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좁은 문이 오히려 힘이 덜 듭니다.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6-26 조회수1,004 추천수10 반대(0) 신고

 

 

<좁은 문이 오히려 힘이 덜 듭니다.>... 윤경재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주지 말고, 너희의 진주를 돼지들 앞에 던지지 마라. 그것들이 발로 그것을 짓밟고 돌아서서 너희를 물어뜯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

“너희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길도 널찍하여 그리로 들어가는 자들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얼마나 좁고 또 그 길은 얼마나 비좁은지, 그리로 찾아드는 이들이 적다.” (마태 7,6. 12-14)



  마태오 복음 7장은 5-6장에서 전해 받은 가르침을 어떻게 실천할 것인지 하는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 실천 덕목 중에서 기본 원칙이 되는 것은 바로 황금률입니다. ‘그러므로’라는 말로 그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행동의 출발점은 바로 자기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타인이 바뀌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바뀌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상호관계를 성취하려면 먼저 타인을 배려하는 것이 수월하다고 합니다. 그 점을 현대 심리학에서도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남이 너희에게 해 주기를 바라는 그대로 너희도 남에게 해 주어라.”


  이 황금률과 비슷한 내용은 어느 나라 어느 종교에서도 나타납니다. 그리스에서도  중국에서도 인도에서도 이와 비슷한 경귀들이 발견 됩니다. 예수님 보다 한 세대 쯤 앞서 살았던 바리사이 율사 힐렐도 “네가 당하기 싫은 일을 네 이웃에게 하지 말라. 이것이 율법의 전부요 나머지는 모두 풀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이 내용은 부정형으로 소극적이고 제한적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긍정형이고 적극적이며 개방되어 있습니다. 그 의미가 확대되어 있습니다.


  7,6절의 해석은 정말 어렵습니다. 무엇인가 옳고 그른 분별을 정확하게 하여 거룩하고 진주 같은 보물을 굳게 지키라는 말씀입니다. 개와 돼지가 무엇을 뜻하는지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거룩한 것, 진주가 복음말씀을 뜻한다는 설명도 있고 하느님 나라를 지칭한다는 뜻도 있습니다.  


  한편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 즉 디다케 9,5절에서는 이 대목이 성체성사를 외교인들에게 베풀지 말라는 것으로 해석되어 있습니다. 미사 전례 중에 사제의 축성으로 우리가 봉헌한 밀떡이 예수님의 몸으로 성변화 되는 것이 상징이 아니라 실체변화라고 믿는 사람들에게만 영성체 하도록 허용하라는 말입니다. 그 성체를 실체이신 ‘예수님의 몸’이라고 고백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거룩하신 주님의 몸을 내 주지 말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세계는 종교 다원주의 사상이 몰려와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종교다원주의를 명확하게 분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이 세상에서 활동하고 있는 여러 가지 종교가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우리 신앙이 옳다는 것을 주장하려면 그들의 주장도 들어 보아야합니다. 그들의 신앙을 부정만 할 수는 없습니다. 모든 종교가 평화 공존하기 위해서 그들의 신앙원리와 수행 방법을 인정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신조를 훼손하여 가면서까지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서는 안 됩니다. 만약에 우리 신앙이 흔들릴 염려가 있다면 단호히 배격해야 합니다.


  갈라진 형제들인 프로테스탄트들이 성체성사를 상징이라고 여긴다면 성찬례에 참여하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됩니다. 또 정신을 수련하기 위해 힌두교의 요가나 불교의 참선하는 방법을 배우더라도 우리 신앙을 퇴색시키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삼위일체를 부정하며 이단 교리을 주장하는 교파와 뉴에이지 운동처럼 양의 탈을 쓴 이리떼에게는 눈길도 돌리지 말아야 합니다. 그들은 교묘하게 접근하여 약한 신앙을 지닌 교우들을 노리고 있습니다. 또 종교 혼합주의는 철저히 배격해야 합니다. 종교 다원주의와 달리 종교 혼합주의는 아예 그 출발이 다른 것입니다. 이것도 옳고 저것도 옳은 것 같으니 신앙으로 받아들이자는 주장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때 우리가 따라야할 판단의 기준은 교도권의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비록 자기 생각이 옳은 것이라 여겨지더라도 교도권이 허용하지 않는다면 침묵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언젠가는 주님께서 밝게 이끄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가르침은 두 갈래 길에서 어떤 방향을 택할지 기로에 섰을 때 자기에게 유리하고 편한 길을 택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매 순간 선택을 해야만 합니다. 미사 참례를 할 것인지 사업상 중요한 일을 처리해야 하는지, 헌금을 얼마나 해야 옳은지, 내 주장을 밝혀야 하는지 참아야 하는지, 내 이익을 쫓아야 하는지 아니면 공동체의 유익을 따라야하는지 등등 그야 말로 수만 가지 기로에 섭니다.


  그럴 때 선택의 기준이 자신의 이익에 있지 않고 타인과 공동체의 유익에 있다는 말입니다. 자신을 버리라는 요청입니다. 자신을 버리기 어렵기 때문에 그 길을 선택하는 사람이 적다는 것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저를 포함한 대부분 사람들이 우선 자신을 지키려고 애씁니다. 자신을 희생하고 고통을 견디는 길을 힘들다는 이유로 포기하게 됩니다. 남들도 다 그렇게 하는데  굳이 나만 유별나게 굴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넓은 길은 다른 많은 사람들이 즐겨 가는 길을 말합니다. 나만이 걸을 수 있는 길은 외롭고 두려워 쉽게 포기합니다. “그래 네가 얼마나 잘하나 두고 보자.”는 비아냥거림이 두려워 옳은 길인 줄 알면서도 타협해 버리고 맙니다.


  넓은 길은 유혹입니다. 자신만의 삶을 자유로 선택하여 살지 못하고 방치하는 것입니다. 참삶살이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삶을 버리는 것입니다. 탈무드에 우리가 하느님 앞에 섰을 때 질문 받는 것이 얼마나 자기 삶에 충실 했느냐는 것이라고 합니다. 남의 삶을 대신 사는 것이 아니라 자기 고유한 소명을 충실히 살았는지 질문 받는다고 합니다.


  좁은 길은 죽음을 각오하는 길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대로 제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길입니다. 그 길이 생명의 길이라는 주님의 말씀과 인격을 믿고 따르는 길입니다.

 

  죽음을 정직하게 바라다보는 사람만이 인간이 누구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신 우리 주 예수님은 우리에게 죽음을 정면으로 직시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죽음이 허무와 공허로 들어가는 문이 아니라 생명으로 들어가는 입구라고 보여 주셨습니다.

  그 죽음의 순간에 모든 인간들은 마지막 선택을 하여야 합니다. 그 때 주님의 길을 선택할 수 있도록 올바른 방향으로 길이 난 삶을 따라 걸어야 합니다. 그 길이 마치 좁은 길처럼 여겨지지만 결코 험하고 좁은 길이 아님을 우리는 압니다. 오히려 그 길이 주님께서 함께 걸어주시기에 쉽고 힘이 덜 드는 길입니다. 아는 사람만 아는 비밀입니다.


Recorded 1957



1. Allegro non troppo e molto maestoso(20'44)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