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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미사의 소프트웨어 I[제 77회]/ 정훈 베르나르도 신부님.
작성자양춘식 쪽지 캡슐 작성일2007-06-10 조회수503 추천수10 반대(0) 신고

 

미사의 소프트웨어 I[제 77회]/ 정훈 베르나르도 신부님.


▶ 주님의 기도 후. ◀

그리고 우리가 꼭 알아두어야 할 것은 주님의 기도가 지니는 파장입니다.

보통 일상 기도로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는“아멘~!”을 꼭 붙이는데, 미사 중에는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분이 많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커다란 종을 치면 그 소리의 여운이 오래 동안 멀리 퍼지듯이, 미가 중에 바치는 주님의 기도는 평화의 예식 때“아멘.”하는 것과 영성체 때“그리스도의 몸.”을 받아 모시면서“아멘.”이라고 응답하는 확장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아 두어야합니다.


그러나‘여운’이라고 표현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왜냐하면 그 파장은 최소한 성체를 영할 때까지 울려야 하고, 제대로 되려면 그 파장이 내 삶에서 계속 증폭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 후 바치는 기도는 주님의 기도가 지속, 확대되어 내 삶으로 변화하는 과정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부분에서 신나게‘주님의 기도’를 노래한 후,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갑자기 차분한 분위기로 돌변하곤 하는데 이렇게 가라앉은 소프트웨어는 잘못된 것입니다.

이 부분은 주님의 기도가 지니는 여운이 아닙니다.

파장이 점점 커지는‘울림’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낫겠습니다.


다시 말해서 주님의 기도가 예수님의 육성이라면, 뒤따르는 이 기도는 우리가 확성기나 마이크처럼 울림통이 되는 느낌이 필요한 부분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성가로 부르지 않지만, 주님의 기도보다 점점 더 큰 소리로 내 안에서 그리고 앞으로 살면서 울려 퍼져야 하는 기능이 작동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이 부분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하지 않고“주님”하고 부르며 기도하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기도’를 통해 하느님 아버지와 올바른 관계를 형성한 것을 전제로 가능합니다.

주님의 기도는 아버지 하느님에 대한 수평적인 사랑 고백입니다.

이렇게 아버지 하느님과 내가 일치감을 느끼면서‘주님’이라고 하느님을 부를 때는, 마치 씨줄과 날줄이 교차하듯이, 사랑이 더욱 치밀해 집니다.

수직적으로 하느님께서 이제 내 삶의 모든 것을 섭리해 달라고, 내 삶의 개입을 요청하는 의미가 깔려야 합니다.


사랑에 눈이 멀면, 그 사람 신발에 묻은 오물도 별로 더러워 보이지 않는 것이나, 사람 하는 사람끼리“너의 노예가 되고 싶어.”하고 고백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따라서 세속적인 의미에서‘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닙니다.

오히려‘아버지’라고 부를 때 보다, 더 친밀감을 느껴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서 내 삶으로 들어오시고 나는 하느님의 섭리를 살겠다는 의미의 상승이‘주님’이라는 호칭에 담겨야 합니다.


하느님의 이런 직접적인 개입이 우리에게 왜 필요한지, 그 다음에“저희를 모든 악에서 구하시고, 한평생 평화롭게 하소서.”하고 기도하면서, 또“주님의 자비로 저희를 언제나 죄에서 구원하시고, 모든 시련에서 보호하시어.”하며 기도할 때 드러납니다.

여기서는 주님의 기도 뒷부분이 반복되면서 강조되는데, 평상시 우리는 맥 빠진 상태로 이 부분을 넘어가기 쉽습니다.


그 이유는 나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냥 하느님께서 다 알아서 모든 악에서 구해주고 한평생 평화롭게 해 주셨으면 하는 나태한 마음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가톨릭교회에서 가르치는 평화 중에 이렇게 현실성이 없고 안주하는 평화는 없습니다.

어떤 평화이든지 모두 십자가와 결부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부분에서는 이런 내용이 내 안에서 큰 소리로 메아리치는 증폭 프로그램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바라는 평화는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고, 아버지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십자가, 그리고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해야 하는 십자가를 느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복된 희망을 품고 구세주 예수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게 하소서.”하고 기도할 때,‘복된 희망’도 언젠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날 희망, 아버지의 나라가 임할 희망,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질 희망이 내 안에서 메아리쳐야 합니다.


다시 말해 이 희망의 정체는 주님의 기도가 내 삶의 참모습을 드러내는 과정입니다.

그냥 별 탈 없이 돈 잘 벌어 흥청망청 거리고 무병장수 하면서 폼 잡는 나를 떠올려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것이 아닙니다.

이제 바로 영성체로 나에게 일어날 그분의 재림을 나와 상관없는 먼 훗날의 일이나 허황한 이야기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언제 오실지 어떻게 알아?”,“안 오시면 어떻게 하지?”,“자기가 와 봤자, 별 수 있나?”,“또 한 번 오기만 해 봐라.”하며 이 부분에서 잘못된 생각을 할 수 있지만, 잠시 후에 성체를 영함으로‘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진다는 임박함을 생생하게 느껴야 합니다.


하다못해 우리가 TV에서 보고 싶은 것을 놓치면,“에이 녹화라도 할 걸.”

하면서 아쉬워합니다.

또 어떤 분은 드라마 같은 것을 보면서 앞 내용을 척척 맞추기도 합니다.

그런데 미사에 참례하는 집중력은 넋 놓고 TV 보는 정도도 되지 않습니다.

이런 중요한 순간들을 깜빡 깜빡 넘어 가면서도 속상해 하지 않습니다.

그분의 재림은 미사를 자기 삶으로 풀어낸 사람들, 성호부터 시작해서 말씀 전례를 자기 삶의 이야기로 듣고, 자기를 그 미사의 제물로 봉헌하고 성변화 때 예수로 거룩히 변화한 사람에게 허락된 미사의 은총입니다.

이런 의미가 바탕을 이룰 때,“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나이다.”하는 기도가 깨달음과 감동의 울림이 되어 환호송으로 터져 나옵니다.

‘복된 희망’을 가진 적도 없고,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지도 않았다면,

왜 주님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습니다.....................♣†


           [78회: 평화 예식 으로 이어 집니다.] 

     

          

  천주교 서울 대교구 중림동[약현]성당 주임 정훈 베르나르도 신부.

 

                             

                                   

                                       [사랑 하올 예수 성심이여: 가톨릭 성가 209 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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