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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를 돌보시는 하느님
작성자이인옥 쪽지 캡슐 작성일2007-07-04 조회수642 추천수7 반대(0) 신고
(이 글은 창세기 20-21장에 대해 쓴 글인데,  그중에서 오늘 독서 부분이 나오기에 가져왔습니다 )
 

 

 

1부:  머리로 해부하기

 

아브라함이 그라르 땅에서 자기 아내를 누이라고 속인 이야기(창세 20, 1-18)는 전에 살펴보았다.

(그라르는 오늘날 이스라엘의 'Gaza' 지구다.)

즉 아브라함이 에집트 땅에 기근을 피해 식량을 구하러 갔을 때 있었던 일(12,10-20)과 같으나,

전해내려온 전승이 달라서 차이를 보인다고 하였다.

 

12장이 야훼계 전승이라면, 20장은 엘로힘계 전승이다.

12장에서 공부했으므로, 자세한 것은 생략하지만,

20장의 큰 특징만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하느님의 호칭이 엘로힘이고, 꿈에 계시를 받는 것, 하느님에 대한 두려움(야휘스트보다 거리가 있다),

아브라함과 사라이의 윤리적 문제에 관심이 크다는 점 등이 엘로힘계 문헌이라는 근거다.

 

하가르와 이스마엘이 추방되는 이야기(창세 21, 8-21)도 중복되는 이야기다.

16장 1-16절에서 이 부분도 다루었으므로 자세한 해설은 생략한다.

다만 차이점만 밝히고 넘어가도록 한다.

 

16장이 야휘스트의 전승인데 반해, 20장은 엘로힘계 전승이다.

앞에서는 임신 중에 추방당한 것으로 기술되어 있고, 여기서는 이미 이스마엘이 태어나고 나서이다.

앞에서는 사라가 아직 임신 전이지만, 여기서는 이사악이 태어난 후다.

전장의 동기는 하가르의 거만함 때문에 쫓겨난 것인데, 여기선 이사악의 상속권을 위해 사라가 쫓아낸다.

 

엘로힘계 문헌의 특징답게 여기서도 아브라함의 윤리적인 면에 신경을 쓴다.

즉 아브라함은 이스마엘을 보내면서 아버지의 도리를 다(?)한다.

 

어떻든, 앞장과 중복되는 이야기들을 머리로 해부해보았다.(딱딱하고 재미없다)

이제는 그 안에 들어있는 의미를 가슴으로 느껴보자.(축축하고 뭉클한 것이 있을까?)

 

2부: 가슴으로 느껴보기

 

아비멜렉과 아브라함의 이야기:

 

이 이야기에서 마음이 멈추는 구절은 

하느님을 두려워한다, 경외심을 가진다는 부분이다.

 

우리가 '하느님을 두려워한다. 경외한다'라고 말할 때,

우리는 과연 어떤 느낌을 갖고 말할까?

공포심? 그렇지는 않지만 어쩐지 무서운? 암튼 그와 비슷한 어떤 느낌?  

 

하느님을 모르는 아비멜렉과 그 종들은 하느님을 두려워했다.

하느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님을 두려워하는가?

야훼 하느님을 모르는 우리 조상들도 하늘을 두려워했다.

하늘을 두려워한다는 것, 하느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인간이 자기와는 본질이 다른 어떤 실재가

인간을 굽어보고 있다는 사실을 막연하게나마 의식하며 살아간다는 말이다.

 

그것은 공포심이나 두려움을 갖고 매사 노심초사하며 살얼음 위를 걷듯 살아간다는 말이 아니다.

매사를 함부로 제멋대로 자기 욕심대로만 행하지 않고, 이웃을 생각하며 살아간다는 말이다.

자기 혼자서의 행동도 삼가 조심하며 살아간다는 것이다.

 

아비멜렉이 하느님을 두려워하여 아브라함 일족을 함부로 대하지 않았듯이(8절)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이웃을 대하는 태도에서 차이가 나는 것이다.  

사실 아브라함이 그들을 속인 이유는 이방 사람들 중에 하느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없을까 걱정하였기 때문이다.(11절)

 

이 두 절에서 알 수 있는 바,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경외한다는 마음은 바로 이웃과 사물을 대하는 태도에서 드러난다고 하겠다.

즉 그것은 적극적인 사랑의 의지이지, 결코 소극적인 공포심과 같은 감정이 아니라는 말이다.

 

하느님을 두려워하기.... 아직도 무서운 느낌인가?

사실 그것은 매사에 하느님을 의식하고 처신하는 것을 말하지 않을까?

이방인들, 우리 조상들은 막연하게 의식하며 살아갔지만, 우리는 이제 확실하게 의식하며 살아가야하지 않을까?

 

하가르와 이스마엘의 추방:

 

눈앞에 광경을 떠올리며 읽어내려가다가 한 단락에 눈이 머문다.

"하느님께서 하가르의 눈을 열어 주시니, 그가 우물을 보게 되었다."

 

광야로 내쫓긴 여자와 어린 아이.

얼마를 걸어왔는지 빵도 물도 다 떨어져 죽을 수밖에 없는 처지다,

내려쬐는 태양과 붉은 모래 먼지, 하늘을 돌고있는 독수리.

아이의 죽는 모습을 볼 수 없어 덤불 속에 던져두고,

주저앉아 목 놓아 울고 있는 에미.

 

그런데 하느님은 목놓아 울부짖고 있는 에미의 울음소리가 아니라

울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아이의 목소리를 들으셨다!

 

아이의 목소리!(두번 반복이다)

아이가 뭐라고 했기에.... 성경엔 나오지 않는다.

(엄마~~ 엄마~~ ?)

(물~ 물~ ?)

(살려주세요~~~?)

 

한걸음 떨어져있는 에미를 바라보며 간신히 입술을 들썩이는 정도가 아니었을까?

아무튼 하느님은 그 가녀린 소리를 들으셨다!

그리고 하가르의 눈을 열어주셨다!

그가 우물을 보게 되었다!

하느님은 그 아이와 함께 계셨다!

 

우리는 극한적인 절망상태에 빠지면 '눈 앞이 캄캄해져서 도통 앞이 보이지 않는다'.

바로 그럴 때, 하느님을 찾자.

하느님은 도와주시려고 바로 곁에 천사를 세워두셨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우리는 눈물과 한숨과 비탄과 자포자기에 싸여

바로 옆에 헤쳐나갈 길이 있는 데도 보지 못하는 지도 모른다.

(하느님은 하가르의 울음이 아닌 아이의 목소릴 들으셨다는 말을 다시 한번 기억하자.)

 

바로 곁에서 우물을 보게 된 하가르.

21장에는 언급이 없지만, 야휘스트는 그 우물의 이름을 '저를 돌보시는 하느님'이라고 지었다고 전해준다.

 

이스마엘은 씩씩하게 자라나서 활잡이가 되었다.

광야는 더 이상 이스마엘의 생존을 위협하는 장소가 아니었다.  

파란 광야는 그의 놀이터가 되고 사냥터가 되고 삶의 보금자리가 되었다.

하느님이 그와 함께 계시고 늘 돌보셨기 때문이다.

 

 

우리의 인생도 험난한 광야와 같다.

그러나 하느님이 함께 계시는 한, 광야에서도 샘이 솟는다.

이스마엘과 함께 계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와도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다.

작은 소리도 크게 들으시는 하느님께 우리도 청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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