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다르되 하나인 예수님의 유머.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7-02 조회수682 추천수10 반대(0) 신고
 
 
 
 

<다르되 하나인 예수님의 유머>


한 율법 학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그러자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하고 말씀하셨다. (마태 8,18-22)


  

  예수님을 따르는 길은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 길을 따르려고 마음먹은 사람들은 모두 제 각각입니다. 어떤 마음 자세를 가지고 그 길을 나서야 하는지 주님께서는 알맞게 이끌어 주십니다. 과연 이런 경우 우리들은 어떻게 대답하는지요. 아마도 획일적으로 무조건 나를 따르라고 하지 않을까요? 상대방을 이해하기도 전에 자신의 방법을 들이대려 덤비겠지요.


  그럼에도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가르침에는 본질을 꿰뚫는 하나의 심지가 숨어 있습니다. 그것을 바라보라는 것이 오늘 복음 말씀의 진수입니다.


  다르되 하나인 예수님의 유머를 알아채라고 복음서저자들은 이 대목을 한 곳에 배치하였습니다. 루카복음 9.57-62와 마태오복음 8,18-22는 병행구절인데 ‘어록(Quelle. 예수님의 말씀을 기록했을 것으로 보이는 가상의 책)’에서 채록하여 전해줍니다. 그러니 우리는 이 두 대목을 한꺼번에 놓고 묵상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입니다.


  마태오 저자는 두 사람을 예로 듭니다. 율법학자와 제자라고 말하며 명백하게 대조해서 적었습니다.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시는데, 어디서 갑자기 율법학자가 나타나서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합니다. 그것도 ‘어디로 가시든지’라고 외람되게 말합니다. 율법학자 특유의 성격이 나타납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확신과 신념이 드러납니다. 기특하기도 하나 어찌 보면 교만한 인간을 대표하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는 예수님께서 호수 건너편으로, 즉 피안(彼岸)으로 떠나가라는 명령을 내렸는데도 불구하고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겉으로 말을 내뱉지는 않았지만 그는 아버지의 장례를 핑계로 차안(此岸)에 주저앉을 궁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잡생각이 많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은 어느 쪽인가요? 율법학자의 모습인지 아니면 어떤 제자의 모습인지요. 아니면 이도저도 아닌지요.


  루카 저자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나를 따라라.” 는 명령을 직접 적고 있으며, 또 다른 제자를 등장시켜 머뭇거리는 것이 핑계라고 확실하게 보여 줍니다. 그 제자는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라고 토를 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쟁기에 손을 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느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라고 가르침을 주십니다.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이 두 말씀은 정말 인간들이 쉽게 이해할 수 없는 하나의 유머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지금의 우리도 저항감이 느껴지는데, 예수님께 직접 이 말씀을 들었을 그 당시 주위에 있던 제자들과 군중들은 모두 깜짝 놀랐을 겁니다. 속으로 ‘아니 저런 분이 다 있어?’하고 생각했을 겁니다.


  유머는 역설입니다. 대상을 한 번 뒤집어 바라다보게 만드는 방편입니다. 그저 말장난이 아니라 평범함을 통한 비범함입니다. 촌철살인하며 살아 뛰는 말입니다. 언어의 한계를 넘어서는 지평을 가리켜 보일 때 쓰이는 도구입니다. 한편 알아들었으면 과감히 던져 버릴 줄도 알아야하는 웃음입니다.


  하느님나라는 인간의 이성으로 판단할 수 없는 그 무엇입니다. 이를 두고 합리를 초월한 것이라는 의미에서 ‘비-합리(非-合理)’라는 용어를 씁니다. 세상은 우리 인간의 인지를 넘어서는 세계가 들어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알아채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세계는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을 포함하면서도 초월하는 더 큰 세계입니다. 이른바 칼 라너가 말하는 '내재적 초월'이라는 의미입니다. 이것을 두고 인간이 소우주라는 말로 한의학에서는 표현하고 있습니다. 인간 안에 우주가 담겨있다는 말입니다. 두 표현이 정확하게 일치한다고는 볼 수 없지만 큰 줄거리는 일맥상통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죽음을 직시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받아들입니다. 그것을 모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실은 우리 모두 죽음을 외면하고자 합니다. 마치 자신은 죽지 않을 것처럼 평생 살 수 있는 것처럼 죽음을 외면합니다. 그리고서 그 죽음에 직면해서는 오히려 두려워합니다. 지성은 이해 했으나 심리적으로 영적으로는 죽음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받아들이지 못한 것입니다.


  특히 가족들의 죽음에 직면해서는 충격으로 다가와 죽음에 걸려 넘어지게 됩니다. 이별의 슬픔을 넘어서 공포를 통해 인간을 지배하려는 죽음의 세력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조금 있으면 너희는 나를 더 이상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다시 조금 더 있으면 나를 보게 될 것이다. 너희가 근심하겠지만, 그러나 너희의 근심은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이 말을 한 이유는, 너희가 내 안에서 평화를 얻게 하려는 것이다.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16-33)

“그분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산 이들의 하느님이시다. 사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살아 있는 것이다.”(루카 20,38)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죽음을 넘어서는 새 생명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는 모든 사람이 죽어도 살아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14)


  이 말씀도 죽음을 직시하라는 말씀입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을 맞으시되 당당히 이겨내시는 모습을 통해 죽음의 실상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보여 주신 것입니다. 주님께서 걸으신 길을 따르는 자에게는 죽음이 더 이상 두려운 실제가 아닙니다. 죽음의 공포로 옴짝달싹 못하고 주저앉는 어리석음을 떨쳐 버리고 분연히 일어나 생명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이 세상에 숨 쉬고 살아 있는 동안에는 이 세상에 알맞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죽은 자처럼 살지 말라는 말씀이 바로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에게’라는 말씀의 본뜻입니다. 산 이는 산 사람답게 살라는 것입니다. 영원히 그렇게 하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하여 인간들에게 한없는 위로와 사랑을 보여주고 계십니다.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며 슬픔에 빠져 있는 제자를 등 두드리며 껴안아 주고 계신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을 굽어 살펴 주시는 주님의 속 깊은 충정을 직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사람이 머리 기댈 곳조차 없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더 이상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 유머를 통해서도 우리는 배워야 할 것이 있습니다. 생명을 열심히 살고 나머지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다 알아서 해주실 것이라는 믿음마저 배워야 할 것입니다.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