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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6월 3일 야곱의 우물- 요한 16, 12-15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7-06-03 조회수527 추천수9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다. 그분께서 나를 영광스럽게 하실 것이다.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요한 16,12-­15)

‘나’를 잘 표현할 수 있는 것은 큰 힘입니다. 자기 자신을 잘 몰라서 제대로 알릴 수 없기도 하고, 알고 느끼는 바를 제대로 표현할 수 없어서 안타까울 때도 많습니다. 그럴 때 ‘세상에서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을 만난다면 완전히 이해받는 느낌을 가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이 세상을 떠나실 날을 앞둔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하실 말씀이 많으셨나 봅니다.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16,12) 3년간 함께 살면서 보여주시고 때로는 따로 한적한 곳에서 가르쳐 주시기도 한 모든 것도 아직 소화하지 못하고 있는데, 다가올 수난과 그 이후의 말씀들은 더욱 알아듣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알고도 행하지 않는 것과 몰라서 행하지 않는 것과는 마음가짐부터 다릅니다.

 

할 말을 다 하시지 않고 감당할 만큼만 가르쳐 주시는 예수님의 마음에서 어린 제자들을 염려하는 사랑을 느낍니다. 설사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했다 하더라도 어둠의 세력이 너무도 강해서 그것을 감당하기에는 아직 어리기에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 가르쳐 주시는 것 같습니다. 말씀이 내 안에서 뿌리내어 실천되기까지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아시는 주님은 때를 기다리십니다.

 

어쩌면 인간인 우리가 예수께서 하신 모든 것을 알아듣고 기록하기에는 시간과 공간, 지적·영적 능력이 부족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일은 이 밖에도 많이 있다. 그래서 그것들을 낱낱이 기록하면,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내지 못하리라고 나는 생각한다.”(요한 21,25)

내 삶을 돌아봐도 그렇습니다. 나의 하루하루는 많은 일과 사건과 생각들로 엮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수십 년 동안 내가 보고 느낀 매일의 삶의 사연들은 어디에 숨어 있는지? 기억나는 것들은 빙산의 한 조각도 되지 않습니다. 학생들이 기억나지 않는 내용은 ‘안 배웠어요!’라고 말하듯, 기억나지 않는 않는다고 해서 없었던 것은 아닐진대 말입니다.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지냈던 시간은 그들 삶의 역사에서 결코 잊혀지지 않는, 결코 잊을 수 없는 가장 강렬한 부분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살아 계실 때는 그 존재의 귀중함을 모르다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야 그 사랑을 깨닫듯, “내가 이토록 오랫동안 너희와 함께 지냈는데도, 너는 나를 모른다는 말이냐?”(14,9) 하신 말씀을 상기하면서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가신 뒤에야 ‘그때 말씀하신 것이 바로 이것이었구나!’라고 한 것들이 얼마나 많았을까요. 그때는 몰랐던 것들의 영적 의미를 글로 쓴다면 저도 요한 복음사가처럼 ‘온 세상이라도 그렇게 기록된 책들을 다 담아내지 못할 것’라고 표현했을 것입니다. 그 의미가 이 세상으로서는 도저히 담아낼 수 없을 정도로 크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큰 것 하나만 얻으면 다른 부수적인 것은 따라오기도 합니다. 곧 큰 것 하나만 깨달으면 다른 의미는 그에 준하여 알아들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참선 수행을 하는 분들도 그렇게 말합니다. 일단 크게 하나를 깨닫고 나면(대오각성) 다른 것들은 쉽게 깨달을 수 있다고 합니다.

 

제자들 또 우리가 대오각성해야 할 그 하나는 바로 ‘예수님의 마음’입니다. 그것 하나를 깨달을 때 어린 제자들은 성숙해지고 스승님의 말씀을 이어갈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그들을 가르치고 깨우치실 ‘그날에는 너희가 나에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 것’(16,23)이며,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14,26) 해주신다고 말씀하십니다. ‘진리의 영,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16,13)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는 ‘진리’이십니다(14,6). 진리의 영과 진리는 하나이며, 그 진리는 당신을 보내신 분, 하느님께로부터 왔습니다.

 

“나의 가르침은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것이다.”(7,16) 나아가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주실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16,15)고 하십니다. 마치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서로 관통하는 듯합니다. 그런 면에서 저는 아버지와 늘 함께 있어도 ‘아버지의 것이 다 내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큰아들입니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루카 15,31) 하신 말씀은 실제로 손에 잡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는 오늘도 새롭게 깨달아야 할 나의 과제입니다.

 

지금 내 손에 움켜진 것을 놓고 버려야만 받을 수 있고,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음으로써 우주를 소유할 수 있음을 믿지 못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라고 서슴없이 말씀하시는 예수님은 거침없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본 사람은 곧 아버지를 뵌 것이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다는 것을 너는 믿지 않느냐?”(14,9-10)고. ‘아버지와 나는 하나’(17,22; 10,30)라고 하십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머리글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그분께서는 한처음에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1,1-2)

 

하느님은 눈에 보이지 않습니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은 우리의 눈높이에 맞춰 ‘예수’로 이 세상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예수께서는 우리 눈에 보이는 모습으로 계시지 않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고아로 버려두지 않으시고’(요한 14,18) 다른 모습으로 우리에게 오시어 함께 계십니다. 바로 성령이십니다. 제자들은 성령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깨닫고 그 말씀을 감당하면서 생애를 마쳤습니다. 그러나 내 몫은 남아 있습니다. 곧 아직도 내가 ‘감당하지 못하는’ 말씀이 참 많습니다. 이해하지 못하여 그렇고, 알지만 행하지 못하여 그렇습니다. ‘나’라는 질그릇 속에 담아주신 성령의 보물(2코린 4,7 참조)을 통해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면서 하느님께서 ‘아버지’이심을 더 깊이 알아가야만 합니다.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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