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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믿음과 기도 그리고 저주의 유혹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6-01 조회수884 추천수4 반대(0) 신고

 

 

<믿음과 기도 그리고 저주의 유혹>


마침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멀리서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무엇이 달렸을까 하여 가까이 가 보셨지만,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

“스승님, 보십시오. 스승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렸습니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그곳에서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셨다.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도 둘러엎으셨다. 또한 아무도 성전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지 못하게 하셨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마르 11,11-25)



  이 대목은 마르코 복음저자가 나름대로 편집한 흔적이 두드려져 나타납니다. 저자는 중요하게 생각하여 강조하고 싶은 대목인 “성전정화 이야기”를 열매 맺지 못하여 저주받은 무화과나무 이야기 사이에 편집하였습니다. 이는 마르코 저자의 독특한 편집방법입니다. 이 편집방법을 샌드위치 기법이라고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그 안에 별도의 숨은 이유가 있는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전체를 한 단위로 봉투처럼 포장하여 읽게 만든 의도가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먼저 저주 받은 무화과나무 이야기가 잎만 무성하지 열매 맺지 못하는 유대인들을 저주하는 상징적 일로 해석하고 싶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강조하는 내용으로 방향을 돌리셨다는 사실은 우리가 집고 넘어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느님께 이루어 주실 것이라는 확고한 믿음으로 드리는 기도가 자연현상마저도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예로 삼으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신 그 이유를 지나치게 파고들어 여러 가지 해석의 가능성을 열거하는 것보다 단순하게 믿음의 위력을 강조하는 것으로 알아듣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자들이나 우리들은 교회에 대항하여 엇나가는 행동을 볼 때 자주 분노하여 그들을 저주하고 싶어집니다. 우리의 순수성을 지키고 보전하기 위해 도전해 오는 세력이나 사람들에게 응당 나타내야할 수준을 넘어서 쉽게 저주를 퍼붓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경우라도 쉽게 저주내리지 못하게 분명히 막으셨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루카 9.53-55)


  중세 교회 때 무차별적으로 일어났던 마녀 사냥이 교회를 지키기 위해 저주를 퍼부은 그 예라 하겠습니다. 그 결과 중세 교회는 어둠이 짙게 드리워졌다는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하겠습니다.


  성전정화 장면도 어찌 보면 저주처럼 해석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 저자는 믿음에 관한 단절어 세 가지를 바로 뒤에 배치함으로서 그렇게 잘못 해석될 여지를 분명하게 방지 하였습니다.


  성전은 하느님의 현존을 인간이 느끼고 만날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그 성전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편의함을 우선하여 생각하다 보니 점차로 그 본래 의미가 퇴색해져 버렸습니다. 멀리서 기도하러 오는 사람들을 위해 봉헌물을 파는 상점들이 생겼는데 나중에 그 순수한 목적 외에 이윤을 남겨 제 배속을 챙기는 장사꾼으로 전락하였습니다. 그리고 거룩해야할 사제들은 그 장사치들을 이용하여 개인 치부 수단으로 이용하였습니다. 성전을 장사소굴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또 성전은 기도하는 곳인데도 그 성전이 너무 크다보니 빙 둘러 가는 것보다 마당을 가로 질러 가는 것이 시간도 절약되고 힘도 적게 드니 드나드는 통로가 되고 말았습니다. 모두들 하느님께 봉헌하는 기도를 위한 장소가 아니라 인간의 필요에 의해 함부로 값싸게 전락할 수 있는 수단으로 여겼습니다.


   성전 정화 사건은 성전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바로 잡는 사건입니다. 단순히 ‘하느님의 거처’에서 ‘기도의 집’으로 성전에 대한 개념 변화가 이루어집니다. 또 예수님은 성전의 의미를 확대하여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으로 만들고자 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계시는 진정한 곳은 우리가 만들어 드릴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성전이라는 좁은 곳에만 머무시는 분이 아님을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 당시 성전은 거룩한 장소로 여겨져 지성소를 중심으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출입 가능한 구역이 철저히 분리되어 있었습니다. 성전 뜰은 실상 유대인들에게는 성전에 속하지도 않았습니다. 이방인에게도 허용된 구역으로 각종 무질서가 판치는 곳이 되었습니다. 검은 뒷거래와 협잡이 판치고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을 등쳐먹는 곳이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강도의 소굴’로 만들었다고 책망한 것입니다.


  이런 성전정화 이벤트는 사실 수석 사제와 율법학자들도 적극 협조하여야 할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기들의 뒤가 구려 그렇지 못하고 오히려 예수님을 없앨 방법을 찾았습니다.


  지금도 많은 정치꾼이나 장사치들은 교회를 자기들 세력을 확장하거나 이윤을 얻으려고 사교하는 사교장쯤으로 여기고 접근합니다. 그들에게 교회는 하느님을 만나 기도하는 장소가 아니라 자기들의 이기심을 채우기 위한 수단일 뿐입니다.


  반대로 교회도 유명 인사를 끌어들이어 전교 수단으로 삼는 유혹에 빠질 수 있습니다. 신흥 종교 단체나 작은 교파는 아직도 그런 목적으로 섭외를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 성교회만큼은 본말이 전도된 행위를 하지 말아야할 것입니다.


  우리도 교회를 단순히 주님께서 머무시는 곳이 아니라, ‘기도의 집’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 그때와 똑 같은 이벤트를 행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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