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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영혼의 허기짐 / 정만영 신부님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6-11 조회수1,058 추천수8 반대(0) 신고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서, 하느님을 알고 난 후에 성서를 읽고, 신학을 공부하고, 기도를 하면서 이해가 되지 않은 대목들이 많이 있다. 물론 어떤 것을 더 잘 이해하고 깊은 관상을 통해 그분과 일치를 이루기도 했다. 하지만 끝내 이해가 되지도, 혹 도대체 이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하는 뜻인지도 모르게 그렇게 지내야하는 성서가 있어 왔다.
        오늘 이 복음도 그중에 하나일 것이다. 성전전화사건 앞에 있는 이 부분을 어떻게 이름 붙일 수 있을까? 마태오와 마르코 복음서 함께 기록되어 있는 오늘 복음의 제목은 두 복음서에서 똑 같이 ‘저주 받은 무화과나무’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신경질 부린 예수’나 ‘재수 옴 붙은 무화과나무’라고 붙이면 어떨까? 혹 좀 더 고상하게 ‘배고파 이성을 잃은 예수’라고 할까?

        암튼 오늘 복음이 참으로 이해하기 힘든 것은 당신은 무화과 철도 아닌 시기에 열매를 따 먹으려다 열매가 없자, 저주하시는 예수님의 신경질적인 모습이다. 아무리 일개 나무에 불과하다고 해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나무에 저주하는 것을 잘 이해하고 납득하기란 쉽지 않다. 아마도 요즘 같은 시대에는 길다가 이런 사람을 보았다면...정신병자로 밖에 생각되지 않았을 것이다. 혹시라도 나무를 꺾어 버리려 한다면, 경찰에 신고를 했을 것이다.

        또한 그 나무를 말라죽게까지 하셔놓고 뚱딴지 같이 무조건
“믿기만 하면 이 산더러 번쩍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더라도 그대로 될 것이다”라고 하셨다.
더더욱 기가 막힌 것은 당신은 나무도 용서할 줄 모르시면서 나무를 말라죽게 저주해 놓으시곤
태연하게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사람을 ‘용서’하라고 하셨다.
어떻게 이런 분의 말을 믿고 따라야 할지 참으로 난감하다.

        어떻게 신경질적인 이 남자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저주해서 나무를 말라 죽인 이 남자를 그래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나마 저주의 능력(?)이 있어서..
아무리 배가 고파도 그렇지...배고프다고 저주한다면 이 세상에 남아 돌 나무가 하나도 없을 성 싶다.
그것도 제 철도 아닌데.
우물가에서 숭늉을 찾는 것도 유만부득에다, 우물가에서 숭늉이 없다고,
우물에 독약을 뿌리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그리곤 우물에 독에 중독되어 허연 배를 뒤집고 둥둥 떠 있는 물고기들을 보면서도
‘믿음을 가지고 이 우물을 마셔라. 죽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고 무슨 차이가 있을까?

주님, 당신의 이 신경질적인 모습을 어떻게 이해해야합니까?
이해하지 말고, 무조건 믿어야 한다구요 ?
주님, 안됩니다. 오늘은 무엇인가 제게 대답 좀 해 주셔야 하겠습니다.
당신을 더 잘 따르기 위해서는 당신을 알아야겠습니다.
당신의 치부까지도 좀 알고 싶습니다.

        당신의 현재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갈릴래아에서의 하느님 나라를 전하시며 많은 병자들을 고쳐 주신 당신입니다. 제자들을 당신 곁에 두시기 위해 부르셨던 당신입니다. 그들과 함께 지내면서 당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면 유대인들에게 잡혀 고통과 수난, 결국 죽음을 당하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흘 만에 부활할 것이라도 분명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3년이란 시간을 보내며 당신이 하신 일들을 보고, 듣고, 놀랐던 그들이지만 당신을 이해한 제자는 단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들은 서로 치고받고 얼굴을 붉히며 누가 제일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가에 대한 욕심으로만 가득 차 있습니다. 무척 답답하고 외로우셨을 당신이라 생각됩니다.  
        이제 막 당신의 제자들과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의 환호 소리에 예루살렘에 입성한 당신입니다. 육체적으로 무척 피곤해 있을 당신을 충분히 그려 봅니다. 심리적으로도 또한 당신이 고통과 수난, 죽음을 당할 시간 앞에 긴장되어 있음을 압니다. 긴장이 아니라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당신의 이성과 감정을 마비시켜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육신의 배고픔이 그렇게도 당신을 날카롭게 하셨나요?  
그렇게 당신의 화를 폭발시킬 정도로 통제할 수 없을 정도였는지요?
그래서 그렇게 나무에게 저주하신 후,
성전에서 상인들과 환전상들을 내쫒으시며 그들의 좌판을 뒤엎으셨습니까?  
남자들은 배가 고프면 참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당신을 두고 한 말인가요?
사실 전 배고파도 당신처럼 그렇게 참지 못하고 화를 내 본적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당신의 모습을 이해하기 힘든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신의 배고픔은 어떤 허기짐입니까? 저는 당신의 그 허기짐에 의문이 듭니다.
육체적 허기짐이었습니까? 혹시 위장의 꼬르륵거리는 소리를 들었습니까? 공복감으로 두통과, 현기증을 느끼고 쉽게 피로감을 느끼셨는지요? 아님 정말로 너무 많이 배가 고파 짜증을 낸 것입니까? 만일 위와 같았다면 당신의 배고픔은 육체적 허기짐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혹 영혼(정서적)의 허기짐은 아니었습니까?
제자들의 몰이해에서 오는 슬픔과 외로움을 더 느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을 입성하면서 군중들을 보면 당신이 느낀 것은 기쁨보다는 군중들의 환호소리에 비례하여 공허감이나 허전함이 더 있지 않았는지요? 아버지의 집이 강도들의 소굴로 변해져 있는 것을 보며 당신이 느낀 것은 좌절감과 분노는 아닙니까? 또한 고통과 수난을 앞두고 당신이 인간으로서 감당해야했던 우울감, 불안은 아니었습니까? 폭풍전야의 고야처럼 죽음 직전에 침묵과 단순함이 주는 지루함에 권태로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여성들이 짜증스럽고 화가 나고 스트레스가 쌓일 때 먹게 됨으로서 그 먹는 행위로...
기분 좋은 어떤 것을 보상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음식을 먹는다고 합니다.
혹시 당신도 그러했다면 이 배고픔은 육체적 허기짐보다 당신 영혼의 허기짐이 아니었습니까?
이해 할 수 없었던 당신의 신경질적인 행동이 사랑에 굶주린 당신 영혼의 허기짐이었습니까?
이것이었습니까? 당신의 허기짐은?
그렇다면 이제 좀 더 당신이 이해됩니다.  

당신의 슬픔과 분노, 불안한 당신 자신에 대한 고발이었군요.
그래서 당신 자신에게 무조건적인 기도와 믿음을 이야기하셨습니까?
그래서 하느님의 제대에 희생제물이 되시기 전
제자들을 용서하는 마음에서 용서를 말씀하셨습니까?
그렇다면 그 용서는 결국 당신의 용서였군요. 제자들과 유대인과 군중들에 대한...
또한 당신 자신과 화해하려는 당신의 몸부림이었군요.
그런 당신 영혼의 허기심에 연민이 생깁니다.
그 굶주림을  제가 채워드릴 수 있을까요?
불가능 할 것 같습니다.
사실 저 역시 당신과 비슷한 굶주림을 가지고 있거든요.
하지만, 당신의 그런 허기짐을 느낄 수 있다는 것만으로
당신을 더 많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당신에게 더 가까이 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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