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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관용과 사랑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6-18 조회수818 추천수9 반대(0) 신고

 

 

<관용과 사랑>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 오히려 누가 네 오른뺨을 치거든 다른 뺨마저 돌려 대어라. 또 너를 재판에 걸어 네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는 겉옷까지 내주어라. 누가 너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주어라. 달라는 자에게 주고 꾸려는 자를 물리치지 마라.” (마태 5,38-42)



  예전에 저는 오늘 복음 말씀을 인간들이 지킬 수 없는 것이라도 지고지선한 목표를 세우고 그 경지에 도달하도록 노력하다 보면 어느 정도 가깝게 다가갈 수 있다는 의미에서 교육적인 교훈쯤으로 생각했었습니다. 테레사 성녀같이 숭고한 정신을 지닌 소수 인격자라야 도달 할 수 있고 우리 같은 평범한 사람들에게는 노력하는 데 의의가 있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노력에는 한계가 있게 마련입니다. 노력한다고 다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출발부터 방향이 틀리면 전혀 엉뚱한 곳에 도착하기 마련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넉넉하고 참을 줄 아는 관용만 가지고는 도저히 도달 할 수 없는 경지입니다. 어떻게 오른뺨을 치는데 왼뺨마저 돌려 댈 수 있겠습니까? 어떻게 속옷을 가지려는 자에게 유대인들에게는 생명과 같은 겉옷을 줄 수 있겠습니까? 


  여기서 속옷은 우리가 생각하는 내복이 아니라 일상에서 일할 때 입는 평상복이나 작업복을 말합니다. 겉옷은 유대인들이 외출하거나 여행할 때 입었던 외투로서 그 사람의 신분을 나타내고, 광야에서는 이불 역할까지 했습니다.  탈출기 22,25절, 신명기 24,13절에서는 그 겉옷을 담보로 잡지 말라고 엄격히 제한했으며 혹시 담보로 잡았더라도 해가 지기 전에 반드시 돌려주라고 써 있습니다.


  어떻게 달란다고 다 주겠으며 꿔달란다고 모두 꿔주겠습니까? 그러나 상대방을 사랑하는 마음이 있을 때는 이런 내용이 다 가능하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깨닫게 됩니다. 관용하는 마음만으로는 도달 할 수 없지만 사랑하는 마음만 있다면 가능하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한 번도 술 취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가끔 술에 취해 횡설수설하는 사람들을 보면 굉장히 못 마땅합니다. 되지도 않는 소리를 계속 반복하기도하고 억지 주장을 내세울 때는 겉으로 화를 내지는 못해도 언짢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얼굴에 역력히 드러냅니다. 어떤 때는 아예 대놓고 화를 낸 적도 있습니다. 하루나 이틀 지나고 나면 내가 왜 그리 속 좁은 태도를 보였는지 자책되기도 합니다.


  제가 술이 세어서가 아니라 전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오랜 동안 되도록 술자리에 참석하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막상 술자리에 어울릴 기회가 되면 매우 어색하고 힘들었습니다. 상대방에게 술을 권할 줄도 모르고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가야 되는지도 몰랐습니다.

  제 스스로 좌불안석이 되어 조만간 어색하게 생각하는 태도가 눈에 보이는지 다들 다른 자리로 옮겨가 버립니다. 시간이 지나면 언제나 한 구석에 꿔다 논 보릿자루모양으로 앉아 있는 제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럴 때마다 제 모습이 얼마나 초라하게 느껴지는지 모릅니다.


  여러 해 주일학교 교장을 할 때도 술자리를 피하느냐고 교사들과 어울리지 못했습니다. 교사들이 힘든 행사를 치루고 뒤풀이를 원해도 식사비를 보조하는 정도로 끝내고 말았습니다. 속으로 불만을 지니고 있는 줄 뻔히 알면서도 술자리에서 느끼는 곤혹스러움을 견디지 못하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미안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던 것이 그룹성서 봉사를 시작하면서 차츰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공부할 때는 정릉수녀원으로 가서 수녀님과 공부했기 때문에 잘 몰랐지만, 본당에서 봉사할 때는 술자리를 피할 수 없었습니다. 묵상 나누기를 하면서 형제님들이 겪어온 아픔을 알아갈 때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든 공감하고 있는 제 마음을 전달하고 싶었습니다. 비록 술잔을 받아 놓고 고사 지내듯 상위에 놓아두었지만 술자리에서 대화하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비록 마시지 않지만 술잔을 권하기도 했습니다.


  술자리에 참석하는 것 외에도 그동안 제가 싫어해 피했던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일에 관용하는 자세를 가지고 접근해보려 노력했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관용하는 자세가 아니라 제게는 더 필요한 무엇이 있어야 했습니다. 그것이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그룹성서 봉사를 하면서 깨닫게 된 것입니다. 요즘엔 성서 못자리 봉사를 합니다만 그룹원들이 각자 마음을 열도록 하기 위해서는 제가 먼저 사랑하는 마음을 보여야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의례적이고 넉넉한 자세만으로는 부족합니다.


  다른 봉사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봉사를 경험한 많은 분들께서도 느끼셨겠지만 어느 단계에 까지는 잘 협조되고 보람을 느끼게 됩니다. 하지만 그 이상 나눔 단계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봉사하는 스스로도 점차 힘겨워하게 됩니다. 게을러지게 됩니다. 사명만으로는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봉사하는 것에서도 이렇게 한계에 부닥치게 되는데 복음에서 예를 든 경우에서야 오죽하겠습니까? 누구도 따를 수 없고 실행하기 어려운 경우일 것입니다.

 

  오늘 제 1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주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지닌다면 그 모든 어려운 일들이 가능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베푸는 사랑마저도 우리 힘만으로는 지극한 경지에 들어갈 수 없고, 주님께서 은총을 부어주셔야 가능한 것입니다.


  우리도 사도 바오로의 가르침대로 주님께 은총을 간구하고 그 은총을 헛되이 받지 않도록 해야 하겠습니다.


 

 

브람스 현악 6중주 1번 2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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