 하고 자유로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일상의 게으름과 자유로움이 저를 작가로 살게 할 수 있다고 봅니다. 40주년 행사들을 다 치르고 마무리를 하고 나면, 그 후부터는 아무 직책도 맡지 않고 싶습니다."

고맙게도 신부님은 내 소청을 들어주셔서 나는 자유로움 속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지금은 레지오 활동과 성가대 봉사만을 하지만, 평일 미사 참례를 일상의 중심에 놓고, 여전히 올곧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비록 어느덧 이순(耳順)의 나이에 이르러 무안함과 부끄러움이 없지 않지만, 작가로서 이승의 성공과 명성만을 탐하고 싶지는 않은 내 나름의 '여유'를 가지고 작가 명색을 유지한다. 나로서는 현실적 성공이나 명성보다 더 중요한 것이 신앙이다. 주변의 문우들로부터 내가 작가로서 크게 성공하지 못하는 것은 고지식한 성품과 하느님 신앙 때문이라는 농담 섞인 평도 종종 듣는데, 옳은 평가라고 생각한다. 그것도 하느님 '때문'이라면, 나로서는 마땅히 감수하고 또 좋아해야 할 일이다.

신경 쓰고 시간 쓸 일이 많은 일상 속에서도 일주일에 한 번씩 70리 거리인 해미성지에 가서 물을 길어오는 일을 지금도 계속하고 있다. 내 12인승 승합차 가득 수십 통의 물을 길어다가 여러 집들과 나누는 일이다. 1996년에 시작했으니 어느덧 11년을 헤아린다.

살아 있는 물이니 생수(生水)요, 성지에서 나오는 물이니 성수(聖水)요, 서산시청에서 일 년에 네 번씩 실시하는 수질검사 결과가 약약수(弱藥水)요, 옛날 대원군 시절 생매장을 당한 수많은 순교자들의 몸에서 흐른 물이니 육수(肉水)다. 심산유곡도 아닌 곳에서 나는 물이 약수인 것은 순교자들의 육수 덕이다.

이렇게 네 가지 성격을 지닌 더없이 좋은 물인 '사수(四水)'를 길어다가 나 혼자 마신다면 그것은 죄를 짓는 일이다. 시간 쓰고 고생하며 먼 곳을 가서 길어오는 물이니 최대한 이웃들과 나누어야 한다.


▲ 해미성지 안의 '14처'를 차례로 돌며 '십자가의 길' 기도를 하고 있는 신자들  
ⓒ 지요하


그 일 덕분에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은 해미성지에 가서 수많은 순교자들을 뵙는다. 어쩌면 나는 자주 순교자들을 뵙기 위해 일주일에 한 번씩 해미성지로 물을 길으러 가는지도 모른다. 옛날 어렸을 때 공소 방에서 노인 복사님으로부터 순교사화를 들으며 자란 탓일지도 모른다.

나도 박해상황에 처하면 과연 순교를 할 수 있을까? 수없이 스스로 가지는 의문 앞에서 너무도 자신 없음에 한숨 쉬며 괴로워했던 소년 시절의 그 절망 같은 고민이 오늘날에도 내 마음 안에서 알게 모르게 작동을 하는 탓일지도 모른다.

박해시대가 아닌 오늘, 일상생활 속에서 조금씩이나마 스스로 나를 희생시키는 것이야말로 '작은 순교'일 수 있다는 생각도 하면서, 이런 작은 봉사와 선행에도 하느님께서 조금은 점수를 쳐주실 거라는 생각도 하는데, 그것도 생각해보면, 해미성지의 무명순교자들 때문에, 그리고 하느님 때문에 가질 수 있는 생각일 것 같다.

나는 언젠가 한번 해미성지의 돌 위에 앉아 수많은 무명순교자들을 떠올리면서, 그리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면서 '때문에'라는 접속부사의 '실체'를 절절히 체감한 적이 있다.

굳이 기억을 떠올려보면 1993년 10월 어느 날의 일이다. 어머니 칠순잔치를 하던 야외음식점의 분수(噴水) 연못에 네 살배기 조카녀석이 빠져 죽은 일로 해서, 나를 위로하던 한 친구로부터 "그러니께 하느님은 읎는 거지유?"라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아무 대답도 못하고 그 길로 해미성지로 달려갔다.

그리고 성지 안을 걸으며, 돌 위에 앉아 무명순교자들의 비참한 주검을 떠올리며 '그들은 왜 그렇게 죽어간 것일까?'라는 의문을 수없이 떠올렸다. 거기에서 해답을 구할 수 있었다. 그들은 현존하는 하느님 '때문에' 죽었고, 기쁘게 죽을 수 있었던 것이었다.

<3>

요즘에도 '때문에'라는 접속부사의 의미를 많이 생각한다. 지난 3월 30일 해미성지에서 있었던 '해미순교성지 회원을 위한 사순절 하루 피정'에 참가하고 난 후 그 접속부사의 의미를 더욱 깊이 가슴에 안게 되었다.

나는 해미성지 후원회원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다. 매월 1만원씩 자동이체로 회비를 내고 있다. 2003년 6월 축성 봉헌된 대성당을 지을 때는 100만원의 건립 기금을 봉헌했다. 해미성지에서 죽은 무명순교자들이 대략 3천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하고, 3천명의 후원회원을 모집하여 100만원씩 모은 30억원으로 대성당을 지었는데, 거기에 나도 일조를 한 것이다.

그리하여 대성당 원형 로비 수십 개의 대리석 기둥에 3천명 후원회원들의 이름이 새겨졌는데, 내 이름도 거기에 올랐으니 그보다 더 큰 영광은 없을 듯싶다. 나는 수많은 무명순교자들을 기리며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해미성지 대성당의 현관 기둥에 내 이름이 새겨진 것을 상기할 때마다 이름 없는 순교자들께 죄송스러움을 느끼는 한편으로 그분들의 고귀한 순교정신을 내가 조금이라도 본받게 되기를 기도하곤 한다.

해미성지는 3천명의 기존 후원회원들을 상대로 해미성지 유지 관리를 위한 지속적인 성금(후원회비)를 유도했는데, 그 3천명 중에서 2천명 정도가 후원회원으로 남아 있는 상태라고 한다. 그리고 그 2천명 중에서도 실제로 활동(회비 납부)을 하는 회원들은 1천명 정도이고, 매월 지속적으로 회비를 보내는 회원 수는 더 적어서, 해미성지는 여러 가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형편이다.


▲ 60여 명 순교자들 유해가 함께 묻힌 서산시 음암면 상홍리 공소 근처의 묘를 1995년 해미성지로 이장할 때 상홍리 공소 일부 신자들은 내게 교구청에 제출할 반대 청원서 작성을 부탁해왔다. 60년 동안 지켜온 순교자 묘소를 '빼앗기고' 싶지 않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교회 방침에 순명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 지요하

그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한 방책으로 지난 3월 30일 처음으로 '회원의 날' 행사를 가졌다. 반송 엽서로 초청을 하고 참가 신청을 받은 결과, 애초엔 500명 정도 참가할 것으로 예상되었는데, 비가 오리라는 기상 예보 탓에 300명 정도 참석했다. 그래도 성공적인 행사였다.

그날은 토요일이어서 아내도 오후 일찍 학교를 나와 함께 갈 수 있었다. 우리 태안 본당에서는 우리 부부 외로 5명의 회원 자매들이 참가했는데, 아쉽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한마음이었다.

오전 11시에 미사를 지내고 낮 12시에 점심을 한 다음 참가자들은 오후 1시 50분까지 자유시간을 가졌다. 참가자 대부분은 자유시간을 이용하여 성지 안의 '14처'를 돌며 '십자가의 길' 기도를 했다. 그리고 오후 2시부터 서산동문성당 주임 겸 서산지구장 배승록(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님으로부터 '교부들의 순교신앙과 사순정신'이라는 이름의 특강을 들었다.

프랑스에서 오래 '교부신학'을 공부하고 박사학위를 받은 다음 돌아와서 대전가톨릭대학 교수로 일하시기도 했던 배승록 신부님의 강의를 들으며 많은 감명을 받았다. 그 강의 중에는 '때문에'에 대한 말씀도 있었다. '∼ 때문에'라는 것이 모든 존재 이유의 기본인 것이야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것이지만, 그것의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이야기들을 들으니 실로 감명 깊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로부터 벌써 한 달이 지나면서 배승록 신부님의 특강 내용은 거의 잊었지만, '∼때문에'라는 어휘는 지금도 내 뇌리에 명확하게 살아 있다. '때문에'라는 것은 누구에게나 고르게 배분되어 있지만, 그것의 인식 여부와 인식 정도는 각자의 마음에 달린 일이다. 물론 그것의 인식 여부와 인식 정도에 따라 삶의 목표와 형태도 달라질 것이다.

나는 오늘도(요즘은 매주 수요일 오후에) 해미성지를 간다. 일주일에 한 번씩 해미성지를 가는 것은 이미 10년을 넘긴 '일상'이나 다름없는 일이지만, 그 일상은 바로 '∼ 때문에' 시작되었고 유지되는 일이다. 더불어 '∼ 때문에'를 끊임없이 되새기고 확인하는 일이기도 하다. 고로 그것은 바로 내 존재 이유이기도 하고….  


덧붙이는 글

1997년이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해미성지를 순례하는 개신교 신자들을 보고 크게 감동한 적이 있습니다. 태안군 근흥면 정죽리에 소재하는 안흥장로교회 신자들이라고 하더군요. 천주교 성지를 찾은 개신교 신자들을 보면서 저는 하느님께 감사했습니다. 또 언젠가는 스님 복장을 하신 분들이 여럿 성지 안을 둘러보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참으로 아름다운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해미성지에서 그런 풍경도 많이 보게 되기를 소망하며, 해미성지의 홈페이지 주소를 소개합니다. 해미성지를 자세히 알고자 하시는 분들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http://www.haemi.or.kr)

  
  2007-05-07 11:19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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