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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5월 27일 야곱의 우물-요한 20, 19-23 렉시오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7-05-27 조회수754 추천수7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요한 20,19-­23)

우리는 일반적으로 성령께 기도할 때 '오소서' 혹은 '임하소서'란 표현을 씁니다. 어떻게 들으면 우리 안에는 하느님의 영이 전혀 내재하지 않은 것처럼 들립니다. 성령 세미나에 참석했던 어떤 분은 다른 사람들은 모두 신령한 언어를 말하는데 자신은 되지 않았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자기는 사랑하지 않는 것 같아 실망하여 화를 내며 도중에 집으로 와버렸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에 대해 우리가 기대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성령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에 대해 자문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과 성령강림이 시간적으로 구별되지 않습니다. 부활 후 40일 동안 나타나신 예수님에 대한 표현은, 40이 의미하는 '완벽·충만함'에 비추어 볼 때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완벽한 교육을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50일, 오순절은 원래 유다인들이 이집트를 탈출한 후 시나이 산에서 십계명을 받은 종교적 의미와 함께 곡식의 수확을 감사하며 드리는 축제였습니다.

 

오순절에 성령이 강림하셨다는 것은 지금까지 기념해 오던 축제의 의미를 이제 다른 차원에서 바라보게 합니다. 곧 십자가의 죽음으로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묻힌 씨가 백배의 열매를 맺고, 하느님께서 돌판에 새겨 모세에게 주신 옛 계명이 이제 예수께서 제자들의 마음에 새겨주신 사랑의 새 계명 안에 살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성령강림의 표상도 여러 가지입니다. 사도행전에서는(2,1-­13)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와 '불꽃 모양의 혀들'로 나타납니다. 모세가 십계명을 받을 때 '우렛소리와 불길'(탈출 19,16-­19; 20,18)에 싸인 산에 하느님이 내려오신 것을 연상케 합니다. 베드로가 이날 많은 청중 앞에서 연설을 하고, 오천 명이나 되는 사람이 세례를 받았던 것은 바로 성령의 힘에 의한 복음선포가 불처럼 타오른다는 것을 얘기합니다.

 

예수님은 세상에 불을 지르려고 왔다고 하셨습니다(루카 12,`49). 그 불이 이미 타올랐다면 얼마나 좋겠느냐고 한탄하셨는데, 이제 그 불이 타오를 때가 온 것입니다. 이 불은 우리 안에서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내지 못하겠습니다."(예레 20,9)라고 하도록 합니다.

 

요한복음에서 성령은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불어넣어 주시는 '숨'입니다(요한 20,22). 한처음 하느님께서 온 세상을 창조하시고, 사람을 지어내시며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비로소 사람이 생명체가 된 것(창세 2,7)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의 영은 온 우주를 새롭게 탄생시키는 숨결입니다.

 

예언자 에제키엘이 이스라엘 부활의 환시를 보는데, 마른 뼈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니 뼈와 뼈가 서로 붙고 힘줄이 생기며 살갗이 덮여 살아 일어납니다. 그렇게 이스라엘을 무덤에서 끌어올리면 그제야 그들이 주님을 알게 될 것이라고 하신 것(에제 37장)처럼 이 숨결에 힘입지 않고서는 아무도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 가지 신령한 언어를 말하지 못해도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것, '예수님은 주님이시다.'라고 할 수 있는 것은(1코린 12,3) 성령의 은혜입니다. 병을 고치고 기적을 행하지 못하고 예언을 하지 못하지만 순수하게 믿는 것도 성령의 은혜요, 하느님께 희망을 두는 것도 성령의 은혜입니다. 모두가 예언자일 수도 없고, 모두가 사도일 수도 없고, 모두가 가르치는 사람일 수도 없고, 모두가 병 고치는 능력을 가질 수도 없고, 모두가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을 가질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각자에게 따로따로 나누어 주시기에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그것을 공동의 유익을 위해 써야 하는 것이지 자신의 성덕으로 얻은 것인 양 교만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입니다(1코린 12,27-­31 참조). 그러기에 가장 뛰어난 길은 그 모든 것보다도 '사랑'이라는 것입니다(1코린 12,31-­13,13 참조). 제대로 '사랑'할 줄 아는 것이 어찌 성령의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성령의 은혜는 특별한 것일 수도 있지만 지극히 평범한 것이기도 합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는 것, 하느님께 기도할 수 있는 것, 밥을 먹을 수 있는 것, 일할 수 있는 것, 이웃과 친교를 나눌 수 있는 것, 때로 불화가 있을 때 용서받고 용서하여 평화롭게 사는 일이 성령의 은혜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특별한 은사가 주어지지 않았다고 하느님께 사랑받지 못하는 것으로 간주하여 섭섭해하기보다 평범한 일상을 충실히 잘 가꾸며 살 수 있는 능력을 간구함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그래서 모든 일에 감사하는(1테살 5,18) 능력 또한 성령의 은혜입니다.

 

하느님의 영은 내가 그분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주님으로 모시기로 작정하여 세례를 받은 그때부터 이미 내 안에 계셨습니다. 다만 나의 이기적인 동기가, 내면의 어두운 그림자가, 약점들이 성령의 활동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나는 점점 작아지고 그분은 내 안에서 점점 커지게 하여 성령께서 내 안에서 마음껏 활동하실 수 있도록 나를 열어드리면서 '오소서, 성령이여!' 하며 그분을 초대하는 것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성령이 내려오시자 사도들은 다른 언어로 말을 하고 모인 군중들은 저마다 자기네 지방 말로 알아듣습니다. 이제 인간 언어의 차이는 물론 민족과 계층을 넘어 모든 민족을 향해 복음이 전파된다는 것입니다. 세계 공통어가 영어라고 생각하는지 요즘은 모두들 영어를 배우려고 난리입니다. 또한 세계의 공통 목표는 경제성장인 듯 많은 나라가 경제성장에만 주력합니다. 한 가지 언어와 치부의 바벨탑을 쌓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계 각국의 그리고 각 부족의 문화와 역사가 밴 다양한 언어를 존중해야 할 것입니다. 경제성장 말고도 쌓아야 할 탑이 많음을, 좀더 인간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어떤 것인지에 눈 돌려서 올바른 탑을 쌓아야 할 것입니다. 세계 공통언어가 순수한 사랑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령은 다양함 안에 드러납니다. 그가 나와 다르기 때문에 불화의 씨가 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다름이 우리를 풍요롭게 한다는 것을 아는 것도 성령의 은혜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종교의 울타리를 넘어서 만민에게 작용하시는 성령의 능력을 인정하는 것도 은혜입니다.
그래서 성령을 우리의 좁은 견해 안에 가두지 말고 바람이 불고 싶은 대로 부는 것(요한 3,8)처럼 성령의 활동에 우리가 따라갈 수 있는 유연함을 간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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