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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성령에 인도에 따른 삶" --- 2007.7.1 연중 제13주일(교항주일)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07-07-01 조회수630 추천수5 반대(0) 신고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7.7.1 연중 제13주일(교항주일) 
                                                          
열왕 상19,16ㄴ.19-21 갈라5,1.13-18 루가9,51-62

 
                                                      
 
 
"성령에 인도에 따른 삶"
 


삶은 흐름이자 과정입니다.
끊임없이 흘러가는 인생입니다.

흐르는 구름,
흐르는 바람,
흐르는 강물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아득히 길게 난 길에 마음이 설레는 것은
생명은 흐름이기 때문입니다.
 
이래서들 어디서나 여행객들이 득실득실한 겁니다.

얼마 전,
치열하게 살아가는 두 예술가의 글이 인상 깊었습니다.

“예술가에게 집 가(家)자를 붙이는 건 적당하지 않다고요.
  예술가는 끊임없이 자신의 집을 벗어나야 해요.
  애벌레가 고치 속에 갇혀 있는 한
  결코 비상할 수 없으니까요.
  예술가는 끊임없이
  자기를 부수기 위해 출가(出家)해야 해요.”

그대로 부단히 하느님을 찾는 수도승은 물론
구도자적 삶을 추구하는 모든 이들에게 공감이 가는 고백입니다.
 
이어 어느 시인의 ‘집시가 되어’ 라는 시의 일부입니다.

“나는 누구를 동경하거나
  피를 나눈 제 새끼를 기르며
  옹기종기 살아가는 문약한
  정주의 족속이 아니다.
 
  날마다 길을 떠나는 집시
  ...
 
  화적 떼의 아내이거나
  하다못해 혈혈단신 화전민이다.
  ...
 
  나는 새로이 망명길을 떠난다.”

정주의 영성을 살아가는 우리 분도회 수도승들에겐
신선한 충격이자 도전이 되는 글입니다.
 
정주와 떠남의 역설을
어떻게 조화사킬 것인가 하는 것이 화두입니다.
 
정주의 삶이 웅덩이에 고인 썩은 물 같은 안주의 삶이 되지 않고
끊임없이 하느님 향해 맑게 흐르는 삶이 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이 시대의 큰 스승이신
김수환 추기경님의 문답 내용도 재미있습니다.

 -연세 많은 분들이 자주 ‘내가 어서 죽어야지’라고 말하는데
  그게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그런 거짓말 한 적이 있으신지요?-

“매일 한다.
  나이가 85살이다.
  내일 죽는다고 해서 빨리 죽었다고 얘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요즘은 사람들이 ‘건강하게’라는 말은 빼고
 ‘오래 사십시오.’라고 인사하는데,
  장수가 육체적으로 얼마나 고달픈지 모르고 하는 인사 같다.
  요즘은 대학입시를 앞둔 수험생 심정이다.”

역시 끊임없이 하느님 향해 흐르다가
마침내 하느님 목적지에 거의 도달한 분의
진솔한 고백이 마음에 와 닿습니다.
 

보금자리 우리 안에 안주의 삶을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안주의 보금자리로부터 불러내는 주님이십니다.

‘엘리야는 길을 가다가 사팟의 아들 엘리사를 만났다...
  그 때 엘리야가 엘리사 곁을 지나  가면서
  자기 겉옷을 그에게 걸쳐 주었다.’

나름대로 보금자리 품에서 농사지으며 살아가는 엘리사를
길로 끌어내는 엘리야입니다.
 
지체 없이 엘리야를 따라 나서는 엘리사를 볼 때,
그 마음은 하느님을 향해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음이 분명합니다.
 
마침내 겨릿소를 잡아 제물로 바치고
쟁기를 부수어 그것으로 고기를 구운 다음
사람들에게 주어서 먹게 한 후
일어나 미련 없이 엘리야를 따라나서서
그의 시중을 드는 엘리사입니다.

과거와의 철저한 단절을 상징합니다.
비로소 진짜 제자리를 찾은 엘리사입니다.

눈에 보이는 보금자리 품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란 제자리,
우리에게는 ‘그리스도 안’이라는 제자리입니다.

바로 화답송 후렴이
하느님이 우리의 진정한 정주처(定住處)임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주님, 주님은 제가 받을 몫(유산)이옵니다.”

이게 바로 정주의 진정한 의미입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 역시
예루살렘으로 길을 가시다가
만난 세 구도자들에게 던진 말씀도 의미심장합니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비단 예수님뿐 아니라 진정 구도자라면
이 세상 어디에도 보금자리가 있을 수 없습니다.

끊임없이 흐르는 삶이요,
진짜 보금자리 품은 오직 하나 하느님뿐입니다.
 
사실 인생을 조금 깊이 들여다보면 누구나 공감하는 진리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 어리석어 눈에 보이는 보금자리 집이
영원한 보금자리인양 착각하고 지낼 뿐입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너는 가서 하느님의 나라를 알려라”

살아 있다하나 실상 영혼은 죽어가는
안주의 삶을 살아가는 이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생명은 흐름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위해 부단히 깨어 노력하는 자가
진정 살아있는 이들입니다.
 
늘 맑게 흐르는 강 같은 삶입니다.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한결같이 과거의 집착에서 이탈을 촉구하는 말씀입니다.

이래야 비로소 하느님을 찾는 자유로운 여정입니다.
 
이해는 가지만 문자 그대로 모두를 버리고
주님을 따라나서는 것이라면
현실적으로는 아주 힘들어 보입니다.
 
모두가 사도가, 수도자가 될 수는 없는 법입니다.

정신을 살면 됩니다.
이탈과 초연의 영성입니다.

밖으로는 정주의 산으로,
안으로는 끊임없이 흐르는 내적 여정의 강으로 살자는 것입니다.
 
바로 저희 베네딕도회 수도자들이 그렇게 삽니다.
 
하느님 안에, 공동체 안에 머물러 정주의 삶을 살지만
안으로는 끊임없이 하느님 향해 흘러갑니다.
 
흘러가는 물소리가 바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찬미와 감사의 시편기도노래입니다.

눈에 보이는 보금자리 집을 떠나지 않고도
끊임없이 출가할 수 있는 길이 바로 내적 여정의 자유로운 삶입니다.
 
바로 고맙게도
2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이런 삶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다만 그 자유를 육을 위한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사랑으로 섬기십시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셔서
우리는 죄와 율법, 죽음으로부터 자유롭게 됐습니다.
 
우리의 내적 여정, 바로 자유의 여정입니다.
 
그러나 자유 자체가 궁극 목표도 아니고
방종의 이기적 자유도 절대 아닙니다.
 
사랑으로 섬기는 자유, 이게 진정 자유의 궁극 목적입니다.
참 자유인가를 판가름하는 시금석입니다.

사랑으로 서로 섬길 때 진정 자유로운 삶입니다.

하느님 향해 끊임없이 흐르는 이탈의 삶을 살 때 가능합니다.
 
어디에서나 마음만 먹으면 살 수 있는 성인의 길입니다.
 
예수님의 사도들 되지 않고,
수도자 안 되어도 살 수 있는 길입니다.
 
바로 성령의 인도 따라 살 때 비로소 가능한 길입니다.

“성령의 인도에 따라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육의 욕망을 채우지 않을 것입니다....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지금 여기 내 자리에서
끊임없이 육의 욕망에 따른
이기적 삶,
안주의 삶,
노예적 삶으로부터
성령에 인도에 따른
영적 삶,
이탈의 삶,
자유의 삶으로 부르시는 주님이십니다.
 
바로 이 은혜로운 성체성사의 주님께서
성령의 인도에 따라 이탈의 자유로운 삶을 살도록 해주십니다.

“주님, 말씀하소서. 주님 종이 듣고 있나이다.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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