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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7월 1일 야곱의 우물- 루카 9, 51-62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7-07-01 조회수611 추천수9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 그래서 당신에 앞서 심부름꾼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길을 떠나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갔다. 그러나 사마리아인들은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분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야고보와 요한 제자가 그것을 보고,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그리하여 그들은 다른 마을로 갔다. 그들이 길을 가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예수님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그러나 그는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하고 말씀하셨다.

 또 다른 사람이 “주님, 저는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먼저 가족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루카 9,51-­62)

 

루카 복음사가는 ‘구원의 길’을 묘사하되 복음서에서는 예수님의 길을, 두 번째 책인 사도행전에서는 ‘교회의 길’을 보여줍니다. 오늘 예수님은 갈릴래아에서 활동을 마치고 드디어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시작합니다. 예루살렘은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의 도착점으로 수난·부활·승천을 통한 당신의 사명을 마친 곳입니다. 동시에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사명을 이어 세상 끝까지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의 길’의 시작점이요, ‘구원의 길’을 이루는 중심지입니다.

 전반부 갈릴래아 활동기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데서 절정을 이룹니다만(9,20) 예수께서는 수난이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가야 할 때를 감지하십니다. 비록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제자들에게 당신의 수난과 부활을 두 번 예고하신 후 예루살렘으로 올라갈 마음을 굳힙니다. 겪어내야만 하는 수난이지만 그 뒤에는 영광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루카는 예루살렘 여정을 시작하며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9,51)라고 합니다.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가는 중에 여러 일이 일어납니다. 이 일들은 곧 제자들을 가르치는 교육 현장이 되기도 하지요. 먼저 오늘 예수님의 일행은 예루살렘으로 가기 위해 사마리아를 통과해야 합니다. 아시다시피 사마리아인들과 유다인들은 서로 반목하는 관계이기도 하고, 또 예수님의 일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기에 예수님의 일행을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이에 대한 제자들의 대응을 보면 아직도 스승님을 이해하지 못함을 알 수 있습니다.

 천둥의 아들이라고 불리는 야고보와 요한이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하고 마치 그럴 힘이 자신들에게 있기라도 하듯 묻습니다.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잘해 주고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에게 축복하며, 너희를 학대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루카 6,28)는 말씀을 체화하지 못하고 ‘이에는 이로, 눈에는 눈으로’ 갚는 옛 삶의 범주에서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습니다.

 갈라티아서는 말합니다.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을 위한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5,13) “육의 행실은 자명합니다. 그것은 곧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격분`… 그 밖에 이와 비슷한 것들입니다.”(5,20)
힘의 과시는 열등감을 감추기 위한 방어책이기도 합니다. 성령 안에서 자유롭고 굳건히 서 있는 자는 오히려 온유합니다. 그는 다른 사람을 지배하거나 통제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땅을 차지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힘의 무기를 이용하고자 하나, 스승은 ‘온유한 사랑’의 무기를 쓰십니다. 그러나 이 무기의 힘을 믿지 못하는 것은 교회 역사 안에서도 그리고 아프리카 곳곳에서도,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이라크에서도, 팔레스타인에서도, 우리 마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끝없이 반복되고 있는 보복의 불, 이 불은 하늘에서 불러와야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꺼야 할 불입니다. 미운 너 대신 내가 죽는, 힘없는 무기를 사용하는 그 어려운 방법으로만 꺼지는 불입니다.

 예수께서는 ‘불을 지르러’(루카 12,49) 오셨습니다. 그러나 그 불은 보복의 불이 아니라 성령의 불입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불꽃’(사도 2,3)은 서로 다른 언어권에서도 알아듣는 일치의 불이요, 화해와 사랑의 불임을 그들은 나중에야 알았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 가르치신 대로 발에 먼지를 털고 그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 고을을 떠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것만은 알아두라고 이르셨겠지요(루카 10,10-­11).

 그 사마리아가 이후 사도들이 예루살렘을 떠나 복음을 전파할 때 제일 먼저 복음화의 대상이 될 것(사도 1,8; 8,25)임을 사도들도 그때는 미처 몰랐겠지요.
예수님을 따라가는 여정은 이렇듯 보금자리는커녕 ‘머리 기댈 곳조차 없는’ 나그네 여정입니다. 성령의 바람이 어디로 부는지 민감하게 주파수를 맞추어야 하는 삶이기도 합니다. 이 땅에 먼저 하느님 나라와 그 의를 전하는 것이 그토록 급하고 중요하기에 아버지의 장례도, 가족들에게 하는 작별 인사도 뒤로해야 합니다.

 엘리야의 부르심을 받은 엘리사가 결코 뒤돌아보지 않기 위해 부리던 겨릿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워먹고는 엘리야를 따라나섰듯 단호한 마음으로 따라야 한다고 하십니다. ‘누구든지 하느님의 나라 때문에 집이나 아내,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사람은 현세에서 여러 곱절로 되받을 것이고 내세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받을 것’(루카 18,29-­30)이며, 이제 그들의 가족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실행하는 사람들’(루카 8,21)로 구성될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까지도 버려야 할 힘든 고비가 있습니다. ‘자기 자신마저 버리는’(루카 9,23) 일입니다. 그러니 이 철저한 추종의 삶을 어찌 쉽게 시작할 수 있겠습니까? 탑을 세울 때 공사를 마칠 만한 경비가 있는지 먼저 계산해 보고 일을 시작하듯(루카 14,28) 예수님을 따르는 삶의 무게, 천상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이 만만치 않음을 잘 생각하고 선택해야 합니다. 안이한 마음으로 선택하여 현세의 안전에 둥지를 틀고 살고 있다면 이름만 그리스도인이지 사실은 죽은 자의 삶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선불교 조주선사는 제자의 장례 행렬에 참가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수많은 죽은 사람이 단 하나의 산 사람을 쫓아가는군.”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루카 9,60)
나는 죽은 자입니까, 살아 있는 자입니까?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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