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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5월 13일 야곱의 우물-요한 14-, 23-29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7-05-13 조회수564 추천수1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바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내 말을 지키지 않는다.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다.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주실 것이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 '나는 갔다가 너희에게 돌아온다.'고 한 내 말을 너희는 들었다. 너희가 나를 사랑한다면 내가 아버지께 가는 것을 기뻐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나보다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나는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다.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요한 14,23-­29)

어느 해인가 8일 피정을 시작하면서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인이 만나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묵상하였습니다.
어느 날 예수님과 제자들이 사마리아 지방을 지나가게 됩니다. 먼 길을 걸어오시느라 지치고 배고픈 한낮, 제자들은 모두 시내로 먹을 것을 사러 가고 예수님 혼자서 우물가에 앉아 계셨지요. 이때 한 여인이 물동이를 이고 물을 길으러 왔습니다. 예수께서는 그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하셨지요. 여인은 유다인이 자기에게 말을 걸고 더구나 물까지 달라고 하여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유다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적대관계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유다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부정하다고 여겨 상종도 하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제 두 사람의 대화가 오고 갑니다. 시작은 마치 동문서답식 대화 같았는데 차츰차츰 여인은 예수님의 말씀에 동화됩니다. 마침내 그녀는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달려가 그분이 그리스도일지 모른다고 전했습니다(요한 4,1­42).

 

피정 마지막 무렵의 주제는 요한복음 21장, 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 부분이었습니다.
바닥이 환히 비치는 맑고 투명한 갈릴래아 호수. 물결이 햇살에 반짝이며 호숫가에 부드럽게 밀려왔다 밀려갔으며 두 사람이 해변을 나란히 걸어가고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예수님이었고 그 옆에 있던 사람은 베드로가 아니라 저 자신이었습니다. 예수께서 앞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이제는 내게 물을 줄 수 있겠니?" 나는 선뜻 "예, 주님!"이라고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옥빛이 도는 맑은 물결을 쳐다보면서 머뭇거렸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베드로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너,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묻지 않으시고 왜 "물을 줄 수 있느냐고 물으셨을까?"라는 의문은 갖지 않았습니다. 같은 내용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라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물을 길으러 왔던 사마리아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둔 채 마을로 달려갔습니다. 예수께서 주시는 생명수를 마셨기 때문입니다. 여인이 예수께 물을 떠 드렸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대신 예수님은 내게 물을 청하셨습니다. "이제 물을 줄 수 있는가?"라는 표현에서 그동안 무척 기다려 오셨다는 것과 강요하지 않는 정중함을 느꼈습니다. 비록 대답도 못하고 물도 드리지 못했지만 지금도 자꾸 떠오르는 성가가 있습니다. "날 먼저 사랑하신 주는 사랑받기 원이시라 / 내 가슴이 숨 쉬는 만큼 주님 사랑하리이다. 주님 사랑하리이다."(가톨릭성가 332번 2절)

"진짜?" 하고 묻듯이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요한 14,23)라고 하십니다. 도취하여 노래하는데 마치 찬물을 끼얹는 듯이 말입니다. 사실 말과 노래로는 사랑한다고 할 수 있지만 사랑의 증거는 삶으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표시는 얼마나 이웃을 사랑하느냐로 드러납니다. 내가 "예, 주님!" 하고 대답할 수 없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사랑을 행할 물동이도 두레박도 준비되어 있지 않았던 것이지요.

 

마더 데레사가 하느님을 사랑하였다고 생각합니까? 그렇습니다. 이유는 그분이 사람들을 사랑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가장 버림받은 사람들을 소중히 생각하며 돌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가장 보잘것없는 사람과 당신을 동일시하셨습니다. 마더 데레사의 일을 보면 예수님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그러기에 그는 하느님을 참 많이 사랑하신 분이십니다. "당신이 이룬 일에는 어떤 것이 있습니까?"란 질문에 그분은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일이나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고 단지 거기 존재하는 겸손이지요. 그 일의 가치는 그 일을 고무시키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정신에서 온다고 우리는 믿습니다. 이웃에 대한 사랑 없이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종교와 종파를 초월하여 만인의 존경을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죽는 순간 우리는 우리가 행한 일의 양으로 판단받는 것이 아니라 그 일에 쏟았던 사랑의 무게로 판단받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자기 희생으로부터, 곧 아픔을 느낄 정도의 큰 희생에서 흘러나옵니다." 이는 마태오복음 25장 "최후의 심판"을 상기시켜 줍니다.

󰡒누구든지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킬 것이다. 그러면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가서 그와 함께 살 것이다.󰡓(14,`23)
우리는 그리스도의 지체입니다. 물론 우리 모두가 다 마더 데레사처럼 살 수는 없겠지요. 각자가 받은 소명대로 살 것입니다. 󰡒이제 내게 물을 줄 수 있겠니?󰡓라고 청하신다면 아직도 자신 있게 대답할 수는 없지만 이제 어떻게 물을 드려야 하는지를 조금씩 깨달아 갑니다. 작은 일을 큰 사랑으로 하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작심삼일이라, 번번이 좌절하는 것이기도 했는데 그것이 내 의지대로 잘 안 된다는 것, 내 안에 그런 에너지와 사랑이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릇이 쓰이기 위해 비워져 있어야 하듯이 먼저 단단히 주먹 쥔 손을 펼치는 것, 하느님께 승복하고 그분의 어린이가 되는 것, 하느님께 인정받을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데도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느끼는 것, 희생하고 사랑해야만 하느님의 자녀 자격이 있다는 무의식적인 강박관념에서 해방되는 것에서 출발하는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거기서부터 샘솟는 사랑을 받고 있음에 대한 안도감, 자유로움, 그리고 그 아래서 새록새록 떠오르는 감사의 마음, 자연스럽게 사랑할 수 있는 힘이 흘러나옴을 느낍니다. 작심하지 않아도 내 안에서 자연스러이 흘러나오는 것이기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왼손이 모르게 할 수 있는 것입니다(마태 6,`3 참조).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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