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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시체가 되어야 그분 생명으로 충만 <굿뉴스 기획특집>
작성자장이수 쪽지 캡슐 작성일2007-05-23 조회수418 추천수3 반대(0) 신고

온몸으로 하는 토착화는 당연히 몸에 대한 통찰을 요청한다. 20세기 후반부터 빠르게 발전해 온 창조, 생태 영성은 몸에 대한 그리스도교의 깊은 이해를 품고 있는 이 시대의 영성 언어이다.

오늘 우리는 영과 몸을 함께 돌보신 예수님의 사목 비전을 우리의 혼-몸-살과 통합하기를 갈망한다. 이를 위해서는 하느님이 창조하신 온생명을 돌보고 그분의 창조 질서를 보존하며 온생명과의 연대를 경축할 영의 성숙이 요청된다.

그런 가운데 자연(地)과 자신과 가족과 이웃(人)과 하느님(天)과 함께 사랑과 믿음과 희망의 전례를 거행하면서, 하느님의 '계속되는 창조'에 참여하는 투신이 필요하다.

이때 무엇보다 요청되는 것이 몸이 영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몸이야말로 영의 비전을 구현할 매개라는 것을 철저하게 자각하는 것이다. 그리스도 신앙 전통에는 몸의 상태에서 하느님의 영의 일을 포착하여 이를 영성살이의 원리로 승화시킨 많은 예가 있다.

예수께서 이미 당신의 죽음을 통하여 온 몸과 영으로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지켜갔는지 보여주셨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그 순간이야말로 그분이 올리브산에서 기도하시며 아버지께 하셨던 순명의 기도(루카 22, 42)가 궁극적으로 이루어진 때였다.

말하자면 예수의 영과 몸이 동시에 예수의 순명을 완성하는 과정에 들어서서 그 역할을 다하였고, 이 시체됨의 상태야말로 그분에 의하여 '구원의 영광에 이르는 문'으로 드러났던 것이다.

프란치스코 성인은 예수의 제자로서 영성적으로 시체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그는 시체에서 영적 겸손을 읽어 내어 이렇게 진술한 적이 있다.

"시체를 들고 당신이 좋아하는 어느 곳에 갖다놓아 보시오. 그럴 때 그 시체는 … 어디에 놓여지는가에 대해서도 불평하지 않고, 밖으로 내던져졌을 때도 항의하지 않소. 그것을 왕좌에 놓으면 그것은 위로 쳐다보지 않고 아래로 내려다볼 것이오. 이와 같은 사람이 진실로 겸손한 사람이오. 그는 그가 어디에 놓여있든지 꺼리지 않고, 다른 곳으로 보내지도록 애쓰지도 않소. … 만일 그가 성직으로 직책이 높아지면 그는 자신의 겸손을 지니며, 그가 존경을 받으면 받을수록 더욱 그는 자신을 가치 없는 존재로 생각할 것이오."  (보나벤투라의 '프란치스코 대전기' 6장 4절)

'시체'에 대한 영성적 성찰은 이미 프란치스코 성인 이전부터 그리스도교 역사 속에서 대물림되어 왔다. 우리는 그 한 증거를 사막교부가 남긴 '시체' 비전을 통하여 본 적이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시체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갈라티아서 2장 19~20절의 진술 그대로다.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나 혹은 우리가 아니라, 그분이 사시게 하는 것. 이것이 나나 우리 교회가 그분의 사람으로 시체처럼 산다는 것을 뜻한다. 그분이 들어가 사시는 '시체'야말로 그분의 영으로, 그분의 생명으로 더할 수 없이 충만하게 될 것이다.

참그리스도인 부모는 시체처럼 산다, 가족과 자녀를 위해서. 참된 사목구 주임 사제는 예수님을 주임 신부로 모시고 평생 보좌처럼 시체가 되어 복되게 산다, 신앙 공동체를 위해서.

우리 교회의 주교와 사제와 수도자들은 산송장처럼 산다. 이 시대, 예수 그리스도의 보물들, 그분의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생명의 나라를 가슴에 품고.

신앙 실천과 사목에서만이 아니다. 신학과 영성의 토착화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시체' 되기, 바로 여기에 온몸으로 하는 토착화 신학의 정도(正道)가 있다.

내가 위에 있어야 한다고 하는 한, 그런 그리스도교 신학은 언제나 신학과 영성의 낮은 단계, 미완의 토착화 단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자기의 신학과 영성을 시체처럼 땅과 땅의 백성과 섞을 줄 모르는 한, 그런 교회는 자기가 몸붙여 사는 땅과 그 땅의 백성에게서 소외되는 아픔을 겪을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 교회의 문화적 죽음과 고난 없이 그리스도 신학과 영성의 토착화란 싹조차 제대로 트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황종렬(미래사목연구소 복음화연구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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