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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6월 17일 야곱의 우물- 루카 7, 36-8.3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7-06-17 조회수546 추천수4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바리사이 가운데 어떤 이가 자기와 함께 음식을 먹자고 예수님을 초청하였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바리사이의 집에 들어가시어 식탁에 앉으셨다. 그 고을에 죄인인 여자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님께서 바리사이의 집에서 음식을 잡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고 왔다. 그 여자는 향유가 든 옥합을 들고서 예수님 뒤쪽 발치에 서서 울며, 눈물로 그분의 발을 적시기 시작하더니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그 발에 입을 맞추고 향유를 부어 발랐다.

 

예수님을 초대한 바리사이가 그것을 보고, ‘저 사람이 예언자라면, 자기에게 손을 대는 여자가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지, 곧 죄인인 줄 알 터인데.’ 하고 속으로 말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시몬아, 너에게 할 말이 있다.” 시몬이 “스승님, 말씀하십시오.” 하였다. “어떤 채권자에게 채무자가 둘 있었다. 한 사람은 오백 데나리온을 빚지고 다른 사람은 오십 데나리온을 빚졌다. 둘 다 갚을 길이 없었으므로 채권자는 그들에게 빚을 탕감해 주었다.

 

그러면 그들 가운데 누가 그 채권자를 더 사랑하겠느냐?” 시몬이 “더 많이 탕감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옳게 판단하였다.” 하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셨다. “이 여자를 보아라. 내가 네 집에 들어왔을 때 너는 나에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자기의 머리카락으로 닦아주었다. 너는 나에게 입을 맞추지 않았지만, 이 여자는 내가 들어왔을 때부터 줄곧 내 발에 입을 맞추었다.

 

너는 내 머리에 기름을 부어 발라 주지 않았다. 그러나 이 여자는 내 발에 향유를 부어 발라주었다. 그러므로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이 여자는 그 많은 죄를 용서받았다. 그래서 큰 사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나 적게 용서받은 사람은 적게 사랑한다.” 그러고 나서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죄를 용서받았다.” 그러자 식탁에 함께 앉아 있던 이들이 속으로, ‘저 사람이 누구이기에 죄까지 용서해 주는가?’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여자에게 이르셨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평안히 가거라.” 그 뒤에 예수님께서는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시고 그 복음을 전하셨다. 열두 제자도 그분과 함께 다녔다. 악령과 병에 시달리다 낫게 된 몇몇 여자도 그들과 함께 있었는데, 일곱 마귀가 떨어져 나간 막달레나라고 하는 마리아, 헤로데의 집사 쿠자스의 아내 요안나, 수산나였다. 그리고 다른 여자들도 많이 있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재산으로 예수님의 일행에게 시중을 들었다.
(루카 7,36-­8,3)

요한복음에서 간음한 여인을 연상시키는, 이름도 성도 모르고 단지 죄인으로 유명한 ‘여인 하나’(7,37)가 ‘아름다운 일을 한 여인’으로 2천 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그 향기를 맡게 해주는 이야기가 오늘 복음입니다.

 

이 본문에 제목을 붙인다면 무엇이 될까요? ‘죄와 벌’이 아닌 ‘죄와 용서’, ‘믿음과 구원’, ‘예수와 여인’. 여인이 어떤 죄를 지었는지 모르지만, 윤리적인 죄가 아닌가 싶은데 경건한 바리사이는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적대시하면서 멸망할 이들과 상종하면 자신들도 불결해져서 하느님과도 멀어진다고 규정해 놓고 있었습니다. 물론 지금도 이런 여자들과 드러내 놓고 가까이 지내는 것은 남의 이목 때문에라도 쉬운 일이 아닌데 오늘도 예수께서는 죄 많은 여인의 편이 되십니다.

 

이름도 없는 이 여인은 말도 없습니다. 감히 예수님 앞에 서지도 못하고 발치에 서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리다가 눈물이 예수님의 발을 적시자 손수건도 옷자락도 아닌 머리카락으로 닦고 나서 발에 입 맞추고 향유를 발랐습니다. 그녀의 행위가 말 대신 모든 것을 대변해 주고, 예수님은 말없는 선의의 행위를 통해 모든 것을 이해하십니다.

 

반면 예수님을 초대한 주인은 환영인사도 손 씻을 물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그 여인의 행동을 못마땅해합니다. 그렇다고 겉으로 드러내어 말하지도 않습니다. ‘나는 음식만 제공한다. 나머지는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 하듯이 말입니다. 순간 ‘아마 이 사람은 예언자가 아닌 모양이다. 이 여인이 누구인지 모르고 저런 대접을 받으니, 내가 사람을 잘못 보고 초대한 것은 아닐까?’ 하며 후회했는지도 모르지요. “중요한 것은 불평하는 것이 아니라 ‘슬퍼하는 것’이다.

 

 

아이가 비뚤어진 길을 걸어와서 그렇게 고독한 모습으로 되었다는 사실에 대한 슬픔 말이다. 화를 내지 말고 슬퍼하라. 복수가 아니라 연민의 정을 가지는 것이다.” 연민이 없는 그를 보며 야누쉬 코르착의 말이 생각납니다. 동시에 지난 4월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사상 최대의 총기난사사건을 일으킨, 분노보다 슬픔이 앞서는 교포 학생이 생각납니다.

 

이 여인이 어떤 사람이었건 간에 그녀의 마음과 행동을 받는 예수님은 의도적인지 잊어버렸는지(정작 그들이 초대받으면 윗자리에 앉으려고 다투면서: 루카 14,7) 몰라도 당신을 대우하지 않는 사람의 집에도 차별 없이 손님으로 들어가 함께 먹고 마십니다. 그들이 돌아서서 ‘그는 손도 안 씻고 음식을 먹는 율법을 어기는 자’(마르 7,5)라고 헐뜯고, 그는 ‘먹보요 술꾼’(7,34)이라고 소문을 낼지라도 상관하지 않고 말입니다. 예수께서는 여기서도 “시몬아, 너에게 할 말이 있다.”(7,40)며 상대가 질문에 대답하게 함으로써 스스로 깨닫도록 하십니다.

 

 

그는 “더 많이 빚을 탕감받은 사람이 채무자를 더 사랑합니다.”고 당연한 이치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시몬은 ‘죄와 벌’을 알았지만 예수님은 ‘죄의 용서’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분의 초점은 죄 지은 그가 이제부터는 사랑하고 감사하며 새 삶을 살도록 하는 데 있었습니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의롭다고 여기는 시몬은 적게 용서받은 사람으로서 적게 사랑하고, 여인은 많은 죄를 용서받고 큰 사랑을 드러냈다고 인정받았습니다. 마치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를 보는 것 같습니다(루카 18,9-14).

 

자신의 잘못을 제대로 보고 인정하며 뉘우치는 것은 아름다운 일 중의 하나입니다. 제1독서에서 예언자 나탄은 한 이야기를 통해 다윗의 잘못을 지적해 줍니다. 나탄의 슬기와 용기도 그렇지만 “내가 주님께 죄를 지었소.”(2사무 12,13) 하고 깨달은 즉시 잘못을 인정한 다윗의 훌륭한 점도 여기에 나타납니다. 자신의 죄를 은폐하거나 왕의 자존심으로 합리화하려 하지 않았습니다. 방탕한 작은아들이 아버지께 돌아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루카 15,19) 하듯 다윗도 자신의 죄가 단지 한 인간, 우리야한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 저지른 잘못이라고까지 뉘우칩니다.

 

그래서 시편 51편이 탄생됩니다. “당신께서는 제사를 즐기지 않으시기에`/`제가 번제를 드려도 당신 마음에 들지 않으시리이다.`/`하느님께 맞갖은 제물은 부서진 영.`/`부서지고 꺾인 마음을`/`하느님, 당신께서는 업신여기지 않으십니다.”(51,18-19)
이런 마음을 지닌 사람에게 예수님은 대답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7,50) 바오로 사도도 말합니다. “사람은 율법에 따른 행위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갈라 2,16)

 

구약시대에는 사제나 왕에게 몰약을 섞은 기름을 부어 성별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메시아란 ‘기름부음받은자’란 뜻입니다. 예수께서는 성령의 도유로 충만한 메시아였지만 이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죄인의 선한 뜻이 마치 예수님을 메시아로 기름부어 드리는 것만 같습니다. 그것도 머리도 몸도 아닌 발에. 스승이 발을 씻기는 것을 거부한 베드로에게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함께 아무런 몫도 나누어 받지 못한다.”(요한 13,8)고 하신 예수님은 여인이 눈물로 발을 씻자 여인의 죄를 씻어주십니다.

 

 

“목욕을 한 이는 온몸이 깨끗하니 발만 씻으면 된다.”(요한 13,10)고 하셨듯, 발에 기름부음 당하심으로 여인에게 메시아로서의 ‘죄의 용서’를 선언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 안에서 해방과 사랑을 체험한 여인이 어찌 예수님을 따라다니지 않겠습니까? 십자가 아래까지도 따라갔을 것이고, 날이 밝기만 하면 시신에 발라드리려고 향유와 향료를 준비했을 것입니다(루카 23,56; 24,1).

 

오늘날도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갈라 2,20)라고 고백하며 향유 바르는 삶을 사는 예수님의 여인들이 많음을 믿습니다.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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