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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느님과 흥정하는 아브라함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7-07-02 조회수804 추천수12 반대(0) 신고

18장의 후반부, 16-33절은 소돔의 멸망이 예고되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 안에서 가장 주목해볼 부분은, 아브라함의 태도입니다.

즉 하느님께서 멸망시키기로 결정한 도시를 위해 혼신을 다해 중재하고 있는 그의 모습입니다.

 ....................

 아브라함을 방문하여 이사악의 탄생 소식을 알려 주었던 사람들이 길을 떠나려고 하자,

아브라함은 배웅을 하겠다고 길을 나섭니다.

그들이 소돔이 내려다 보이는 곳에 이르렀을 때,

주님께서는 당신이 장차 하려는 일을 아브라함에게 알려야겠다고 결심하십니다.

아브라함을 당신의 충실한 종이요 친구로 삼으셨기 때문에 당신의 계획을 알려주시기로 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계획이란 바로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그 도시의 주민들이 저지르는 범죄는 목불인견이었습니다.

(그 죄악상은 다음 장에서 나옵니다)

 

하느님의 정의가 땅에 떨어지고, 땅에 떨어진 정의가 부르짖는 원성은 그분의 귀에까지 들릴 정도로 컸습니다.

 (아벨의 피도 땅에서 울부짖는다는 표현과 비슷하지요?)

 

하느님은 그 죄악상을 직접 확인하러 두명의 특사를 내려보냅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과 둘만 남게 되자,

그 도시들을 구하기 위해 중재자로 나섭니다.

 

"혹시 그 성읍 안에 의인이 쉰 명 있다면,  그래도 쓸어 버리시겟습니까?"

"내가 의인 쉰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 

'의인 오십명 정도야 있겠지'하는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대답에 식겁했습니다.^^

 

당연히 오십명 정도는 있을거라 생각해서, 아브라함은 두번씩이나 그 말을 되풀이하며,

"의인을 죄인과 함께 죽이시어 의인이나 죄인이나 똑같이 되게 하시는 것,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두번 반복)

온 세상의 심판자께서 공정을 실천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하고

자신만만하게 하느님께 설교를 했던 것입니다.

 

오십명이 없다는 말에 당황한 아브라함은 납작 엎드리며 다시 묻습니다.

"저는 비록 먼지와 재에 지나지 않는 몸이지만,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혹시 의인 쉰 명에서 다섯이 모자란다면, 그 다섯 명 때문에 온 성읍을 파멸시키시렵니까?"

(아직도 약간 기가 살은 모습입니다.)

"내가 그곳에서 마흔 다섯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파멸시키지 않겠다."

 

"혹시 그곳에서 마흔 명을 찾을 수 있다면...?"(말끝이 흐려집니다.)

"그 마흔 명을 보아서 내가 그 일을 실행하지 않겠다."

 

아브라함은 침이 바빡바짝 말랐을 것입니다.

마음이 조급해진 아브라함은 더 많이 깎아봐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장사꾼처럼 흥정을 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서른 명을 찾을 수 있다면...?"

"서른 명을 찾을 수 있다면 그 일을 실행하지 않겠다."

 

아브라함은 얻어터질 각오를 하며 하느님께 바싹 다가갑니다.

"감히 아룁니다. 혹시 그곳에서 스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목소리가 기어들어갑니다 )

"그 스무 명을 보아서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이제 마지막입니다. 젖 먹던 힘을 다 짜내어 말씀드리는 아브라함.

"제가 다시 한번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열명을 찾을 수 있다면...?" (완전 꼬리 내립니다)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모기소리 만하게, 말끝을 흐리던 아브라함의 간청은 거기에서 끝이 나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의 용기도 없었거니와 아브라함 자신도 너무나 실망했기 때문입니다.

 

그보다 사실 열 명은 단체교섭을 이룰 수 있는 최소한의 단위였던 것입니다.

그 아래로는 개인에 불과합니다.

 

열 명!

의롭게 살아가는 가정, 둘 셋만 있어도 성립되는 숫자였지만

그 수가 없어서 소돔과 고모라는 멸망을 당하게 된 것입니다.

 

...........

 

이 이야기에서 성경 저자는(바빌론 유배 시대의 저자, 또는 그 이후의 최종 편집자로 추정)

일차적으로 의인 열 명도 없는 소돔의 멸망은 정당했었다는 것을 밝히는 것입니다.

또 이차적으로 (이것이 더 중요한 이유가 되겠지만),

바빌론 유배를 와 있는 자기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유배가 정당했다는 것을 알리고자 합니다.

 

바빌론에 유배를 와 있던 백성들은 당시에 큰 의혹 속에 빠져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백성으로 선택된 자기 나라가 어떻게 그런 엄청난 수난을 겪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에 성경 저자는 대답합니다.

예루살렘이 파괴되고 하느님의 백성이 남의 나라에 포로로 와 있는 것은 

그동안 하느님의 백성답지 않게 살았던 결과요,

하느님의 정의를 제대로 실현하지 못했던 죄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그동안 예언자들도 수차례 외쳤던 말입니다.

 

그 다음 그들이 품고 있던 의문이 또 있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한 사람의 죄가 전체의 멸망을 가져올 수 있다는 사상을 갖고 있었습니다.

(아담의 범죄가  온 인류에 미친다는 사상을 상기하십시오)

물론 그럴만한 사람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니라, 민족 공동에 큰 영향을 끼칠 인물입니다.

부족장이나 왕처럼 백성을 대표할 수 있는 인물이지요.

(오늘날도 대통령을 잘 뽑는 것이 그나라 국운에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아시잖습니까? ^^) 

 

암튼 이런 사상을 가지고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민족 공동의 멸망을 가져온 이 결과가 과연 정당했느냐 하는 의문을 가졌던 것입니다.

즉 그 안에는 옳게 살았던 평민 출신의 의인들이 과연 없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성경 저자는 소돔의 이야기를 통해 답합니다.

아브라함이 끈질기게 중재하고 간청했어도 소돔에는 열 명의 의인이 없었듯이,

바빌론 유배를 온 자신들을 구출해줄 소수의 의인들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느님은 결코 의인들을 악인들과 함께 멸망시키지 않으시는 분임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인 한 사람, 한 사람에 대한 개별적인 구원은 사실 따로 있습니다.

바로 다음 이야기(19장)에서 그 구체적인 실례가 소개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눈여겨 보아야할 사상의 발전이 있습니다.

즉 소수의 의인 때문에 죄지은 집단이 심판에서 구원될 수 있다는 사상입니다.

 

과거에는 멸망의 연대성이라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면,

아브라함의 간청에서 나타나는 바는, 구원의 연대성이라는 새로운 방향입니다. 

(인류를 대표할 한 명의 의인, 바로 그분으로 인해 온 인류가 구원된다는 사상은 바빌론 유배의 쓰라림을 통해

이렇게 서서히 잉태되고 있었습니다. 이는 욥기, 제2 제3 이사야와 맥락을 같이 하는 사상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의 정성스러운 중재가 단연 돋보이는 것입니다.

자기가 중재하는 사람들이 비록 죄가 많아 멸망당해야 마땅한 인간들이라 할지라도,

그들을 위해 간절하게, 끈질기게, 사력을 다해, 간구하는 아브라함의 중재자로서의 모습이야말로,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오늘의 우리가 배워야 할 모습입니다. 

 

또한 이 세상이 죄로 만연되어 정의가 땅에 떨어져있어도, 아직까지 멸망하지 않고 유지되고있음은

어디선가 아브라함처럼 죄많은 이 세상을 위해 기도하고 있는 소수의 의인들 덕분은 아닌지 생각해봅시다.

(바닷물을 생명의 보고가 되게 하는 데에는, 단지 3%의 소금 밖에 필요치 않다고 합니다.)

 

우리도 그런 의인, 중재자가 되도록 노력합시다.

우리 가정을 받치고 있는 의인, 우리 사회와 우리 교회를 위해 중재하는 의인은 누구일까요?

손가락을 안으로 향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언제 어떻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간절히 간구했나요?

그 경험을 나누어 주세요.

 

 

 - 위 글은 요즘 제 카페에 올리고 있는 성경해설입니다. 마침 오늘의 독서와 일치하기에 여기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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