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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6월 24일 야곱의 우물- 루카 1, 57-66.88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7-06-24 조회수584 추천수4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엘리사벳은 해산달이 차서 아들을 낳았다. 이웃과 친척들은 주님께서 엘리사벳에게 큰 자비를 베푸셨다는 것을 듣고, 그와 함께 기뻐하였다. 여드레째 되는 날, 그들은 아기의 할례식에 갔다가 아버지의 이름을 따서 아기를 즈카르야라고 부르려 하였다.

 

그러나 아기 어머니는 “안 됩니다. 요한이라고 불러야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들은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 하며, 그 아버지에게 아기의 이름을 무엇이라 하겠느냐고 손짓으로 물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그리하여 이웃이 모두 두려움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이 유다의 온 산악 지방에서 화제가 되었다.

 

소문을 들은 이들은 모두 그것을 마음에 새기며,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말하였다. 정녕 주님의 손길이 그를 보살피고 계셨던 것이다.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졌다. 그리고 그는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다.
(루카 1,57-­66.80)

성인들의 축일은 대개 돌아가신 날로 지내는데, 세 분은 탄생일도 축일로 지냅니다. 바로 예수님과 성모님, 세례자 요한입니다. 이분들의 탄생이 그만큼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입니다.

성무일도 독서기도 찬미가는 그의 역할을 이렇게 노래합니다.

“세상의 죄 없애는 거룩한 분을`/`성 요한은 손으로 가리키셨네.”

 

아침기도 찬미가에서는 “한 개의 화관으로 장식된 성인`/`또 다른 성인들은 두 개의 화관`/`요한은 더욱 많은 꽃이 꽂혀진`/`세 개의 화관으로 장식되도다.”

세 개의 화관이란 ‘눈처럼 깨끗하게 죄 없으시며’에서 동정의 화관, ‘사막의 개척자요, 크신 예언자’의 화관 그리고 ‘훌륭히 믿음 지킨 순교’의 화관입니다.

예수께서는 세례자 요한을 ‘예언자보다 더 중요한 인물’(마태 11,9)이며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고 극찬하셨습니다.

오늘 복음 구조를 살펴보면, A 57절 엘리사벳이 달이 차서 아들을 낳음은 A` 주님의 손길이 보살피고 계심(66ㄴ)과 맥을 이룹니다. B 58절과 B` 65-66ㄱ절의 이웃의 반응이 한 조를 이룹니다. C 59절과 C` 64절이 아버지 즈카르야와 연관이 됩니다. D 60절과 D` 62-63절은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고 보니 61절 ‘당신의 친척 가운데에는 그런 이름을 가진 이가 없습니다.’란 구절이 한가운데에 남습니다.

 

왜 이 구절이 중심에 있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웃들은 ‘이 아기가 대체 무엇이 될 것인가?’ 하고 의아해했지만 실로 ‘요한’이라는 이름은 ‘하느님이 불쌍히 여기신다.’란 뜻으로 아기와 그 아기의 사명에 대한 하느님의 계획을 분명히 드러내 보이는 표지입니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이렇게 설교하였습니다. “요한은 신약과 구약을 나누는 경계선입니다. 주님 친히 이것을 증명하십니다. ‘요한까지 율법과 예언자의 시대였다.’ 요한은 구약을 대표하고 신약을 예고합니다. …`요한은 태어나기 전 마리아의 방문을 받았을 때 어머니의 태중에서 기뻐 뛰놀았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태어나기 전부터 예언자로 간택되어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보시기 전부터 그리스도의 선구자로 드러났습니다.

 

이것은 인간의 미약한 이해력을 초월하는 하느님의 업적입니다.” 이것이 그 이유입니다. 하느님의 능력에 의한, 하느님이 주신 아기이기에 ‘에드워드 1세, 2세’ 하듯 혈육에 의한 이름이 아니라, 제1독서에서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주셨다.”(이사 49,1ㄷ)고 하듯 하느님 뜻에 의한 이름 ‘요한’이라고 함으로써 바야흐로 은총과 자비의 때가 시작됨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분위기는 메시아가 오실 것을 알리는 전주곡 같습니다.

첫 서원을 하면서 수도생활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삶이라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습니다. 물론 상황이 나쁘고 어려울 때도 있겠지만 결국 그것을 찬미로 풀어내야 하는 삶이라고. 수도자들은 밤 대침묵 후 아침 시간경을 “주님, 제 입술을 열어주소서. 제 입이 당신 찬미를 전하오리다.”라는 기도로 시작합니다. 우리가 입을 여는 이유는 하느님을 찬미하기 위함이라는 것이지요.

 

사실 모든 피조물의 궁극적 기도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한 즈카르야가 맨 먼저 한 말도 하느님 찬미였습니다(1,64). 그런데 그가 하느님의 일을 찬미하기까지는 열 달이라는 침묵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야곱의 우물」 3월호 ‘장자 읽기’에 의하면 ‘심으로 듣지 말고 기(氣)로 들으라.’고 하였지요. ‘귀는 소리를 듣는 데서 멈추고 심은 외부의 사물과 접촉하여 머무를 뿐. 기는 비어 있어서 온갖 것을 다 받아들이는’ 그런 들음이 되라고 합니다. 이렇게 들을 줄 알 때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모님과 달리 즈카르야는 하느님의 말씀을 알아듣지 못해 의심하고 벙어리가 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운명처럼 어머니의 기도로 태어난 구약의 첫 예언자라고 할 수 있는 사무엘도 세 번째 부르심에서야 “말씀하십시오. 당신 종이 듣고 있습니다.”(1사무 3,10)라고 합니다.

 

그 사무엘은 자라서 자기 뜻대로 한 사울에게 “주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번제물이나 희생제물 바치는 것을 주님께서 더 좋아하실 것 같습니까?”(1사무 15,22)라고 질책합니다. 다윗은 “당신께서는 희생과 제물을 기꺼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저의 귀를 열어주셨습니다.”(시편 40,7)라고 노래합니다. 신명기 6장 4절 “이스라엘아, 들어라!”에서부터 집회서(3,1)에 이르기까지 하느님은 이스라엘이 당신 말씀을 제대로 듣기를 원하셨지만 이스라엘은 제대로 듣지 않았습니다.

 

신약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마르 9,7) 하셨지만 제자들과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말을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들을 귀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고 말았습니다. 결국 우리는 얼마나 제대로 듣지 못하고, 또 듣지 않는 사람들인가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공자님도 나이 육십에 이순(耳順)이라 하셨으니 제대로 듣는 일이 분명 쉬운 일이 아님을 알겠습니다. 벙어리가 된 즈카르야는 아들이 태어나기까지 “그분께서는 아침마다 일깨워 주신다. 내 귀를 일깨워 주시어 내가 제자들처럼 듣게 하신다.”(이사 50,4)는 마음으로 살지 않았을까요? 잘 들을 때 잘 말할 수 있게 되며, 잘 들음은 일치를 이룰 수 있는 좋은 터전입니다.

 

엘리사벳과 즈카르야는 아기의 이름을 ‘요한’이라고 하는 데서 일치를 이룹니다.

 

아버지를 들을 줄 아는 사람으로 만든 이 축복받은 아기는 자라면서 정신도 굳세어지고 이스라엘 백성 앞에 나타날 때까지 광야에서 살았습니다. 잘 들을 줄 아는 사람으로서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가 되기 위하여.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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