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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40년 전에 고장에서 있었던 일들
작성자지요하 쪽지 캡슐 작성일2007-06-01 조회수590 추천수2 반대(0) 신고

               40년 전에 고장에서 있었던 일들 

      



▲ 태안군 태안읍 도내리 포구로 가는 상옥리 길. 확장 공사를 하고 있는 일부 구간의 모습이다. 멀리로 서산시 팔봉면의 팔봉산이 보인다.  
ⓒ 지요하

요즘은 매일 '장명수' 쪽으로만 걷기 운동을 하다가 며칠 전 모처럼 만에 백화산 뒤편 냉천골 산책로를 걷게 되었다. 한티고개를 넘어서면서 상옥리 초입머리 2차선 도로를 일정 부분 확장하는 공사 현장을 보게 되었다. 잠시 발을 멈추고 무려 40년 전의 아련한 추억 속으로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1967년 충남 태안군 태안읍 평천리 화동초등학교에서부터 도내리 포구까지 좁은 비포장 도로를 포장하려는 공사가 착수되었다. 공사를 기획하고 직접 시행을 한 이는 당시 태안천주교회 초대 주임 사제였던 고대연 야고버(콜롬비아인) 신부님이었다.

1964년 8월에 부임하고 1966년 6개월 동안 고국 휴가를 다녀온 고 신부님은 그해 7월 태안읍 전기 유치 사업에 촉매 역할을 했다. 그때까지 태안읍은 전기가 없는 동네였다. 김언석 선생을 비롯한 몇 분의 유지들이 힘을 합쳐 발전기로 소량 생산하는 전기를 읍내 일부에 공급하고 있었으나, 잦은 고장과 이런저런 사정으로 전기 공급은 원활치 못했다.

한국전력의 전기를 끌어오는 일은 참으로 중요한 명제였다. 이 일에 태안천주교회 신부님이 당시로서는 거액인 130만원을 희사함으로써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천주교 신부가 한전 전기를 끌어왔다는 말이 오래 회자될 정도였다.

고 신부님은 그 일로 그치지 않고, 1967년에는 '파리외방전교회'의 구호품(밀가루/의류)을 받아 형편이 어려운 주민 300명에 전달했고, 이어서 태안읍 평천리와 도내리 사이의 8㎞ 도로를 포장하는 계획을 세웠다. '가톨릭구제회'에서 모든 비용을 대기로 해서 곧 공사에 착수했다.

당시는 '장비'라는 게 흔치 않던 시절이었다. 일단은 주민들을 동원하여 곳곳에 자갈을 모으는 일부터 했다. 평천리에서부터 일정 구간을 정해놓고 도로 옆으로 띄엄띄엄 돌무더기를 쌓아놓는 일에 인근 주민들이 대거 참여했다. 어디서든지 재주껏 돌을 주워 모아 지게로 져 나르는 일이었다.

그때 나는 돌을 지고 오는 사람에게 표를 한 장씩 나누어주는 일을 했다. 일정 구간 안에 충분한 돌무더기들이 만들어지면 다시 일정 구간을 정하고 그 구간 안에 또 띄엄띄엄 여러 개의 돌무더기를 만드는 식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한 구간의 돌 모으는 일이 끝날 때마다 천주교회에서 품삯으로 밀가루를 나누어주었다. 주민들은 돌 한 짐에 한 장씩 받은 표를 가지고 천주교회에 와서 그 딱지 수대로 밀가루를 받아갔다.

그런데 구간이 바뀌면서 이상한 현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먼젓번 구간의 여러 개의 돌무더기에서 조금씩 돌이 줄기 시작했다. 다른 새 구간의 돌무더기들이 점점 커지면서 먼젓번 구간의 돌무더기들은 줄어드는 현상은, 사실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어쩌면 너무도 당연한 그 현상에 고 신부님은 공사 자체에 대한 회의와 큰 상심을 안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더욱 괴이한 일이 하나 발생했다. 당시 태안면장이던 분이 공사에 참여한 주민들을 모아놓고 격려 연설을 하던 중에 "이 뜻깊은 공사는 우리 지역 출신 국회의원이신 민주공화당 000의원님께서 힘을 쓰셔서 시행되고 있는 공사입니다"라는 발언을 한 것이다.

면장의 그 발언은 고 신부님의 귀에 들어갔고, 고 신부님은 주민 여러 사람을 직접 만나 사실 여부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 사실이 확인되자 그날로 공사를 중단했고, 모든 공사 계획을 백지화해 버렸다.

파리외방전교회와 가톨릭구제회에 공사 취소를 통보했지만 이미 확보한 대량의 밀가루를 반환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고 신부님은 성당의 창고 안에 가득 쌓여 있는 밀가루를 가지고 시행할 수 있는 대민 지원사업을 이리저리 알아본 다음 태안읍 평천리 화동초등학교의 운동장에 모래를 깔아주기로 결정했다.


▲ 태안읍 평천리 화동초등학교의 교정. 40년 전 내 젊은 시절의 추억 한 토막이 어려 있다.  
ⓒ 지요하

당시 신설 학교였던 화동초등학교는 운동장이 황토로 되어 있었다. 비만 오면 발이 빠져서 도저히 밟고 걸을 수가 없었다. 그만큼 교직원들과 학생들의 불편이 컸다. 그래서 모래를 두텁게 깔아 황토를 완전히 덮기로 했는데, 당시 화동초등학교에 근무했던 내 사촌 자형이신 김영호 교사가 태안천주교회의 최초 신자로서 많은 일을 하신 내 부친께 부탁하여 이루어진 일이었다.

1968년 여름의 일로서, 군 입대 1년 전이었던 나는 그 사업에도 참여하여 남문리 정주내에서 살았던 박태근(훗날 서산 동문동 성당 사무장)씨와 함께 보름 정도를 매일 학교로 출근하며 공사 감독을 했다. 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의 이름과 덤프차 아닌 보통 트럭에 실어 나르는 모래의 수량을 확인하여 수첩에 적는 것이 임무였다.

그런 과거지사 탓에 오늘에도 화동초등학교를 보면 옛날 생각이 난다. 비가 억수로 와도 배수가 잘 되고 늘 마른 상태인 운동장에서 뛰노는 어린이들을 보며, 흐뭇한 마음을 갖는다.

한편으로는 어이없는 현상으로 말미암아 도로포장 공사가 중단되었던 것을 생각하면 정말 섭섭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다. 한참의 세월이 흐른 후 우리의 경제 발전에 힘입어 평천리∼도내리 간 도로는 포장이 되었고, 지금은 일정 구간이나마 확장 공사가 시행되고 있음을 보면서, 그 길에 그런 특별한 과거지사가 어려 있음을 상기하게 된다.

그때 그 일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제 거의 없지만, 그런 과거지사 속에도 우리가 부끄러워하고 반성해야 할 점이 있음을 생각하면서….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충남 태안의 <태안신문> 5월 31일치 '특별기고'난에 게재된 글입니다.


  2007-06-01 11:31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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