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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부님! '성소를 위한 기도'를 바치겠습니다
작성자지요하 쪽지 캡슐 작성일2007-05-21 조회수792 추천수8 반대(0) 신고

               신부님! '성소를 위한 기도'를 바치겠습니다 
               천주교 사제의 '영명축일' 
  




▲ 신부님 영명축일 축하행사에서 신부님께 꽃다발을 드리는 화동들  
ⓒ 지요하

<1>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세례명'이라는 게 있다. 세례를 받을 때 성서에 등장하는 이름이나 성인(聖人)과 순교자의 이름 등 그리스도교적 의미를 지닌 이름을 세례명으로 받는다(대부분은 사람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삼지만, 더러는 대천사의 이름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때부터 그는 그 이름의 임자를 '수호성인/주보성인'으로 모시게 된다. 옛날에는 '주보(主保)'라는 말을 주로 사용했으나, 지금은 '수호(守護)'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세례를 받을 때 수호성인을 정하는 것은 영적인 유대 속에서 수호성인의 각별한 도움, 즉 전구(轉求)를 얻기 위해서다. 수호성인의 삶을 모범으로 삼고 그를 본받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하느님의 특별한 은총일 수 있다.

신앙심 깊은 신자들은 자신의 세례명과 수호성인의 존재를 늘 생각하면서 산다. 자신이 수호성인과 특별한 영적 유대감 속에서 신앙공동체의 확실한 일원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느끼는 것도 그 자체로서 은총이다.

천주교 신자들이 세례명을 받고 수호성인을 모시는 것은 '통공(通功)의 교리'로부터 연유한다. 하늘나라와 인간 세상의 공이 서로 통한다는 그 통공 교리로부터 여러 가지 구체적인 발현들이 교회의 역사 안에서 열매를 맺게 되는데, 세례와 더불어 수호성인과 영적인 유대를 맺는 것도 그것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세례를 받음과 동시에 세례명을 갖는 관습은 3세기 중엽부터 동방교회에서 먼저 시작되었고, 서방교회에서는 주로 중세 이후부터 일반화되었다고 한다. 한때는 신자들의 수호성인에 대한 공경(恭敬)이 지나쳐서 여러 가지 부정적인 모습이 나타났는데, 종교개혁 시대와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를 거치면서 일대 변화를 겪었고, 참되고 올바른 성인 공경을 권장하는 교회법 안에서 오늘의 형태가 유지, 보존되고 있다.


▲ 어머니는 올해도 '물적 예물'을 드리고...  
ⓒ 지요하

<2>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세례명과 함께 '영명축일'이라는 것도 있다. '본명축일'이라고도 부른다. 세례명을 영세명이라고 하고, 영세명을 줄여서 영명이라고도 하고, 또 본명이라고도 한다. 옛날에는 '본명'과 '본명축일'이라는 말이 주로 쓰였는데, 요즘에는 '세례명'과 '영명축일'이라는 말이 거의 일반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신자들 중에는 일반 신자들의 수호성인을 기념하는 축일은 '본명축일'로, 성직자와 수도자의 수호성인 축일은 '영명축일'로 구분하여 부르는 이들도 있다(나도 그런 사람 중의 하나인데, 여기에는 성직자와 수도자들에 대한 각별한 공경의 뜻이 담겨져 있다).

천주교에는 기념일, 즉 '축일(祝日)'이 매우 많다. 일년 365일이 모두 축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성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사건들을 기념하는 크고 작은 축일들이 있다. 성모 마리아를 비롯하여 성서에 등장하는 모든 '하느님의 사람들', 그리고 교회가 2천년을 이어오면서 배출한 수많은 성인들을 기념하는 축일들이 있다.

그러므로 신자 모두에게는 자신의 수호성인 축일, 즉 영명축일이 있기 마련이다. 교회가 그 성인을 기억하려는 입장에서는 세계교회의 축일이지만, 그 성인의 이름을 세례명으로 지닌 신자의 입장에서는 그 신자 개인의 영명축일이다.

천주교 신자에게 있어 영명축일의 의미는 매우 각별하다. 자신이 새롭게 태어나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음을 기념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영혼의 생일'인 까닭이다. 그래서 영명축일을 맞은 신자들은 스스로 자신이나 가정을 위한 미사를 지내기도 하고, 부모나 자녀들이, 또 형제나 친지들이 축복미사를 봉헌해 주기도 한다.

신자들이 세례를 받을 때는 성인 축일을 따져 수호성인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사람에 따라서는 특별히 감화를 받은 성인이라든가, 예쁘거나 부르기 좋은 이름을 택하기도 하지만, 대개는 성인 축일이 자신의 생일과 같거나 가까이에 있는 성인을 택한다. 그래서 생일과 영명축일이 한 날인 신자들도 많다.


▲ "성전에서 특히 남자는 모자를 벗어야 하지만, 미사 아닌 행사이므로 형제 자매들의 '시력 보호'를 위해 모자를 쓰고 하겠다"며 양해를 구한 뒤, 내가 '축사'를 읽었다.  
ⓒ 지요하

<3>

일반 신자들 중에도 육신의 생일보다 영혼의 생일인 영명축일을 더 중시하는 이들이 있다. 생일은 아예 무시해버리고 영명축일을 생일로 지내는 이들도 간혹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신자들은 자신의 생일을 무시하지 못한다. 가정이 있고 가족이 있으니, 가족의 생일을 챙기는 것은 가정생활의 미덕일 수도 있다.

그런데 성직자와 수도자들에게는 생일이라는 것이 없다. 육신을 버렸기 때문이다. 육신을 버렸으니 생일도 버린 셈이다. 간혹 고희를 맞은 노 사제에게 신자들이 축하식을 열어드리는 일이 있기는 하지만, 그런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천주교의 성직자와 수도자들은 생일 없는 사람들이다.

성직자들이 입는 '수단'이라는 옷과 수도자들의 수도복은 '육신의 죽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성직자들이 착용하는 '로만 칼라'는 '독신 정결'을 상징한다. 그야말로 육신을 버리고 세상을 버렸음을 뜻한다. 그러니 육신의 생일을 챙기고 지낼 이유가 없다.

나는 지금까지 12분의 주임 신부와 두 분의 보좌 신부를 모셨다. 그리고 도합 26분의 수도자들이 우리 성당을 거쳐 가셨다. 그런데 나는 어느 한 분의 생일도 알지를 못한다. 한 번도 생신 축하 인사를 드린 적이 없다. 그분들의 생일 쪽으로는 아예 관심조차 갖지 않았다.

그 대신 해마다 그분들의 영명축일에는 관심을 기울이고, 축복미사나 축하행사에 한 번도 빠지지 않았다. 특히 사제의 영명축일에는 축하를 드리는 일에 나름대로 신경을 많이 썼다.

사제의 영명축일은 신앙공동체 전체의 축일이나 마찬가지다. 육신 생일을 버리고 사시는 사제의 영명축일을 지내는 신자들의 자세는 아름답고도 숙연하다. 사제에 대한 감사와 존경, 사랑의 마음을 담아 '영적 예물'을 드리고, '물적 예물'을 드리기도 한다. 축하식에 참여하는 신자들의 마음속에는 사제를 힘껏 '보호'하려는(약간의 연민도 함께 하는) 마음이 자리해 있다.

영명축일 축하행사에서 사제가 신자들에게서 받는 물적 예물은 사제에게 일년에 단 한번 생기는 공적인 별도 수입이 된다. 가정이 없으므로 적을 수밖에 없는 생활비와 성무활동비, 그리고 미사예물 외로 생기는 영명축일 물적 예물은, 본당의 규모에 따라서는 꽤 큰 금액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 역시 사제의 온전한 수입이 아니다. 가정이 없으니 자신에게는 거의 필요 없는 돈이다. 그래서 사제들은 그 금액을 그대로 이런저런 뜻있는 일에, 하느님의 사업에 쓴다. 그러므로 내가 영명축일을 맞은 사제께 드리는 물적 예물은 곧바로 신앙공동체를 위하고 나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사제들 중에는 자신에게 생기는 금액을 그때그때 뜻있는 일에 전부 써버리는 이도 있고, 오래 알뜰히 모아서 회갑 때나 고희 때 신학교나 자선단체에 거액을 기부하는 이도 있다. 어떤 경우이거나 그들은 "가진 것을 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에 순종하여 늘 '청빈' 속에서 산다.


▲ 사목회장, 성모회장, 큰 수녀님과 함께 축하 케이크를 자르고...  
ⓒ 지요하

<4>

내가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대전교구 태안성당은 최근에 현 12대 구본국(베난시오) 주임 사제의 영명축일을 지냈다. 영명축일은 지난 18일이었고, 축하행사는 관례대로 직전 주일인 13일에 있었다.

올해의 축하행사에서도 두 남녀 어린이가 꽃다발을 드렸고, 신자 대표가 영적 예물을 드렸다. 그리고 약 60명 정도의 신자들이 물적 예물을 드렸다. 마지막으로 내가 '축사'를 드린 데 이어 사제께서 '답사'를 하셨다.

본당 사목회장 부부가 드린 영적 예물, 둥근 모양의 '패(牌)'에는 신자들이 일정 기간 사제를 위해 하느님께 바치기로 스스로 약속한 여러 가지 기도와 공로들의 항목과 회수가 새겨졌다. 평일미사, 성체조배, 성지순례, '십자가의 길' 기도, 묵주기도, 사제를 위한 기도, 복지시설 봉사 등을 몇 번 하겠다는 신자들의 기도 및 봉사 원의(願意)를 집계하여 새긴 패다.

그 영적 예물을 받은 구본국 신부님은 "사제에게 가장 값진 선물은 영적 예물인데, 이렇게 풍성한 영적 예물을 받게 돼서 참으로 기쁘고 고맙다"는 말을 한 다음 이런 얘기를 했다.

"그런데 한 가지 아쉬운 것은 영적 예물 항목들 중에 '성소(聖召)를 위한 기도'가 빠진 사실입니다. 신부가 성전을 짓고, 신자들을 많이 늘리고, 자선사업을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일은 사제를 만들어 내는 일입니다. 청소년들이 사제가 될 뜻을 갖는다는 것은 곧 본당 신부의 모범적인 삶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청소년들에게 사제가 될 뜻을 갖게 하고, 또 그들을 신학교에 보내는 것이야말로 사제에게는 가장 보람 있는 일이지요. 그것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신자 모두의 성소에 대한 관심과 기도가 필요한데, 오늘 제가 받은 영명축일 영적 예물 안에는 '성서를 위한 기도'가 없어서 많이 아쉽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순간 나는 몸이 굳는 것 같았다. 참으로 죄스러운 심정이었다. 내 아들이 사제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을 늘 지니고 살면서도, 매일같이 '성소를 위한 기도'를 바치지 않고 살아온 '자각'이 아프게 가슴을 치는 것이었다. 내일부터는 매일같이 '아침기도' 중에 '성소를 위한 기도'를 꼭 바치기로 굳게 마음먹으며, 한편으로는 신부님께 감사했다.

어제 20일(부활 제7주일/주님 승천 대축일)치 우리 태안천주교회 주보에는 내가 지은 시 한 편이 실렸다. 신부님 영명축일 축하행사 때 읽을 축사를 쓰고 나서 지난 13일 새벽 2시에 일어나 밤을 새우며 별도로 지은 축하 헌시다. 그 헌시를 여기에 소개한다.


성령의 날개


신부님이 입으시는 수단이
육신의 죽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신부님이 착용하시는 로만 칼라가
독신의 정결을 상징한다는 것을
예전에 알았지만

그것이 '성령의 날개'라는 것을
이즘에야 알았습니다

신부님의 수단과 로만 칼라에서
성령의 날개
대지의 공기를 가르며 보듬는
힘차면서도 결 고운 날갯짓을 봅니다

하느님을 향한 열정의 샘
예수님을 닮은 절절한 심성이
성령의 날개로부터 유지되는 것임을 압니다

호방한 성품도
분별의 지혜도
어린이였다가 노인이 되는
부지런한 변신의 능력도
성령의 날개로 분출하는 것임을 압니다

수많은 깃털로 이루어진
성령의 날개
그 날개 속 깃털들 사이에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수정 같은 눈물도 있음을 압니다

눈물 방울이 때로는
냇물이 되고 파도치는 바다가 될지라도
늘 성령의 날개, 깃털 안에 있으므로
늘 어머니의 옷깃이 스치는 곳이므로

오늘도 또 내일도
성령의 날개
힘차면서도 결 고운 날갯짓은
변함 없이, 더욱 가멸게
목자의 지팡이가 되어줄 것입니다

저 영원한 하느님의 품속을 향해 가는
목자의 지팡이, 성령의 날개는
우리 모두의 감사와 존경
사랑의 표상이므로…!  


  2007-05-21 15:39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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