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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길 위에 있는 공동체" --- 2007.6.6 연중 제9주간 수요일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07-06-06 조회수609 추천수7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7.6.6 연중 제9주간 수요일

                                      

토빗3,1-11ㄱ.16-17ㄱ 마르12,18-27

                                                    

 

 

 

 

 

"길 위에 있는 공동체"

 

 



익히 알던 내용도

새삼스런 깨달음으로 와 닿을 때가 있습니다.

 

어느 수녀님의 글이 그러했습니다.


“베네디도 규칙에서 공동체의 상징은

  둥우리가 아니라 길이다(The symbol of a community in RB

  is not a nest, but a way)."


길만 바라봐도 대부분 설레는 마음일 것입니다.

 

애초부터 길을 찾아가는 구도자의 본능을 지닌 인간 같습니다.

 

비단 베네딕도 규칙 뿐 아니라

성경이나 교회의 생각도 똑 같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

하느님을 찾아가는 여정의 사람들이요,

교회 역시 순례여정 중에 있는 공동체로 규정짓습니다.


결코 안주의 정적인 둥우리 공동체 사람들이 아니라,

길을 가는 역동적 공동체 사람들이라는 것이지요.

 

저는 이 수녀님의 의견에 공감하면서도

뭔가 미진한 느낌에 정정했습니다.


“공동체는 둥우리이면서 길이다.” 라는 것입니다.

바로 베네딕도회 공동체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정주서원이 아늑한 품의 둥우리를 가리킨다면,

끊임없는 내적 쇄신의

수도자다운 생활의 서원은 길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길은 물길의 강을 뜻합니다.

물이 자연스럽게 흐르다 보면 물길이 생기고

이 물길을 일컬어 시내나 강이라 부릅니다.


제가 즐겨 인용하는 산과 강이라는 자작시가 생각납니다.


“밖으로는 산, 안으로는 강
  산 속의 강
  천년만년 임 기다리는 산
  천년만년 임 향해 흐르는 강”


산이 보금자리 품의 정주(stabilitas)를 상징한다면

강은 끊임없이 노력하는

수도자다운 생활(conversatio morum)을 상징합니다.

 

이 두 서원은 늘 창조적 긴장 중에 있기 마련이며,

이 역설의 두 서원을 동시에 사는 공동체가

건강하고 온전한 크리스천 공동체입니다.

 

끊임없이 맑게 흐르는 강 같은 내적여정의 삶이 없으면,

보금자리 품은 안주로 인해

썩은 물 고인 공동체가 되기 십상입니다.

 

안주의 공동체가 아니라 산같이 정주하면서도

안으로는 끊임없이 하느님의 물길 따라 흐르는 강 같은

내적 여정의 베네딕도회 수도공동체의 삶입니다.

 

비단 베네디도회 수도공동체뿐 아니라

모든 크리스천 공동체에 해당되는 진리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것도 이 길 위에서입니다.

 

1독서에서 토빗의 고백입니다.


“주님, 당신께서는 의로우십니다.

  당신의 길은 다 자비와 진리입니다.”


자비와 진리의 도상에서 만나는 주님입니다.

이 길을 제대로 걷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에 대한 토빗의 참회 고백입니다.


“저희는 당신의 계명들을 지키지 않았고,

  당신 앞에 참되게 걷지 않았습니다.”


한결같은 물길의 여정이 아닙니다.

맑게 흐를 때가 있는가 하면 죄로 인해 탁할 때도 있고

힘차게 흐를 때가 있는가 하면

피곤하여 약하게 흐를 때도 있습니다.

 

평화로운 여정이 있는가 하면 불화의 여정도 있고,

빛과 희망이 넘치는 여정이 있는가 하면

어둠과 절망의 여정도 있는 법입니다.

 

햇빛 밝은 날의 여정이 있는가 하면

비오는 어둔 날의 여정도 있는 법입니다.

 

이런 저런 과정의 여정을 통해

우리는 하느님께 가까이 갑니다.

 

바로 우리 요셉수도원의 20년 여정을 통해서도

그대로 입증되는 진리입니다.

 

30대의 청년 수사님들은 40대 후반의 장년으로,

40대의 중년 수사님들은

흰 머리카락 숱한 60대 노년에 접어들고 있습니다.


이런 하느님을 찾아가는 여정,

끊임없는 기도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기도가 없었다면

우리 요셉수도원 공동체 진작 무너졌을 것입니다.

 

끊임없는 기도가 어떤 외적 영향에도 흔들리지 않고

주님의 길을 가게 합니다.

 

마치 정수기(淨水器) 역할과도 같은

끊임없이 바치는 미사와 성무일도가

늘 맑게 흐르는 강 같은 공동체 되어 살게 합니다.

 

그 위기에 여정에서 1독서의 토빗과 라구엘의 딸 사라는

간절한 기도로 위기를 벗어나 계속 여정에 오르지 않습니까?


‘바로 그때에

  그 두 사람의 기도가 영광스러운 하느님 앞에 다다랐다.

  그래서 라파엘이 두 사람을 고쳐 주도록 파견되었다.”


알게 모르게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얼마나 많은 천사들을 보내주시어

우리 요셉수도원 공동체를 도와 주셨는지요!

 

사실 수도원을 물심양면으로 사랑하고 돕는 모든 은인들,

모두 하느님께서 보내주신 천사들입니다.


며칠 전 삼위일체 대축일 강론 때

저의 삼위일체 하느님께 대한  설명이 생각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은 체험적 고백의 산물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 아주 쉽습니다.

  하느님 가득함 속에서 살아간다는 고백입니다.

  위로 하늘에 계신 성부 하느님,

  아래로 땅위에 계신 부활하신 그리스도 성자 하느님,

  온 누리에 충만하신 성령 하느님 안에서,

  즉 하느님의 충만함 속에서 살고 있다는 고백이니

  얼마나 쉽습니까?”


그렇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대로

그분께서는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입니다.

 

그 삶의 여정 중에서 만났던

아브라함의 하느님이요,

이사악의 하느님이요,

야곱의 하느님이요,

우리들의 하느님입니다.

 

살아계신 하느님 안에서

이미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을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다시 살아날 때에는

  장가드는 일도 시집가는 일도 없이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아진다.’라는 주님의 말씀처럼,

이미 앞 당겨

천사와 같은 영원한 삶을 살고 있는 수도자들이기도 합니다.

 

오늘도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주님은 우리의 길을 환히 밝혀 주시고,

또 친히 우리의 도반(道伴)이 되어 주십니다.


“주님, 당신의 길을 제게 알려주시고

  당신의 행로를 제게 가르치소서.
  당신의 진리 위를 걷게 하시고 저를 가르치소서.”

 (시편25,4-5ㄱ).”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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