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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병마와 싸우며 문학 공부를 하시는 칠순 할머니
작성자지요하 쪽지 캡슐 작성일2007-05-17 조회수529 추천수6 반대(0) 신고

     병마와 싸우며 문학 공부를 하시는 칠순 할머니

        



<1>

벌써 일 년 전 일이다. 지난해 5월 중순경 전혀 모르는 분으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충남 태안군 남면 달산리에서 사시는 김은자(金銀子)라는 여자 분이었다. 편지를 꺼내 보니 컴퓨터로 쓰여서 읽기는 편한데, 문장은 별로 좋은 형태가 아니었다. 37년생 할머니로 서른셋 나이에 남편과 사별한 후 35년 세월을 흙 속에 묻혀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오신 분이라고 했다.

9년 전 위암 수술을 받고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났으나 거동이 불편하여 거의 집안에서만 소일하는데, 지금은 파킨슨병으로 손놀림이 자유롭지 못해 컴퓨터 자판으로 겨우 글을 쓴다고 했다. 비록 병고를 겪으며 외롭게 살고 있는 처지이지만, 식물인간이 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주위의 모든 것에 감사하며 산다고 했다.

"매사에 긍정적인 사고로, 좋은 문학을 통하여, 부처님의 교훈을 통하여, 흙내음 물씬 풍기는 경이로운 자연과 교감하며, 그 모두에 감사하며 생각을 좋게 하고, 황혼의 끝자락에 머물고 있는 시점에서 절약된 시간 속에 늘 밝은 마음으로 지낸답니다."


▲ 김은자 할머니가 지난해 10월 우리 집을 방문하실 때는 경기도 의정부에서 산다는 막내사위가 수고를 했다.  
ⓒ 지요하

김은자 할머니는 또 한차례의 심각한 건강 장애로 지난해 2월 7일부터 5월 4일까지 석 달가량 태안군보건의료원에 입원하여 병상 생활을 했다고 했다. 그리고 거기에서 처음으로 <태안문학>을 접했다고 했다. 입원 생활을 하는 동안 의료원 로비 책장 안에 있는 <태안문학>들을 모두 읽고 많은 감명을 얻었다고 했다.

그리하여 김은자 할머니는 내게 편지를 보내게 된 것이었다. "선생님 슬하에서 글 쓰는 법을 배워보겠다는 불타는 향학열을 이기지 못해 제 주제도 모르면서 감히 태안문학 회원 가입을 요청 드리오니…"라는 말은 참으로 간곡한 말씀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김은자 할머니의 편지 내용(문맥이며 맞춤법과 띄어쓰기 등은 많이 틀려 있었지만)에 크게 감동했다. 큰 병고를 치르고 또 힘겹게 안은 상태로 농촌에서 외롭게 사시는 칠순의 할머니가 글을 쓰고 싶은 마음을 갖고 있다는 사실, 글을 제대로 쓰기 위해 글 쓰는 법을 배울 요량으로 <태안문학회> 입회를 희망한다는 사실은 정말 감동적인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편지를 받은 그날로 할머니께 전화를 드렸다. 할머니의 목소리는 여리고 힘이 없었으며 병색을 느끼게 했다. 그러면서도 내 전화를 반가워하고 감사하는 그 음색 속에서 어떤 희망과 남다른 의지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목소리의 톤을 높이고 발음을 또박또박 정확히 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지만, 김은자 할머니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러면서 생면부지의 김은자 할머니와 나 사이에 남다른 인연이 시작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2>

지난해 7월 16일(주일) 오후 김은자 할머니가 우리 집을 방문했다. 서울에서 살고 있는 아들 조홍상(趙弘相·37)씨가 연휴를 맞아 집에 내려온 덕분이었다. 할머니는 아들의 차를 이용해서 쉽게 우리 집에 올 수 있었고, 초등학생들인 손자와 손녀도 함께 왔다.

조홍상씨는 김은자 할머니가 내리 딸 셋을 낳고 겨우 얻은 아들로 3대 독자라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는 남매만 두었는데 자녀를 더 가질 생각은 없다고 했다. 증권회사의 과장으로 일하는 생활이 늘 빡빡해서 자주 고향에 내려오지 못한다고 했다. 어머니를 모시지도 못하고, 몸이 불편하신 어머니가 혼자 사시는 고향집에 자주 내려오지도 못해서 어머니께 죄를 많이 짓는다고 했다.

하지만 김은자 할머니는 아들이 효자라고 했다. 어머니가 읽고 싶어하는 책을 다 구해주고, 어머니의 글들을 즐겨 읽어주며 용기를 갖도록 해주고, 컴퓨터도 가르쳐주고, 어머니의 병 치료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고 했다. 딸 셋도 다 효성이 있어서 자식들 덕에 살지만 몸이 건강치 못하여 자식들에게 짐이 되는 것 같아 미안한 마음도 크다고 했다.

 


▲ 김은자 할머니 혼자 생활하시는 집의 거실에는 컴퓨터도 있다. 노인은 불편한 손으로 컴퓨터를 이용하여 글을 쓰시고...  
ⓒ 지요하

조홍상씨는 어머니의 컴퓨터에서 글을 몇 개 뽑아왔다며 내게 서류 봉투를 내밀었다. 시 다섯 편과 수필 두 편이었다. 그 글들이 담긴 디스켓은 없었다. 어머니께서 인터넷도 하시느냐고 물으니 아직 인터넷은 연결되어 있지 않고, 어머니가 글을 쓰는 일에만 컴퓨터를 사용한다고 했다.

나는 다음날 방학 동안 집에 와 있는 딸아이를 시켜 김은자 할머니의 글들을 모두 내 컴퓨터에 담아놓게 했다. 앞으로 김은자 할머니의 글들을 많이 접하고 손보는 일을 하게 될 같아 아예 내 컴퓨터 문서 방에 '김은자'라는 폴더를 만들었다. 또 그 폴더 안에 '운문'과 '산문'이라는 폴더를 만들어놓고 거기에 김은자 할머니들의 글들을 나누어 넣었다.

그리고 김은자 할머니의 글들을 면밀히 읽어보니 손볼 데가 꽤 많았다. 앞으로 내 노고와 시간을 좀 바쳐야 할 것 같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김은자 할머니와의 인연이 소중하긴 하지만, 조금은 짐이 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동안 고장에서 문학단체들을 운영하면서, 또 한때 서산을 다니며 지역잡지와 지역신문을 만들면서 남의 글을 고치고 매만지는 일을 하느라 많은 시간과 노고를 바쳐온 처지였다. 때로는 마누라에게 내 고달픈 신세를 한탄하기도 했다. 남의 글을 고치고 매만지는 일은 사실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하지만 보람도 있는 일이었다. 대개는 내가 손보는 것에 대해 불평이나 항의를 하지 않았다. 자신이 쓴 문장과 내가 손본 문장을 비교해보고 수긍하며 내게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공부가 되고 발전의 밑거름이 되어 점차 문장력이 향상되었다. 지난번보다 다음번 글은 손볼 부분이 좀 더 줄어드는 현상을 보이더니 종래에는 전혀 손볼 필요가 없는 글을 쓰게 되었다.

나는 그런 사실에서도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 내가 고장에서 처음 문학운동을 일으키고 오래 유지해오면서, 주변의 문재(文才)들을 다수 발굴하여 양성하고 등단시켜 문인 칭호를 가지게 한 보람의 이면에는 그런 과정도 있었던 것이다.

나는 김은자 할머니에게도 일단은 기대를 갖고 싶었다. 칠순이 넘으신 병약한 노인에게 그런 공부와 향상이 과연 가능할까 하는 회의가 없지 않았지만, 노인의 의욕에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3>

지난해 12월에 발간된 <태안문학> 17집에 김은자 할머니의 시 5편과 수필 2편을 올렸다. 노인께 미리 말씀을 드렸다. 아마추어들이 다수인 지방 문학동인지지만, 글꼴만이라도 제대로 갖춘 글을 싣는 것이 독자들에 대한 예의임을 우선 말씀드렸다. 남의 글을 손보는 일의 어려움(또 조심스러움)과 그 일에서 얻은 과거의 보람들도 소개하고, 활자화되어 나온 글과 자신의 원고를 유심히 비교해보면 자연 공부가 될 거라는 얘기를 해드렸다.

활자화된 글을 보면 글이 더 잘 보이는 사실, 활자화를 병행하는 공부가 좀 더 실질적인 효과를 가져오기도 하는 측면에 대해서도 설명을 드렸다. 김은자 할머니는 내 얘기를 이해했고, 내 노고와 시간 손실을 걱정하며 "송구하다"는 말로 미안함을 표했다.


▲ 김은자 할머니의 불편하신 몸에는 오랜 농촌 생활의 수많은 노고들이 응축되어 있는 듯하다.  
ⓒ 지요하

책이 나왔을 때 김은자 할머니는 누구보다도 기뻐했다. "가슴 설렌다"는 말소리에 설레는 감정이 담뿍 묻어 있었다. 책이 많이 필요한 듯했다. 그래서 김은자 할머니께는 예외적으로 60권도 넘는 책을 드렸다.

김은자 할머니는 내 노고와 시간 손실을 잘 아시는 듯했다. 송구하다는 말로 거듭 미안함을 표했다. 나는 노인의 편지를 받고 당혹스럽고 송구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내게 매번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시는 것이야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편지 말미에 적혀 있는 '선생님의 제자 김은자 올림'이라는 말은 나로서는 너무도 뜻밖이었다.

노인은 의미심장하게 느껴지는 말씀도 편지에 적고 있었다. "제 글을 읽은 친지들에게 자신 있게 제가 쓴 글이라고 말하기에는 아무래도 겸연쩍은 감이 있습니다"라는 말씀이었다. 나는 노인의 그 말씀을 놓고 이모저모로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어쩌면 내가 손을 본 글꼴 상태로 문장 실력을 향상시킬 자신이 없으신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자신이 없으므로, 매번 내게 부담을 주게 될 것이 김은자 할머니는 더욱 부담스러운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는 무엇보다도 김은자 할머니의 고지식하고 정직한 성품을 감안해야 할 필요를 느꼈다.

올해 상반기호인 <태안문학> 18집 발간 작업이 시작됨에 따라 김은자 할머니는 얼마 전에 원고들을 가지고 또 한 번 우리 집을 방문했다. 아들 차로 서울 가는 길에 들렀다고 했고, 파킨슨병 치료를 위해 입원을 하게 된다고 했다.

시 5편에 수필 4편이었다. 역시 컴퓨터로 작업을 해서 프린트를 한 원고인데, 디스켓도 CD도 없었다. 그 프린트 원고를 읽어보니, 시들은 향상된 것을 확연히 느낄 수 있었다. 수필들은 글꼴이 많이 좋아지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노력하시는 흔적이 느껴졌다.

일단 아내의 손을 빌려 그 글들을 모두 내 컴퓨터에 담아놓는 일을 했다. 그리고 좀 고민을 한 끝에 맞춤법과 띄어쓰기, 문장 개행 쪽으로만 제한적으로 손을 본 다음 원고를 그대로 편집위원회에 넘겼다. 편집위원들 중에는 아쉬움을 가지는 이도 있겠지만, 그 글들은 모두 <태안문학> 18집 지면에 오를 것이다.

<태안문학>은 한계를 지닌(지닐 수밖에 없는) 향토문학지다. 매번 제대로 글꼴을 갖춘, 수준과 격조를 지닌 글들만 실리는 것도 아니다. 그야말로 '어울렁더울렁'이다. 글 속에 담긴 메시지만 확실하다면 글꼴이 썩 좋지는 않더라도, 그것 자체로 어울렁더울렁의 한 부분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소박함과 융통성도 함께 하는….

나는 건강도 좋지 않으신 노인에게 무리한 기대를 갖지 않는 것이 차라리 옳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분이 쓰신 글꼴 그대로 실어드리는 것이 오히려 그분께 발전의 계기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도 든다. 그분의 건강치 못한 몸과 연세를 생각해서, 글꼴에 너무 욕심내지 말고, 그분이 애써 지으신 글꼴 그대로, 한 편이라도 더 지면에 실어 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 옛날에는 부잣집으로 이름난 집이었다. 지금은 퇴락의 기미마저 엿보이지만 김은자 할머니의 칠십 평생의 갖가지 사연들이 어려 있는 집이다.  
ⓒ 지요하


덧붙이는 글

지난해 8월 어느 날 김은자 할머니 댁을 방문하여 오래 이야기를 나누었다. 할머니의 칠십 평생 안에는 소설 같은 이야기들이 많았다. 노인이 참으로 용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날을 잡아 노인의 칠십 평생을 대략적으로나마 기록해볼 생각이다.


  2007-05-17 11:13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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