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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가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들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7-04 조회수748 추천수7 반대(0) 신고

 

 

<우리가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들>


마귀 들린 사람 둘이 무덤에서 나와 그분께 마주 왔다. 그들은 너무나 사나워 아무도 그 길로 다닐 수가 없었다. “하느님의 아드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때가 되기도 전에 저희를 괴롭히시려고 여기에 오셨습니까?” “저희를 쫓아내시려거든 저 돼지 떼 속으로나 들여보내 주십시오.”

“가라.” 그러자 돼지 떼가 모두 호수를 향해 비탈을 내리 달려 물속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들은 그분을 보고 저희 고장에서 떠나가 주십사고 청하였다. (마태 8,28-34)



  공관복음서에 모두 나오는 이 대목은 정말 알아듣기 어려운 대목입니다. 그래서 많은 분들이 이 대목을 붙잡고 이해해 보려 씨름하였지만 속 시원하게 우리 것으로 녹아들지 못하고 있습니다. 피상적으로 변죽만 울리는 묵상만 할 뿐입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주님의 깊은 뜻을 인간의 눈으로 헤아리기에는 이해하지 못할 점이 많다는 점을 인정하라는 가르침입니다. 인간들이 옳다고 생각해 왔던 많은 무슨 “~주의(主義. 이데올로기. 가치관 등등)” 들이 옳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살펴보라는 가르침인 것은 알겠습니다.


  모든 인간은 언제 어느 시대에서나 어떤 가치관을 지니고 행동해왔습니다. 그 가치관이 어떤 이름으로 불리던 간에 그렇게 살아 왔습니다. 인류 역사 중 근세사에서 확연하게 나타난 세계대전과 냉전은 결국 이 이데올로기의 싸움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여전히 그 이데올로기를 위해 목숨을 겁니다. 그 이데올로기가 옳은지 그른지 판단해 보려 하지도 않고 일단은 자기들 힘이 약해 지배당하는 것이 두려워 악으로 싸움질 해 왔습니다. 그리고 인간들은 스스로 그 때 벌어지는 악의 행위에는 관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전쟁에서 적군을 죽이는 행위는 악이 아니라 옳은 일을 한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리고 그 행위가 여전히 악이라고 분명히 말하는 양심적 인물과 종교에게 무참한 보복과 박해를 가해왔습니다. 이점에서는 어느 민족이나 국가 와 개인 그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집단으로 악을 저지를 기회가 오는 것을 미리 막아야 합니다. 일단 그런 행위가 벌어진 이후에는 인간은 도저히 제어할 힘이 없게 되기 때문입니다.


  일단 그런 상황에 빠지면 하느님께서 양심의 목소리를 일깨워 주셔도 모두들 떠나가 주시라고 요청할 뿐입니다. 지금은 승리가 더 중요하다고 외치게 됩니다.


  어제 국제 경제학을 전공하는 교수이신 교우분과 저녁 식사를 하면서 이러저러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예전에 가톨릭 신앙을 모를 때는 시장 자본주의 경제에 내재한 한계를 분명하게  깨닫지 못했는데, 신앙을 깨우치고 나니 눈에 확연히 보인다고 하십니다.


  현 시장 자본주의는 과소비를 필연적으로 조장한다. 공장은 일단 제품을 생산해야하고 소비자는 그것을 사주어야 한다. 그래야 일자리도 유지되거나 창출된다. 공장을 계속 돌리다 보면 여러 가지 지구환경을 해치는 유해물질이 빠르게 증가할 수밖에 없다. 자연이 스스로 분해할 수 있는 속도를 넘어서는 유해 물질은 결국 지구 환경을 해치는 공해 물질로 작용할 것이다.


  자동차 산업을 예로 들면 공해를 유발하는 원인이 되는 줄 알지만 생산을 줄이라고 말할 수 없다. 만약 그 공장이 문을 닫는다면 경제의 일각이 무너져 걷잡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그러니 표를 의식하는 정치가들은 그런 일을 용납할 수 없게 된다. 의식주만 해도 사실 우리는 필요이상으로 과소비한다. 옷도 옷장을 열어보면 사고 나서 몇 번 입지도 않고 둔 것이 얼마나 많은가? 음식도 한해에 버려지는 음식물 쓰레기가 상상을 초월하는 액수이며 그것을 기아에 허덕이는 빈국에 나누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지구에 기상 변화를 일으키는 것이 지구 온난화가 원인이라면, 우리가 만든 여러 가지 공해 물질이 결국 기상변화를 초래하여 재앙을 가져 올 수 있다.


  이 시장 자본주의의 한계를 인식하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주님 사랑의 마음을 헤아리고 실천하는 방법뿐이라는 것을 신앙에 눈 뜨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저성장의 어려움을 모든 사람들이 나누어지려는 각오를 하고 흥청망청 자신들을 위해 과소비할 것이 아니라 절약하며 나누어 쓰려는 정신을 가져야 한다.


  어제 이 말을 들으며 저는 퍼뜩 오늘 복음 말씀이 연결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악을 내쫒아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악을 완전히 끊어 버리지 못하고 무엇인가로 투사하여 돌려 버립니다. 그리고는 그 악을 추방하고 단절했을 때 밀려오는 여러 가지 물질적 손해를 겪게 됩니다. 그리고 손해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공연히 손해만 끼치게 됐다고 불평불만합니다.


  시장 자본주의의 한계를 다른 방법으로 해소해 보려는 시도를 그간 많이 시도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모두 뚜렷한 효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역사적 사실입니다. - 그 외에 자세한 것은 제 전공이 아니니 이 자리에서 거론할 수 없습니다.

 

  한 가지 그 교수님과 제가 공감한 것은 각자가 주님 사랑의 정신으로 무장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全 지구를 바라보는 눈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좀 느리게 사는 것이 옳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인간적 잣대로 판단할 수 없는 주님의 뜻이 분명히 있다는 것을 고백하며 받아들일 때, 비록 눈앞에서 생겨난 커다란 손해와 불행과 고통에도 주님을 떠나지 않고 주님을 모셔 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추신 ; 제 묵상은 다만 이렇게 생각해 볼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 묵상이 반드시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로 생각의 폭을 넓히자는 의미로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 제 생각과 다른 분도 있어야 합니다.   이점을 양해하시고 읽어 주셨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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