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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아버지와 함께 있음 / 정만영 신부님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5-21 조회수535 추천수6 반대(0) 신고

오늘 복음의 내용은 예수님께서 최후만찬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즉 그분의 최후의 말씀, 유언중에 한 토막인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는 평소와 다른 제자들의 모습이다.
성서에게 기록하고 있는 지금까지의 제자들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그러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다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라서 서로 물어보다가...“(마르코 9,10),
“우리가 자기를 찾아도 찾아내지 못한다느니 또는 자기가 있는 곳에는 올 수 없다느니
하는 말은 대관절 무슨 뜻일까?" 하고 수군거렸다.“ (요한7,36),
토마가
"주님, 저희는 주님이 어디로 가시는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겠습니까?" 하고 말하였다. (요한14,5),
“조금 있으면 나를 보지 못하게 되겠고 또 얼마 안 가서 다시 보게 되리라든지,
나는 아버지께로 간다든지 하는 말씀은 도대체 무슨 뜻일까?" (요한16,17)


오늘복음에서는 두 가지 앎의 종류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첫째 앎은 제자들이 알고 있는 것이다.  
        “스승님께서 모든 것을 아시고, 또 누가 스승님께 물을 필요도 없다는 것을 이제 알았다”(요한16,30a)고 한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나오셨다는 것"(요한16,30b)을 믿는다고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제자들의 변화는 실로 엄청난 고백이 아닐 수 없다.

둘째 앎은 예수님도 알고 있다고 하신다.
        예수님이 알고 있는 것은 위와 같은 고백은 하는 제자들이 ‘나를 혼자 버려두고 저마다 제 갈 곳으로 흩어질 때가 온다.’(요한16,31)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말씀이다. 제자들이 당신을 배반하고 도망칠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신다.

누구의 말이 참말일까? 우리 모두는 알고 있다.
하지만 제자들의 모습에서 나의 모습을 보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예수님은 나의 구세주로,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며 또 때론 벗으로 고백하며
한 신앙인으로
한 예수회원으로
한 사제로 그분을 안다고 말하면서
그분 곁에 더 가까이 머물고 싶다고 하면서도
지나고 보면 한참 멀어져 있는 나를 본다.
토마처럼 당신이 가는 길이 어딘지 모르겠다고 투덜대고 있는 나를 본다.
이러고도 내가 그분을 알고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이러고도 내가 당신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분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러고도 내가 당신을 나의 주님, 벗이라고 말할 자격이 있는가?
나의 삶이 행동이 내가 한 말이 거짓말이었음을 고발한다.



주님!
당신의 제자들이 당신을 배반하였을 때
당신의 제자들이 당신을 버리고 모두 도망치고 홀로 남겨졌을 때
그 배신의 아픔 속에서도 머무를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러나 나는 혼자가 아니다. 아버지께서 나와 함께 계시다.”(요한 16,32)

제자들과 제가 아는 앎과 당신이 알고 있는 앎과의 차이가 바로 이것입니까?
‘아버지와 함께 있음’을 아는 것
당신이 홀로 내동댕이쳐졌을 때,
당신이 홀로 배신의 아픔에 절규할 때
당신이 홀로 외로움에 몸부림칠 때
아버지께서 당신과 함께 계실 것이라는 그 사실을 알고 계셨군요.

아 그래서 당신은 오늘도 마지막까지
‘하느님과 함께 있음’을 알지 못하는
배신자들과 겁쟁이들과 비겁하고 패배한 자들에게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요한16,33a)하십니까?

‘하느님과 함께 있음’을 알고 있는 사람으로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16,33)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아버지와 함께 있음은 통해
용기를 내겠습니다.
당신이 이기신 세상을 저도 맞서보겠습니다.
당신도 저와 함께 계셔 주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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