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미사의 소프트웨어 I[제 68회]/ 정훈 베르나르도 신부님.
작성자양춘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7-05-31 조회수546 추천수10 반대(0) 신고

                             聖心[Sacred Heart] 

                                                         

미사의 소프트웨어 I[제 68회]/ 정훈 베르나르도 신부님.


역사의 성변화[聖變化].  -

 개인적인 거룩함도 중요하고, 지금 그 공동체가 하느님의 뜻에 부합하는 조직을 가지고 원활하게 복음 사업을 펼치고 있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는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 사랑을 담보할 수는 없습니다.


구세사의 영역은 개인이나 공동체의 차원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수평적인 성변화와 함께, 교회의 역사를 통하여 드러나는 인간 역사의 수직적인 성변화도 중요합니다.

“이 세상에서 불러 가신 교우(...)를 생각하소서. 그는 세례를 통하여 성자의 죽음에 동참하였으니. 그 부활도 함께 누리게 하소서.”

하는 부분과“부활의 희망 속에 고이 잠든 교우들과 세상을 떠난 다른 이들도 모두 생각하시어, 그들이 주님의 빛난 얼굴을 뵈옵게 하소서.”하고 기도 하는 부분에서 우리가 보통 갖고 있는 소프트웨어는 죽은 사람을 기억하는 정도입니다.


그것도 나와 밀접한 관계에 있던 사람들만 생각하는 것이 대부분입니다.

이것은 시공을 뛰어넘는 신앙의 연대를 깨닫지 못해 한 치 앞도 못 내다보는 단절을 의미합니다.

이런 수준에 계속 머물게 되면, 나쁜 소프트웨어를 갖기 쉽습니다.

본보기를 든다면, 시어머니 기일에 연미사 지향을 넣고 이 기도문을 들을 때,“정말 천당에 가셔서 부활을 누리실까?”하고 의심하면서 지옥의 불길 속에서 처참한 모습의 시어머니가 눈앞에 어른거리는데, 이상하게도 가슴이 아프지 않고 자기도 모르게 옅은 미소를 짓는 경우입니다.


이렇게 미사의 이 부분에서 소극적으로 다른 사람의 죽음과 구원에만 집착하는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면, 이 기도가 지니는 진정한 의미를 왜소하게 만들고 퇴색시킵니다.

이 미사 부분에는 더 역동적이고 강력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이곳은 역사를 거룩하게 만들어서 구세사가 완성되는 장면을 앞당겨 묵상하는 소프트웨어가 필요한 대목입니다.

이 부분이 내 안에서 작동해야 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능은“우리가 세례를 받은 사람답게 사느냐?” 그리고“세례를 받았다고 다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한 것인가?”,아니면“세례를 받았지만 예수님을 죽이는데 앞장서진 않았나?”하는 질문에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에게 던지는 일입니다.


결혼을 하여 부부가 된다는 것이 혼인신고로 완성되지 않고, 죽을 때까지 싸우고 미워하면서도 끊임없이 노력하는 과정에 있는 것처럼, 세례를 받았다는 것도 하느님 자녀로 살기 시작하는 출발을 의미합니다.

세례만으로 그리스도의 죽음에 온전히 동참할 수 없습니다.

영세를 받자마자 곧바로 자기 십자가를 팽개치고 도망을 가는 사람도 많고, 미지근하게 살면서 껍데기만 가톨릭신자인 사람은 더 많습니다.


따라서 이 부분 소프트웨어는 우리가 세례받은 자로서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해야 하는 의무가 내 삶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깨닫는 일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불러 가신 교우’와 내가 구세사를 통해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죽음의 힘도 감히 누르지‘(마태 16, 8) 못하는 교회의 신앙 연대를 이 부분 기도에서 확인해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께서 겪으신 죽음의 세례를 통하여 그 부활도 함께 누리게 된다는 것을 하느님 구원계획 안에서 묵상할 수 있습니다.


이 부분에서 부활이란 말이 공허하게 들린다면, 아직 내가 무활을 누릴 자격이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평소 삶에서‘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는 삶’을 살지 않기 때문에 껄끄럽게 들리는 것입니다.

그리고,‘부활의 희망’을 기도할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에 동참’하는 장면만 떠올라서는 안 됩니다.

‘고이 잠든 교우들’은 단순히 나와 관련된 몇 몇 사람이 아니라, 시공을 초월해서 구세주 예수를 고대하던 사람들로부터 우리 미래의 신앙 후손까지, 역사를 거룩하게 하는 일에 자기 삶을 바친 사람들까지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람들이 올바른 의미에서‘부황ㄹ의 희망’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이런 확장을 통해서만‘세상을 떠난 다른 이들’까지 함께할 수 있는 여유가 생깁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부분에서 세속을 추구하며 끝까지 자기만을 위해 살다가 불안 속에 인생을 끝낸 사람만 생각하며, 하느님의 자비로운 처분이나 바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하느님께서 생각하시는 사람은 시공을 초월하여 모든 믿는 이. 역사를 거룩하게 하고 구세사의 완성을 위해 이바지한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들을 통하여 세상을 떠난 모든 이가 하나 되는 모습을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가톨릭 공동체가 시공을 넘어 합종연횡[合縱連橫]으로 인류를 하느님 나라로 이끌어 가는 모습입니다.

이런 의미를 갖고“저희에게도 자비를 베푸시어,”하며 기도할 때,‘저희는’그저 불쌍하고 부족하여 어쩔 줄을 모르는 죄 많은 우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를 거룩하게 하겠다는 의욕으로 충만하여 세상 죄악과 싸우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가톨릭 신안 공동체의 구성원인 나 자신을 뜻해야 합니다.


그리고 이 순간 내가 서 있는 곳은, 하느님 나라를 향하여 거룩한 모든 사람이 대오를 이루어 죄악과 맞서는 전쟁의 한 복판이 됩니다.

이 때 영화의 필름처럼 내 안에서 연출되어야 하는 것은“영원으로부터 주님의 사랑을 받는 하느님의 어머니 복되신 동정 마리아와 복된 사도들과 모든 성인과 함께”예수님의 삶에 바로 내가 동참하는 장면입니다.

구세사의 감동스러운 장관이 펼쳐지는 순간입니다.

많은 이가 감탄하는 어떤‘블록버스터’(Blockbuster)도 비교할 수 없는 장쾌한 모습입니다.

이 부분은 내 안에서 마치 파노라마처럼 연결되어야 합니다.


‘스팩터클’,‘환타지’란 수식어가 붙는 드라마나 영화의 한 장면 같을수록 괜찮은 소프트웨어입니다.

그 대열에서 빠져 나와서는 이 기도를 바칠 수는 없습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만들어 놓은‘금상[錦上]’에 내가 ‘첨화[添花]’가 되겠다는 결의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미사 참례를 하면서 손에 땀을 쥐게 하는 이 순간을 눈을 뜨고도 보지 못하는 장애인이나 귀가 안 들리는 장애인처럼 무덤덤하게 만들면 설상가상이 됩니다.


‘영원한 삶을 누리’는 것도 구세사를 위하여 거룩하게 산다면 현세에서 이미 영생이 시작되고,“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예수님의 죽음에 동참하겠다는 의지 표명이어야 합니다.

이런 의미에서“아버지를 찬양”해야 합니다.

여기서 찬양은 입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로 사는 내 삶으로 하는 것입니다.............♣†


                   [69회:  마침 영광송 으로 이어 집니다.] 

     

          

  천주교 서울 대교구 중림동[약현]성당 주임 정훈 베르나르도 신부.


                                          

             

                                            

                                                  [열절하신 주의 사랑: 가톨릭성가 200 번]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