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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신애와 은혜(恩惠)
작성자홍선애 쪽지 캡슐 작성일2007-06-06 조회수518 추천수7 반대(0) 신고

 

 
신애와 은혜(恩惠)


신애와 은혜(恩惠) 「밀양」의 여주인공 전도연 씨가 세계 3대 영화제의 하나인 칸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 받았다. 강수연 씨 이후 20년 만의 쾌거(快擧)라고 한다. 수상 직후 그 영화에 대해 관심이 증폭되고 있으나 반응(反應)은 너무나 상반되고 있다. 신앙인들은 내용 자체가 교회에 대해 비호감적이라서 싫어하고, 비신앙인들은 마치 신앙 간증처럼 교회가 너무 많이 나와서 싫다고 한다. 내 자신도 처음에는 아무 관심이 없었는데, 지난 주 동료 모임에서 그 영화를 본 어느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그 영화의 주제는 어찌 보면 일상적이면서도 한마디로 말하기 어려운 감정이 담겨있다. 분명 사랑함에도 밉고 밉지만 용서해야한다는 메시지는 인간의 한계 상황을 더 드러나게 하는 고통이지만, 진정한 은혜(恩惠)는 이것까지라도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밀양」은 신과 인간의 관계 속에서 구원의 문제를 용서와 결부시켜 다루고 있었다. 만약에 이러한 원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다면 한국영화의 문제점을 또 한 번 드러낸 졸작이라며 혹평(酷評)할 것이 분명하다. 신애(전도연 분)는 남편이 죽은 후 아들과 함께 남편고향 밀양에 가서 정착한다. 혼자 산다고 무시할까봐 일부러 부자인척 허세를 부린 것이 화근이 되어 어느 날 외아들이 유괴(誘拐)된다. 급기야 그들의 요구를 들어주지 못해 아들이 살해되었을 때 그녀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평소 자신을 전도했던 약사와 함께 교회에 간다. 신앙인이 된 후 첫 번째 변화는 믿는 자는 모든 것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한다는 교리 앞에 드디어 그녀는 결단(決斷)하고, 아들을 죽였던 가해자를 용서하려고 교도소에 가게 되었는데, 자신의 기대와 전혀 다른 그의 말과 태도로 인해 영화는 갑자기 반전되기 시작한다. 당신의 죄를 아들의 어미인 내가 용서한다고 신애가 어렵게 말을 꺼내자, 아들의 살해범은 어이없게도 이렇게 대꾸한다. ‘잘 되었습니다! 당신을 위해 저도 기도하고 있었는데... 그러나 이미 저는 신께 용서받고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 한 마디 말로 인해 신애는 절대자(絶對者)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며 신과 세상을 향한 저주(詛呪)가 시작되었다. 그녀는 신앙생활을 시작했지만 아직까지는 용서(容恕)라는 은총을 통해 세상을 새롭게 거듭나게 하시는 신의 섭리를 알지 못했기에, 자신이 용서하기 전에 누가 가해자를 용서할 수 있느냐며 분노(憤怒)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자신은 오랫동안 고통(苦痛)의 늪에 허우적거리다가 이제야 겨우 마음잡았는데, 살해범은 너무나 쉽게 죄(罪)를 용서받고 피해당한 사람보다 더 편안하게 지낼 수 있는 현실 앞에 분노했고 신에게 배신감을 느꼈던 것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나는 용서란 신과 인간의 수직적인 용서가 우선이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수평적인 용서는 더 중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던 것이다. ‘오늘 날 우리가 우리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는 주기도문 내용처럼 내가 먼저 이웃을 용서해야 자신도 절대자에게 용서받을 수 있다는 논리다. 자신은 신의 은혜(恩惠)로 값없이 용서받았다 하지만, 사람 사이에 해결해야 할 내면의 상처를 해결하지 않고는 용서란 종교인들의 의식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어제까지 망나니로 살았던 사람이 찬란한 성경을 들고 새벽기도에 나간다고 한 순간에 죄에 대한 대가를 치룰 수는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상식적으로 통하는 대가(代價)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것은 물질적인 보상이 아니라 진정한 참회의 과정을 상대가 이해한 후 용납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용서받아 아무 거리낌이 없다 해도 나로 인해 고통(苦痛)당하는 상대의 상처가 아물기까지는 최소한의 양심을 갖고 겸손한 자세로 사는 것은 신앙을 떠난 인간(人間)적인 모습이 아니겠는가. 신애가 살해범의 그 말에 그리도 무력해지는 것은 모든 것을 잃어버린 입장에서 그녀가 할 수 있고 베풀 수 있는 유일한 일은 용서(容恕)였는데, 그것조차도 절대자에게 빼앗겼을 때의 박탈감은 어떻게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일보다 더 중요하고 우선적인 일은 용서에 관한 전적인 주권은 신의 절대적인 권한이라는 사실이다. 용서란 어느 한 때의 감정이나 선행의 차원에서 이루어 질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신의 은혜가 임해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내 자신도 날마다 절대자에게 용서받는 것은 공로가 아닌 전적인 그의 은혜일뿐이다. 이 영화의 원작(原作)이었던 이청준의 단편소설 「벌레이야기」의 서문(序文)에 이런 글이 나온다. ‘사람은 자기 존엄성이 지켜질 때, 한 우주의 주인일 수 있고 우주 자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주체적 존엄성이 짓밟힐 때, 한갓 벌레처럼 무력하고, 하찮은 존재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인간이 절대자 앞에 무엇을 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는가...’ 벌레보다 못한 내가 용서받을 수 있다는 것은 신의 은총일 뿐 인간의 그 어떤 것으로 그 자리를 대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올드보이」에서도 학창시절 최민식이 무심코 뱉었던 한마디로 인해 한 여자를 잃었던 유지태의 상처가 그런 복수극을 연출하게 했던 것이다. 인간은 아무리 복수해도 아니 상대가 자신과 똑같은 일을 당한다 해도 치유 될 수 없고 위로될 수 없는 것은 용서의 주권은 사람에게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용서처럼 쉬우면서도 어려운 일이 없다. 그 주체가 그에게 있고 그의 은혜가 임할 때는 쉽지만, 자신이 주체가 될 때는 죽어도 그 문제는 해결 할 수 없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용서를 은혜(恩惠)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 은혜(grace)란 영화 제목에서 이미 시사해 주고 있다. 「밀양(密陽)」이란 단지 지명이지만, 한문으로는 ‘빽빽한 햇볕’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영어 제목은 ‘Secret Sunshine’로 정했는데 그 절묘한 조화에 할 말을 잃었다. 사람이 사는 곳은 어디든지 햇볕이 들이치는 것은 당연한 일인데, 왜 비밀(秘密)스럽게 여겼을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강아지풀이 바람에 흔들리고, 쓰레기가 굴러다니는 마당 한 구석에 흙탕물 위를 따스하게 비추는 햇살이 있었다. 삶이란 이토록 누추하고 쉽게 꺾어질 수밖에 없는 존재지만, 미약한 들풀 하나까지 비추이는 따스한 햇살처럼 인간은 사랑의 힘으로써만 절망에서 다시 일어선다는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게도 인간은 은밀한 죄악의 햇볕은 아주 작은 부분까지도 잘 느끼고 대처하면서도, 자신을 향한 신의 은총의 햇볕은 평소엔 전혀 느끼지 못하다가 무슨 일이 터지면서 느끼기 시작한다. 영화에서는 태양의 빛 한 조각 속에도 하나님의 뜻이 존재한다는 어떤 분의 말에, 신애는 햇빛에 손을 갖다 대면서 ‘아무것도 없지 않느냐?’며 반항해 보지만 안타깝게도 절대자는 그 순간에도 그녀를 비추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햇볕이 아닌 인간의 본성과 존재에 대한 깊은 철학적인 질문과 함께 근본적인 생의 에너지원이 되기에 자신의 이성과 감정을 내려놓고 순수한 마음으로 보아야 그 빛을 보고 느낄 수가 있다. 내가 잘 나가고 있을 때, 내 생각대로 인생이 너무나 잘 풀릴 때, 사람들은 그 빛을 의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절망적인 일에 빠져있을 때, 은총의 빛은 더 강하게 다가오며 마음의 어둠이 물러가며 음성(音聲)이 들리기 시작한다. 주여, 신애는 절망에 빠져있는 이 시대 사람들이지만, 당신의 사랑(神愛)입니다. 그녀에게나 제 인생에서 은혜(恩惠)를 뺀다면 얼마나 초라한 생이겠습니까. 이 시대에 저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은총(恩寵)이라는 것을 다시 한 번 ‘밀양’(密陽)을 통해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외면하고픈 고통과 좌절의 어두운 시간 속에서도 잔잔히 비추이고 있는 빛을 보라는 님의 음성(音聲)을 오늘도 듣게 하소서. 2007년 6월 3일 강릉에서 피러한 드립니다.
사진허락작가ꁾ포남님 lovenphoto님 크로스맵사이트 출처 . 경포호수

http://cafe.daum.net/ldshs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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