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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의 일꾼" --- 2007.6.18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07-06-18 조회수523 추천수6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님 강론 말씀)

 

 

 

2007.6.18 연중 제11주간 월요일

                                                

2코린6,1-10 마태5,38-42

                                                      

 

 

 

"하느님의 일꾼"

 



하느님의 일꾼은 악인에게 맞서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께 대한 믿음으로 삽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께 사로잡힌 악입니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심원한 통찰이 담긴 주님의 말씀입니다.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마찬가지 악은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아야 하는데

악과 사람을 분리하는 것 참 어렵습니다.


악에 대한 통찰의 지혜를 나눕니다.

 

선의 결핍인 악,

선에 굶주린 악이라 하기도 하고,

악은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선에 기생하여 존재한다고도 합니다.

 

하여 선이 없으면 악도 없다고 합니다.

 

불가에서는 선이 있어 악이니

선악의 이원론을 초월하는

일원론적 무분별의 지혜를 말하기도 합니다.


아마 예수님도 분명 이 경지에 이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햇빛을 주시는 자비로우신 하느님입니다.

 

선과 악이 공존하는

인간 본질에 대한 깊은 통찰에 뿌리를 둔 연민의 사랑입니다.

 

흔히 옛 어른들의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란 말도 생각납니다.


절대 악을 악으로 이기지 못한다는 건 체험적 진리입니다.

오히려 악의 저항력만 키워 보복의 안순환만 계속될 뿐입니다.

 

하여 바오로 사도는 선으로 악을 이기라 하지 않으셨습니까?


사회악을 근절 시키려는 시도들 결코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자칫 악을 제거하려다가 선까지 다칠 수 있습니다.

 

가라지를 뽑다 밀까지 뽑을 수 있고,

단점을 없애려다 장점까지 잃을 수 있으며,

녹을 지우려다 그릇까지 깰 수 있습니다.

 

선악의 관계는 이렇듯 깊고도 미묘하여

대하기가 극히 조심스럽습니다.


역시 악에 대한 최고의 처방은

선악의 이분법을 초월하는 무분별의 자비심입니다.

 

이탈과 초연의 사랑입니다.

 

오른 빰을 치거든 다른 뺨을 돌려 대고,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겉옷을 주고,

천 걸음을 가자는 이에게 이천 걸음을 가주며,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말라는 말씀들,

악인에게 맞서지 않는 상징적 행위들입니다.


바로 이 경지를 사신 분이

하느님의 일꾼 바오로 사도였습니다.

 

완전히 선악의 이원성을 초월한

무집착의 자유로운 삶이셨습니다.

 

영광을 받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중상을 받거나

칭찬을 받거나

늘 하느님의 일꾼으로 살아간 바오로요,

슬퍼하는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늘 기뻐하고,

가난한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많은 사람을 부유하게 하며,

아무 것도 가지지 않은 자같이 보이지만

실은 모든 것을 소유한 자

바로 하느님의 일꾼인 바오로였습니다.


진정 자유로운 크리스천 삶입니다.

 

말 그대로 하느님만으로 행복하고 부자인 자들이요

존재자체로 행복한 무욕의 사람들이

바로 하느님의 일꾼들입니다. 그

 

러니 아무도 이들을 유혹하거나 다칠 수 없습니다.

 

오늘도 주님은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은총으로

선으로 악을 이기는 삶을 살도록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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