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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주님의 길은 인간의 생각과 다릅니다.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7-01 조회수772 추천수8 반대(0) 신고

 

 

 

<주님의 길은 인간의 생각과 다릅니다.>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불러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그들을 꾸짖으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다른 사람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루카 9,51-62)

 

 

  저는 오늘복음 말씀을 읽을 때마다 속이 답답해져 옵니다. 그동안 우리들이 아무 의심 없이 살아왔던 방법과 전혀 다르게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대목에서 큰 저항 없이 술술 넘어간다면 제대로 묵상한 것이 아닐 겁니다. 도저히 단번에 넘을 수 없는 벽을 느끼고 묵상해야 제대로 접근하는 것입니다.

 

  인간이 이성과 역사적 연구를 통하여 주님의 복음말씀을 해석하려는 시도를 바로 100여 년 전 프로테스탄트 신학자들이 시작했습니다. 데카르트 이후 인간의 이성적 사고에 의해 우주와 대상을 해석하려는 시대정신이 대두되었습니다. 또 루터의 종교항의(*저는 ‘종교개혁’이라는 용어가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프로테스탄트란 뜻은 ‘항의하다’입니다)는 성서를 인간이성의 눈으로 연구하게 만들었습니다. 그중에 한 줄기가 역사-비평적인 시도입니다. 그 연구 덕분에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성서에 대해 객관적인 지식을 쌓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 평신도인 우리들은 아마도 교부시대 어느 학자보다 예수님 시대에 생겨났던 역사적 지리적 사건을 더 잘 알지도 모릅니다. 그만큼 다양하고 깊이 있는 연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인간적 주장은 곧 한계에 부딪치고 말았습니다. 인간 지성과 감각 그리고 과학적 판단으로 접근하여 이해가 되는 것만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를 대학교 윤리교사쯤으로 바라보게 되었습니다. 인간이 걸어야할 도덕적 가치와 공동체를 유지하기위해 복음을 말하시는 스승쯤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복음서에서 나타나는 기적과 치유은사를 색안경을 끼고 해석합니다. 실제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가르침을 주기 위해 윤색한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특히 빵을 많게 하는 기적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감동받은 군중들이 각자 들고 온 빵을 자발적으로 내어 놓은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성체성사의 예형으로 받아들여야 하는데, 성체성사를 상징이라고 해석하고 신비를 인정하지 않다보니 그런 결과가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조금 낫지만 칼 바르트나 루돌프 불트만 같은 프로테스탄트 대학자들도 비슷하게 말합니다. 예수님께 성령이 실제로 활동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제는 그 활동이 멈추었다고 말합니다. 이른바 모든 기적을 상징이요 신화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주장을 모두 버릴 수는 없지만 보다 정확하게 살펴보아야 합니다. 역사-비평적인 방법을 채택하되 교부들의 가르침에 따라야 합니다.

 

  그들이 연구해낸 역사적 실존 인물인 ‘역사의 예수’와 믿음의 고백에서 나온 ‘믿음의 그리스도’ 사이가 넘을 수 없는 심연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포이엘 바하 같은 이는 결과적으로 무신론자들을 양산하는 우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20세기의 성자 슈바이처박사는 뛰어난 성서학자이었는데 결국 성서 연구를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립니다. 그의 길을 포기하고 神을 향해 또 다른 길을 모색하기 위하여 아프리카로 들어간 것입니다.

 

  다행이 우리 가톨릭 신앙의 스승들은 처음부터 인간에게 지성과 감각을 넘어서는 영성적인 면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교부들의 가르침을 견지 해 왔습니다. 안토니오 성인을 비롯한 사막의 교부들로부터 수도원 규칙을 세운 성 베네딕트의 가르침도 언제나 관상을 강조했습니다. 그 외에도 “무지의 구름”을 지은 익명의 저자를 비롯하여 엑카르트, 십자가의 성 요한, 대 테레사 등등 성인들께서 지켜온 ‘신비 영성’이 언제나 가톨릭 정신의 근본을 지켜 주었습니다.

 

  흔히 처음 가톨릭교회에 들어오신 분들은 성령에 대한 강조가 개신교 측보다 뒤떨어지는 줄로 아나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감정이 앞서는 것이 성령은 아닙니다. 가톨릭은 ‘신비 영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신비 영성’은 가톨릭이 그 뿌리가 더 깊고, 역사적으로 한 번도 중단 된 적이 없습니다. 七聖事와 성모님 신앙을 예로 들면 그것은 신비라고 여기고 믿음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상징이 아닙니다. 신화가 아닙니다.

 

  가톨릭은 처음부터 역사의 예수와 믿음의 그리스도 사이에 갭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오직 성서’ ‘오직 믿음’, ‘오직 은총’이라며 교부들의 가르침을 차단한 프로테스탄트와 달리 성경 말씀과 성전을 함께 보존해 왔기 때문입니다. 저는 가톨릭이 지켜온 영성이 더 본래적이라고 말씀드립니다. 정도를 지키고 있다고 말씀드립니다.

 

  오늘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좁은 인간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바라보라는 가르침을 주신 것입니다.

 

  먼저 9,57절에서 어느 사람이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라고 했을 때 예수님께서는 오히려 부정적인 답을 하십니다. 그러나 9,59절에서 다른 사람에게는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습니다.

  죽은 이를 장사지내고 가족들 생각에 매어 즉시 따르지 못하는 핑계를 대는 사람에게는 아예 그 핑계를 더 이상 꺼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는 충격요법을 쓰시는 것입니다. 쉽게 따르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어렵다고 말씀하시고, 핑계를 대며 발을 빼려고 하는 사람에게는 위기감을 불러일으키시는 것입니다.

 

  근본주의자들처럼 성경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드려서는 스스로 한계를 지으며 올가미를 씌우는 꼴입니다. 진짜로 아버지 장례식에 참여하는 것을 막으셨고, 부모 형제에게 작별 인사하는 것을 막으셨다고 주장하기보다 교부들이 어떻게 해석 하셨는지 살펴보는 것이 올바른 자세입니다.

 

  교부들은 ‘렉치오 디비나’의 방법을 통해 성경을 읽고 묵상하며 기도하며 언제나 현재화하여, 자신에게 지금 말씀하시는 것으로 적용하였습니다. 그 결과 관상의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주님과 일치하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 목표이었습니다. 성경을 관상하는 방법을 통해 인간 영성적이고 심리적인 면까지 살펴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방법이 더 영성적인 것입니다. 광적으로 흥분하여 남이 해석한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이 묵상해 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남이 묵상한 것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자기 처지에 반드시 대입해서 살아 있는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고 관상을 통해 주님말씀과 일치 하는 것입니다.

 

  어쩌면 모든 사람들이 조금씩 다르게 관상할 것 아닌가 하고 생각하시겠죠? 예 일면 맞기도 하고 그르기도 합니다. 부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길이 어디 한 가지 길만 있겠습니까? 하지만 목적지에 이른 뒤에는 모두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고 목적이 좋으면 수단은 어때도 된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정도가 아닌 것은 배격하여야 합니다. 정도는 바로 여러 신앙의 교부들이 걸으셨던 길입니다. 우리도 그 길을 겸손 된 마음으로 따라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 안에 살면서 그것을 초월하는 그 어떤 것이 있다는 사실을 자주 잊고 삽니다. 모든 것을 감각과 이성으로만 판단하려는 우를 범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 있다.”라는 말씀이 깊은 영성에까지 미치지 못하기에 그저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으니 맞겠지하고 받아들일 뿐입니다.

 

“진실한 예배자들이 영과 진리 안에서 아버지께 예배를 드릴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4,23)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요한 5,25)

 

  이 말씀을 제대로 받아들였다면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지금이라는 시공간이 우리가 생각하는 시공간과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고 새로운 시각이 열리게 됩니다.

 

  오늘복음 말씀도 이와 같은 예수님의 시각을 읽을 수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의 잣대를 들이대며 역사와 윤리 운운한다면 그는 더 이상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신앙인이 아닙니다. 쉽지 않겠지만 우리는 예수님의 시각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고 판단하려는 자세를 지켜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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