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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미사의 소프트웨어 I[제 67-1회]/ 정훈 베르나르도 신부님.
작성자양춘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7-05-30 조회수600 추천수9 반대(0) 신고

 

미사의 소프트웨어 I[제 67-1회]/ 정훈 베르나르도 신부님.


67-1회:  공동체의 성변화 기준(1).  -

 그 다음으로“온 세상에 널리 퍼져있는 교회를 생각하시어,”하고 기도하는 부분에서 우리가 우선 지녀야 하는 소프트웨어는 공동체 성변화의 기준인 가톨릭교회와 관련된 내용입니다.

여기서 기본적으로 깔려 있어야하는 것은 가톨릭교회에 대한 확신입니다.

내가 가톨릭교회에서 세례를 받고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만,

“내 신앙에 대하여 얼마나 확신을 가지고 있느냐?”하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정말 다른 종교나 교파보다 가톨릭교회가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당에 나오는지, 아니면 태중교우로 어릴 때부터 안 나오면 왠지 개운치 않아서 습관적으로 나오는지, 남편이나 아내, 집안 어른을 따라서 가정의 평화를 위해 가톨릭교회를 고른 것인지. 아니면 ‘친구 따라 강남’오듯이 별 생각없이 취미 삼아 다니는지, 아니면 딴 데 가서 놀 수 없어서 교회라도 기웃거리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야 합니다.


또 현대인이 문화생활이나 교양 필수 정도로 종교를 일종의 정신적인 레저 생활로 선택한 것인지, 아니면 천당 가는데 개신교보다 금전적으로 싸게 먹혀서 성당에 나오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야 합니다.

이런 점검은 평상시 우리가 전투적인개신교 신자들, 예를 들어 여호와의 증인이 가톨릭교회를 매도할 때, 내가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떠올려 보시면 대충 대답이 나올 것입니다.


우리가 가톨릭 신자라는 것은 꼭 신자들끼리 형제자매라 부르는 것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영적으로 한 가문이고 한 집안 식구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우리의 육적인 집안을 욕하거나, 있지도 않은 일을 가지고 사랑하는 우리가족을 내 앞에서 음해하거나 능멸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눈만 멀뚱거리면서 나와 상관없다는 식으로 넘어 가겠습니까?

화가 나고 모욕감을 느끼면서 입씨름을 하거나, 심한 경우에는 이기던 지던 간에 심하게 싸우는 것이 정상적인 사람의 감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명색이 가톨릭 신자라라고 하면서도 이런 경우를 당하게 되면 어떻게 처신 합니까?

그냥 주눅이 들거나 답변을 피해버리는 정도입니다.

개신교의 한심한 부류나 여호와의 증인들이 단골 메뉴로 삼는 것은 바로 교황님에 대한 문제입니다.


그 사람들은 교황님을 사탄의 대표자, 또는 하수인이라고 합니다.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누가 내 아버지를 그런 식으로 욕을 한다면 가만 놔두겠습니까?

어떻게 하든지 그런 말을 내 앞에서 안 나오게 만들려고 할 것입니다.

그런데 가톨릭교회의 교리에 대하여 별로 아는 것이 없어서, 또 그 비아냥거림이 나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기분은 안 좋지만 그냥 넘어가곤 합니다.


우리 집안을 말도 안 되는 소리로 헐뜯는데, 그런대로 참을만하고 기분이 멀쩡한 것은 그 가문의 혈통인지 의심할만한 문제입니다.

한 방울이라도 피가 섞였다면 그럼 비겁하고 무책임한 행동은 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오히려 이상한 종교를 믿는 사람들은 지ㅣ나칠 정도로 자신감이 넘쳐나고, 가톨릭 신자들은 제대로 된 것을 알면서도 제대로 믿지 않아 여러 문제가 생기는 현실은 참으로 아이러니입니다.


물론 가톨릭교회가 완전한 것은 아닙니다.

여러 한계가 있고 과거에도 현재에도 잘못한 일이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이고 인간적인 오점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가톨릭신자인 이유는 다른 종교나 교파가 옛말 구식 컴퓨터라면, 가톨릭교회는 최신 기종 정도는 된다는 판단 이 있어야 가능합니다.

이런 신앙적인 확신도 없이, 이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기준으로 가톨릭교회를 삼을 수는 없습니다.


이렇게 우리가 지금 점검한 내용대로“내가 가톨릭교회에 대한 신앙적 확신이 있느냐, 정말로 가톨릭교회가 가장 올바른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있느냐?”하는 문제에 따라 “온 세상에 널리 퍼져 있는”교회가 무엇인지 판가름 납니다.

물론 이‘교회’는 가톨릭교회에 갇힌 의미는 아닙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는 온 세상에 퍼져있는 공동체가 거룩하게 변화하는 기준을 수렴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교회’부분의 소프트웨어는 그냥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건물이나 장소, 사람들ㅇ,; 모임정도를 생각하며 지나치거나,‘온 세상에 선교’해야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미사에 제법 참례하시는 분들도 이것을 헛갈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서‘교회’는 지금까지 우리가 묵상한 흐름에서 발견할 수 있듯이, 거룩하게 변화하려고 모인 사람들입니다.

하느님 뜻대로 살려고,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에 앞당기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의 연대이며 결합니다.

모든 것이 무질서하게 변화하고 제 멋대로 존재하는 이 상대적인 세상 안에서 공동체의 양심으로, 세상을 거룩하게 변화시키는 판단 기준으로 가톨릭교회를 떠올릴 수 있어야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톨릭교회라는 기치 하에 모인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교회’라는 기도문 안에 예수님으로 세상에 살려는 사람으로서 자기 자신을 담을 수 있어야합니다.

내가 바로 가톨릭교회가 될 때, 이 부분이 비로소 제 의미를 띤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을 거룩하게 만드는 가톨릭교회에 대하여 얼마나 굳건하게 믿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사람이 창조된 후 사회를 이루며 살아온 과정에서 사회 구조가 변화하는 추이를 보면, 한 사람이나 소수 집권층을 위하여 다른 모든 사람이 희생과 봉사를 하는 구조가 꽤 오래 지속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우리는 개인보다는 전체를 중시하는 생각에 빠져 살면서 세계적인 전쟁까지 겪었고, 그런 시행착오를 거쳐서 요즘 세상은 소위 민주적으로 변화하고 있고, 개인의 인격을 중시하는 경향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아직 민족이나 국가를 우선으로 하는 성향이 병존하는 모습도 섞여 있지만, 대체적인 흐름은 그렇습니다.

이런 역사적인 흐름에서 볼 때, 우리 인류가 사람을 존중하는 방향으로 많이 변화했지만, 하느님 나라까지 지향하는 거룩한 구조에 도달하려면 아직 먼 길을 가야합니다.


현대 선진 사회를 상징하는 민주주의와 그 의사결정방법인 다수결도 하느님 나라로 나아가는데 치명적인 단점이 있습니다.

여러 민주적 조직에서 서로 이권이 얽힌 문제를 결정하는 과정을 보면 다수의 죄인이 소수의 의인에게 횡포를 부리는 일이 다반사이고, 지향해야 할 공동선을 위배하여 교묘하게 자기에게 유리한 이데올로기나 죄악의 구조를 탄탄하게 만들기 일쑤입니다.

따라서 민주주의의 본래 목적인 공동선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별로 없습니다.

또한 공동선을 제시하지 못하는 현대의 실증주의적 법치 구조도 마찬가지입니다.

인간 사회에서 법이란 것은 사회적 윤리의 상대적인 최하한선입니다.

양심의 절대적인 최선책이 아닙니다.


그리고 여러 복잡한 법률의 운용 단계까지 가면, 우리가 지향하는 하느님의 진리나 정의, 사살을 기대하는 것이 애당초 무리입니다.

아돌프 히틀러가 유대인을 학살하는 과정에서 여러 입법을 통해 그 만행을 합법적으로 만들어 갔다는 것을 좋은 본보기로 들 수 있습니다.

이렇게 실정법으로 자연법을 파괴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런데 사회적 변화의 영향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 교회의 여러 중요 문제를 결정하는 일에 불만을 갖는 분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교황과 주교, 그리고 본당에서는 주임 사제로 이어지는 의사결정구조가 너무 한 사람에게만 권력이 집중되어 있고, 시대착오적인 비민주적 방식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하루빨리 민주적 구조를 받아들이는 것이 가톨릭교회를 개혁하는 일이라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합니다.


물론 겉에서만 볼 때 가톨릭교회의 체제가 세속 사회만도 못한, 융통성 없는 피라미드 구조를 지니고 있다고 비난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런 주장을 접했을 때,“가톨릭신자인 우리가 무엇이라고 답변하고 있느냐?”하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도 그냥 세속적인 의미에서“제일 높으신 분이 결정하니까, 별로 아는 것도 없고 힘도 없는 나는 그저 따르는 것이지, 뭐!”

하는 정도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런 모습은 가톨릭교회가 어떤 기분과 원칙으로 이런 틀을 유지하고 있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가톨릭교회는‘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는 거룩한 목표에 걸맞은 거룩한 결정을 존중할 뿐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어야합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교황(...)와 주교(...)와 모든 성직자들”이라고 하는 부분을 정리하면서 몇 명 안 되는 이들이 거대한 가톨릭교회 체제 안에서 하는 역할에 대하여 살펴보아야 합니다.............♣†


            [67-2회:  공동체의 성변화 기준(2)으로 이어 집니다.] 

     

          

  천주교 서울 대교구 중림동[약현]성당 주임 정훈 베르나르도 신부.


                                 

  

요한스트라우스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Johann Strauss II 1825~18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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