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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그날, 오월의 기억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5-17 조회수693 추천수4 반대(0) 신고

 

 

<그날, 오월의 기억>



1980년 5월 17일

봄 같지 않게

유난히 무덥게 느껴지던 날.

나는 수많은 발길질로 뜨겁게 덥혀진

검은 아스팔트를

교실마루삼아 깔고 앉았었다.


서울역 앞 대우빌딩 건너편,

본데없이 지어져

사과궤짝에나 어울릴 거라며

구시렁거리던 입에서

네가 다 나왔으니

강의실이 텅 비었을 거라는 농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새 희망을 담아

열심히 오른팔을 하늘로 질러댔다.


제기동서 나와 동대문을 거쳐

퇴계로로 길을 잡았었다.

온 시내 대학교가 한 곳으로

총 출동한다는데,

웬일인지 아무도 막아서질 않는다.

차로가 학생으로 넘쳐나도

평소 같지 않게 푸른 군복이 사라졌다.



그날 진로를 열어준 것에

잠시나마 값싼 애국심으로

희망을 걸었던 것이

나는 두고두고 후회된다.


정말 순진한 놈이었다.


오후 늦게 서울역 집결지에서

자진 해산한 뒤 우리는 집으로 돌아 왔다.

오랜만에 뿌듯함을 느껴 보았다.

첫 입학 때부터 매년 되풀이 나서도

소득 없는 데모에 지치기도 했다.


길거리 먼지를 다 뒤집어 쓴 것,

칵칵대며 씻어내고 누었다.

혹시나 새 소식을 기대하며

TV로 본 장면은

아악! 모멸감 그 자체이었다.


남대문에서 대치하고 있던

계엄군 병력을 향하여

미친 듯이 달리는 버스 두 대.......

그날,

어째든 젊은 군인들이 아깝게 스러졌다.


나는 그 순간 토악질을 심하게 해댔다.

이게 아닌데, 이건 정말 아닌데.......


그날 자정을 기해

계엄사령부는 계엄을 손쉽게

제주도까지 전국에 선포하였다.

그 야릇한 의미가 의도된 덫이었음을

나는 그날 퇴계로에서 냄새 맡았었다.


그리고 실제로 감추어진 역사,

계엄군이 입법, 사법, 행정까지

한손에 쥐게 된 음모가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기억이나 될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다음날,

오 월 십 팔 일.

유난히 붉은 장미 만발한 날.

나는 씁쓸한 눈물지으며,

광주 소식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검은 먹줄 기사가 실린 신문보다

더 정확한 교내 유비통신을 들으며

가슴을 치며 울음을 터뜨렸다.

사랑하는 나의 조국이,

아직은 갈 길 멀었음을 깨달았을 때

낯부끄러운 깊은 한 숨만 토해 나왔다.


나의 마지막 시위는 그렇게

헛심을 쓰며 끝나버렸다.


다시는 도로에 나가지 않으리라

굳게 다짐하면서

대학 본과 졸업반 나의 20대는

때 이른 황혼을 맞아

강제로 막 내리고 있었다.


나의 냉소는 그날부터 그렇게

시름시름 깊어져가고 있었다.


어느 날인가 내 죄를 통회하며

고백할 날이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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