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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랑의 참뜻을 처음으로 알려주셨습니다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6-07 조회수755 추천수9 반대(0) 신고

 

 

<사랑의 참뜻을 처음으로 알려주셨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이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마르 12,28-34)



  우리가 사랑이라는 말을 쓸 때 너무 광범위한 감정으로 사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우리말에는 사랑을 표현하는 단어가 다양하지 못합니다. 또 그 뜻을 혼용하여 쓰고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똑같은 사랑이라는 단어를 쓰면서도 쓰는 사람과 받아들이는 사람 사이에 차이가 생겨 오해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까지 합니다.


  사모한다, 아낀다, 애틋하다, 좋아하다 등등이 있으나 거의 비슷한 의미로 쓰입니다. 그 중에 아낀다는 단어 의미가 상대를 위해 자신을 억제하고 베푸는 의미가 실려 있습니다. 앞으로 사랑이라는 개념도 좀 더 세심히 나누어 사용했으면 좋겠습니다. 언어는 사람들이 새롭게 의미를 부여하여 쓰기 시작하면 재탄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어에는 사랑이라는 단어에 에로스, 필리아, 아가페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이 이제는 상식처럼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아가페 사랑은 그 출발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보다 잘 설명하기 위해 새롭게 의미 부여한 것입니다. 본디 아가페는 널리 통용된 단어가 아니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알고 있는 사랑의 개념은 주로 에로스와 필리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지닌 숭고한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서 특별히 아가페가 쓰인 것입니다.


  그리스인들에게 에로스는 그 근원이 “나에게 행복을 약속해주는 것에 대한 욕구”입니다. 매력 있는 것, 고귀한 것, 숭고한 것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충동입니다. 인간에게는 이 에로스的 사랑의 열망이 담겨 있어 무엇인가 매력 있는 세계에 도달하려는 본능적 욕구가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인들에게 최고의 이상은 “진리를 향한 에로스的 체험”이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듯이 단순히 남녀 간의 사랑만 뜻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이 에로스는 본래 “자기 충실”을 찾아 가는 열망이므로 자기중심적인 데로 기울 우려가 있습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을 표현하는 데는 이 에로스라는 단어는 적합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랑은 그리스인들의 개념과 달리 “자기를 비우는 것”이 강조됩니다. 비천하고 남들이 버려 소외된 것을 향하는 사랑, 그 새로운 사랑을 표현하기 위해서 잘 쓰이지 않았던 아가페가 새로이 등장한 것입니다. 신약성경에 에로스라는 단어는 단 한 번도 나오지 않습니다.


  자기의 행복을 찾는 에로스와 달리 아가페는 상대방을 행복하게 해주려는 사랑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발상의 전환이 필요했습니다. 먼저 자신을 위하려는 이기주의와 욕망에서 정화 되어야 했습니다. 그리고 상대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서 상대방의 소중한 가치를 살펴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를 희생하여 상대를 행복하게 하려는 사랑이므로 유약한 사랑보다 굳센 생명력이 있어야 했습니다. 이런 사랑을 할 수 있는 분은 아마도 주님 한 분 밖에는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이런 사랑을 하라고 본보기를 보여 주셨습니다. 비록 부족하지만 포기하지 말고 이런 사랑을 실천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무엇보다 그 사랑의 실체를 여태껏 모르고 있었던 인간들에게 가르쳐주신 그 위업이 바로 사랑입니다. 이 세상에서 그 아가페 사랑이 가장 값어치 있는 것이라고 알려 주셨습니다.


  우리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보다 정확하게 알아듣기 위해서는 히브리 사람들이 사용했던 사랑이라는 단어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으로 이 세상에 오셔서 아람어를 사용하셨기 때문입니다.


  히브리어에 사랑을 뜻하는 단어가 몇 개 있습니다. 히브리어에서 사랑은 무엇보다 상호 관계에 강조점이 있습니다. 그중에 신명기 6,5절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에 사용된 사랑하라는 동사 ‘아합’은 선택된 관계에서 지켜지는 사랑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사랑은 선택입니다. 마음의 결정입니다. 이것일까 저것일까 고민하고 한번 선택된 사랑을 지켜 자기의 모든 면으로 받아들여 관계를 지속하는 사랑입니다.


 ‘헨’이라는 단어는 측은하게 여기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은 상대를 받아들이되 지속되지는 않는 사랑입니다. 예를 들면 동냥을 베풀거나 노인에게 양보하는 것입니다. 관계를 맺되 지속하지 않고 지나가는 사랑입니다.

  ‘헤세트’는 성실한 사랑으로 한 번 뿐이 아니라 언제가지나 지속되는 사랑입니다. ‘세데카’는 계약을 맺고 맹세한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상대방에게 영원히 성실할 것을 맹세하고 나오는 사랑입니다. 예를 들면 부부의 사랑을 뜻합니다. 한 번 부부의 연을 맺으면 누구도 풀 수 없는 것입니다. 이 밖에도 ‘라하민’은 자비를 베푸는 사랑을 뜻합니다. 이 외에도 비슷한 단어가 여러 가지 사용됩니다.


  이렇게 볼 때 신명기 하느님께서 인간에게 요구하시는 사랑은 먼저 하느님을 선택하는 결단입니다. 다른 것을 따르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을 선택하여 방향 전환하는 사랑입니다. 그리고 한 번 결단 했으면 자기를 바치는 성실성과 하느님과 맺은 영원한 계약을 충실히 지키려는 맹세의 사랑입니다.


  여기에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구약에서 말하는 사랑에다가 용서하는 사랑을 덧붙이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보다 정확하게 하느님의 뜻을 전달해 주시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 전에 누구도 이렇게 분명하게 표현한 이가 없습니다. 다만 부정어법으로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을 행하지 말라’는 표현은 몇 군데 있었지만, 예수님 말씀처럼 확고하고 긍정적으로, 또 그 상대방 이웃의 범위를 확장한 예는 없었습니다.


  인간은 주님께서 그 사랑을 보여 주시지 않았으면 아마도 영원히 그런 사랑이 있는 줄 모르고 지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인류는 지금보다 훨씬 불행했을 것이며 죄악의 구렁텅이에서 살아야만 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참으로 사랑하시어 강생하시고 고난 받으시고 죽으시어 진정한 사랑의 참뜻을 우리에게 알려 주신 것입니다. 그 차이는 정말 엄청난 것입니다.


  우리도 이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아 부족하나마 따라 실천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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