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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고통의 의미 ... 차동엽 신부님 **
작성자이은숙 쪽지 캡슐 작성일2007-07-12 조회수1,298 추천수11 반대(0) 신고


 

 

성서는 고통이 첫 인간 아담의 범죄 행위의 결과로 찾아왔다고 봅니다.

 

  태초에 하와와 아담이 하느님의 명을 거스르고 죄를 지었을 때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선언하신 것은 그들이 고생하며 살게될 것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너는 아기를 낳을 때 몹시 고생하리라. 고생하지 않고는 아기를 낳지 못하리라”(창세 3,16).“너는 죽도록 고생해야 먹고 살리라”(창세 3,17).

 

  교회는 이 말씀에 의거하여 다음과 같이 가르칩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의로운 지위에 두셨으나”(가톨릭교회교리서 415항) “첫 인간인 아담이 죄를 지음으로써 자기 자신뿐 아니라 모든 인류를 위하여 하느님께 받은 원초적인 거룩함과 의로움을 잃어버렸다”(가톨릭교회교리서 416항).

 

  그러니까 아담과 하와가 그들의 첫 범죄로 본래의 거룩함과 의로움을 상실하고 손상된 본성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바로 원죄(原罪)라고 말합니다.  이 원죄의 대물림으로 인하여 인간은 태초에 하느님께서 하와와 아담에게 선언하신 ‘고생’도 함께 물려받게 된 것입니다. 곧 무지와 고통과 죽음의 지배를 받게 된 것입니다.

 

  고통이 ‘원죄’의 결과로 생겨났지만 그렇다고 고통이 ‘벌’은 아닙니다. 그냥 괴로워하라고 있는 것만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고통이 사람에게 유익할 때가 있습니다.

 

  고통은 사람을 위험이나 파괴로부터 지켜줍니다. 고통이 없다면 아이가 불장난을 하다가 손을 태워버리고 말 것입니다. 고통은 우리 몸에 어디에 고장이 났는지 알려주는 신호입니다.

 

  또한 고통스러운 과정이 사람을 성숙시켜 줍니다. 운동 선수들에게는 땀과 고통이 발전을 가져다 줍니다. 세계적인 스포츠 스타들을 배출한 것은 다름아닌 훈련의 고통입니다.



  고통은 영성적인 의미를 지니기도 합니다. 하느님께서 영적인 성장을 위하여 허락하시는 고통이 있다는 말입니다.

 

  첫째, 견책으로서 주어지는 고통이 있습니다.

  성서는 “주님께서는 사랑하시는 자를 견책하시고 아들로 여기시는 자에게 매를 드신다”(히브 12,6)고 했습니다. 하느님께서 매를 드시고 고통을 주시는 것은 ‘잘되라’는 교육적인 의도가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견책을 받지 않는 사람은 ‘서자’(庶子)이지 ‘적자’(嫡子)가 될 수 없습니다(히브 12,7). “나는 내가 사랑하는 자일수록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묵시 3,19), “이 백성은 괴로움을 참다 못해 마침내 나를 애타게 찾으리라”(호세 5,15) 하신 말씀이 바로 하느님 사랑의 계획 안에 고통이 주어지는 심오한 뜻을 일러주고 있습니다.

 

  이런 고통에서 ‘정화’의 열매가 영급니다. 고통은 우리 영혼에 붙어 있는 불순물들을 제거하고 정화시켜 줍니다. 그래서 고통을 많이 겪은 사람들은 영혼이 맑습니다. 하나같이 그렇습니다. 그런 까닭에 하느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를 은처럼 불 속에서 녹여 내고 고생의 도가니 속에서 너희를 단련시켰다”(이사 48,10). 그리고 고통을 치러낸 신앙인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털고 또 털어도 나는 순금처럼 깨끗하리라”(욥기 23,10).

 

  둘째, 시험으로서 주어지는 고통이 있습니다.

   “너희는 지난 사십 년 간 광야에서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어떻게 너희를 인도해 주셨던가 더듬어 생각해 보아라. 하느님께서 너희를 고생시킨 것은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킬 것인지 아닌지 시련을 주어 시험해 보려고 하신 것이다”(신명 8,2). 욥이 이 시험을 당하였습니다. “야훼께서 사탄에게 이르셨다. ‘좋다! 이제 내가 그의 소유를 모두 네 손에 부친다. 그러나 그의 몸에만은 손을 대지 마라’”(욥기 1,12). 시험을 주시는 의도는 성숙의 은총을 주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권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련의 불길이 여러분 가운데 일어나더라도 그것은 여러분을 시험하려는 것이니 무슨 큰일이나 생긴 것처럼 놀라지 마십시오”(1베드 4,12).

 

  이런 고통에서 ‘믿음’의 열매가 영급니다. 고통은 믿음을 성장시킵니다. 욥의 경우처럼 가장 절망적인 고통의 자리에서도 하느님을 향해 흔들림 없는 신뢰와 의탁의 마음을 갖게 합니다.

 

  셋째, 다른 사람의 구원을 위해 겪는 고통이 있습니다. 이는 내가 고통을 겪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의 구원에 이바지한다는 의미에서 대속적(代贖的) 고통이라 불립니다. 대속적 고통의 첫 번째 예를 우리는 성조(聖祖) 요셉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형들의 질투를 받아서 살해당할 뻔하다가 이집트에 종으로 팔려간 요셉이 우여곡절 끝에 이집트 재상이 됩니다. 그리고 가뭄을 피해 식량을 구하러 온 형들을 만나는데 그때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하느님께서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은 형님들의 종족을 땅 위에 살아남게 하시려는 것이었습니다”(창세 45,7).

 

  이사야서에 나오는 ‘고통받는 야훼의 종’에서 그가 고통받는 것은 우리 모두의 죄 때문이었습니다. “그를 찌른 것은 우리의 반역죄요, 그를 으스러뜨린 것은 우리의 악행이었다. 그 몸에 채찍을 맞음으로 우리를 성하게 해주었고 그 몸에 상처를 입음으로 우리의 병을 고쳐주었구나. 우리 모두 양처럼 길을 잃고 헤매며 제멋대로들 놀아났지만 야훼께서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지우셨구나”(이사 53,5-6).

 

  대속적인 고통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그 절정을 이룹니다. “그분은 우리 죄를 당신 몸에 친히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로 하여금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 올바르게 살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매맞고 상처를 입으신 덕택으로 여러분의 상처는 나았습니다”(1베드 2,24).

 

  이런 고통에서 ‘기쁨’의 열매가 영급니다.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고 있다는 믿음과 더불어 고통 중의 인간 자신이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채우고 있다는 확신이 생겨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큰 그리스도의 고통에 참여하고자 하는 의욕을 갖게 됩니다. 바로 이런 기쁨으로 사도 바울로는 말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온갖 고난을 겪으면서도 큰 위안을 받고 기쁨에 넘쳐 있습니다”(2고린 7,4).


  ‘견책’으로 받는 고통은 하느님께서 잘못된 길에 들어선 당신 자녀를 제 길에 들어서도록 주시는 고통이며, ‘시험’으로 받는 고통은 믿음의 성숙을 위해 허락하시는 고통이며, ‘대속적인 의미’의 고통은 남을 위해 우리 자신이 공로를 쌓도록 초대하시는 고통입니다.

 

  우리는 어떠한 고통을 당하든 그 고통을 소화하고 승화시켜서 보다 적극적인 의미의 고통으로 한 단계 끌어올려 봉헌할 줄 알아야 합니다. 즉 무의미해 보이는 고통까지도 잘 갈무리해서 누군가의 구원에 도움이 되는 희생의 의미로 바칠 수 있어야 합니다.



성주간(聖週間)은 가장 훌륭한 고통의 학교입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어두움이 짙었던 일주일을 우리는 성주간이라 하고 그 어둠의 절정 3일 간을 성삼일이라 부릅니다. 죄인이 절대 정의(正義) 예수님을 체포한 그날을 성목요일이라 하고, 인간이 하느님을 죽였던 금요일을 성금요일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부르는 것은  십자가형의 절망 뒤에 깃들어 있는 부활 때문입니다. 바로 그 고통스런 십자가 죽음이 인류에게 영원한 희망인 부활을 가져다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까닭에 우리는 바울로 사도와 함께 고백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짓눌려도 찌부러지지 않고 절망 속에서도 실망하지 않으며 궁지에 몰려도 빠져 나갈 길이 있으며 맞아 넘어져도 죽지 않습니다. … 그것은 우리의 죽을 몸에 예수의 생명이 살아 있음을 드러내려는 것입니다”(2고린 4,8-11).

 

  바울로 사도는 그 어떤 사도보다도 더 많은 괄시와 고통을 겪은 사도였습니다. 무시도 많이 당하고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습니다. 그러므로 이 고백은 결코 빈 말이 아닙니다. 


부르짖음이 기도가 된다


  그러나 아무리 말이 그럴듯해도 고통을 감당하기 어려운 때가 있습니다. 너무 버거워서 고통에 짓눌릴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는 부르짖으며 하느님을 불러야 합니다. 또 그러라고 고통이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고통의 늪에서 당신을 향해 부르짖을 때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부르짖음에 하느님께서 응답하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하느님은 우리의 한숨과 신음과 절규에 귀기우리십니다. 이미 구약에는 하느님에 의해 선택받은 백성들의 부르짖음의 기도가 차고 넘칩니다.

 

  “나는 내 백성이 이집트에서 고생하는 것을 똑똑히 보았고 억압을 받으며 괴로워 울부짖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이 얼마나 고생하는지 나는 잘 알고 있다. 나 이제 내려가서 그들을 이집트인들의 손아귀에서 빼내어 그 땅에서 이끌어서, 젖과 꿀이 흐르는 … 땅으로 데려가고자 한다”(출애 3,7-8).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들릴 듯 말 듯한 우리의 신음 소리까지도 ‘들으시고’,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불안, 갈등, 고통의 늪에서 하느님을 향할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절망이 깊으면 깊을수록, 우리 생의 어두움이 짙으면 짙을수록 우리가 의지할 분은 하느님임을 알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울부짖는 자체가 기도라는 것입니다. 신음 소리 자체가 인간이 낼 수 있는 가장 정직하며 강력한  기도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탄원 기도는 인간에게는 강력한 힘이 된다. 그 앞에  하느님께서는 가장 약해지신다.”


말씀이 힘이 된다


  유다인은 독일인에 의해 대량 학살을 당하는 그 순간에 시편 23편 ‘야훼는 나의 목자’를 외우면서 두려움 없이 장엄하게 죽어갔다고 합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하느님의 약속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암송하고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다음과 같은 성서 구절들을 늘 기억하고 자신에게 반복 들려줌으로써 이들이 자신을 지켜주는 방패가 되게 하십시오. 당신이 직접 성서를 펴들고 제시된 구절들을 찾아보기를 권합니다. 성서에 줄을 긋고, 소리내어 읽고 깊이 음미하면서 당신을 위한 말씀으로 삼기를 권합니다.

 

  ―“힘을 내고 용기를 가져라. 무서워 떨지 마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느님 야훼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여호 1,9; 참고 이사 43,1; 예레 46,27-28).

 

  ―“무서워하지 말아라. 아브람아, 나는 방패가 되어 너를 지켜주리라”(창세 15,1). 이 말이 이사악(창세 26,24 참조)을, 그리고 야곱(창세 46,3 참조)을 위한 말이었듯이 당신을 위한 위로의 말이기도 합니다.

 

  ―“누가 감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혹 위험이나 칼입니까? … 우리는 우리를 사랑하시는 그분의 도움으로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로마 8,35-37).

 

  ―“주 야훼의 사랑 다함없고 그 자비 가실 줄 몰라라. 그 사랑, 그 자비 아침마다 새롭고 그 신실하심 그지없어라”(애가 3,22-23).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요한 16,33).


  성서 말씀뿐만이 아니라 때로는 성인의 말씀이 큰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언제나 같은 아버지 하느님이 오늘 너를 돌보듯이 내일 그리고 매일 너를 돌보아주리라. 그분은 너를 고통에서 보호해 주시고, 또 고통을 견딜 수 있도록 힘을 주시리라. 그러니 평안하거라. 모든 염려와 근심을 버리거라”(프란치스코 드 살).


  고통 속에서 허덕이는 우리를 예수님께서 부르십니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지고 수고하는 사람은 다 나에게로 오너라. 내가 편히 쉬게 하리라”(마태 11,28).

  사실 예수님께 나아간다고 삶의 십자가가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그 십자가를 감당할 힘을 얻게 되는 것이며 나아가 그 너머 은총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의탁하여 불안, 갈등, 고통이라는 극한 상황을 통과하고 나서야 우리는 욥처럼 고백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당신께서 어떤 분이시라는 것을 소문으로 겨우 들었었는데, 이제 저는 이 눈으로 당신을 뵈었습니다”(욥기 42,5).

 

  욥은 사람들에게서 하느님은 이러저러한 분이라는 것을 들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냥 객관적으로 ‘하느님’ 또는 ‘그분’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욥은 모진 고통을 겪으면서 그 하느님을 직접 만났고 체험했습니다. 마침내 하느님을 나의 ‘당신’으로 보고 느끼게 되었던 것입니다.

 

  욥이 겪었듯이 고통이 모질수록 우리는 더 선명하게 하느님을 볼 수 있게 됩니다. 고통의 골이 깊을수록 우리는 더 깊이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나날의 생활 속에 광야를 마련하자


  이스라엘 백성이 고통과 시련의 의미를 깨달은 곳이 광야였습니다. 즉, 오로지 하느님만 바라보며 살 수밖에 없는 철저히 외부 세계와 단절된 불모의 땅이었습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괴로움, 이른바 백팔번뇌를 올바로 소화시키기 위해서 필요한 곳이 바로 이 광야입니다. 그래서 시인 홍윤숙은 시 ‘광야’에서 “나날의 생활 속에 광야를 마련하거라”를 자서(自序)로 삼고 있습니다. 시인은 그 나날의 광야에서 거두어들이는 톡톡한 재미를 다음과 같이 노래했습니다.


  광야


  내 안에 아무도 모르는 광야 하나

  집도 마을도 인적도 없는 광야 하나 있습니다

  눈물나게 슬프고 외로운 날

  나는 내 안의 광야로 찾아갑니다

  가서 아무도 모르게 광야에 엎드려 나를 던지면

  어느덧 내 마음 하얗게 눈 덮인 설원이 되고

  이 세상 슬픔·고통·외로움이 한 떨기 꽃으로 살아납니다.


  (홍윤숙, 「내 안의 광야」)


  그렇습니다. 자신만의 광야가 있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한 떨기 꽃으로 살아’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당신 안의 광야를 마련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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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을 위한 희망의 편지


  「죄와 벌」이라는 명작을 쓴 도스토예프스키는 “인간의 마음은 하느님과 악마의 전쟁터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잠시 당신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그의 말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말 그대로 전쟁터이기에 당신의 마음에는 불안, 갈등, 고통이 끊이지 않을 터입니다.

 

  너무 괴로워서 피해 보려 하지만 이들은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짐들입니다. 하지만 뒤집어 보면 이들 덕택에 우리가 하느님을 찾고 또 체험하게 되니 은총이라고 아니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니 도망할 것이 아니라 맞대면하고 이겨야 합니다.

 

  극심한 고통의 골짜기에서도 때로는 신음으로, 때로는 탄원으로, 때로는 말씀의 힘으로 끝까지 희망의 끈을 잡고 있어야 합니다. 어떤 고통 속에서도 절망해서는 안 됩니다. 희망을 저버려서는 안 됩니다. 희망만이 살 길입니다. 


  절박한 상황에 처할 때 당신은 어떤 기도를 바치겠습니까? 성서는 막다른 골목에서 믿음의 사람들이 바친 기도가 ‘부르짖음’의 기도였다고 전합니다. 시편은 고통받는 이들의 부르짖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십니까? 살려 달라 울부짖는 소리 들리지도 않사옵니까? 나의 하느님, 온종일 불러 봐도 대답 하나 없으시고, 밤새도록 외쳐도 모르는 체하십니까?”(시편 22,1-2).

 

  벼랑 끝에 매달려 당신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모두가 기도입니다. 신음, 절규, 외침… 모두가 하나도 버릴 것 없는 기도입니다. 다만 한 가지, 그것이 올바른 기도가 되려면 그때 땅을 보지 말고 하늘을 봐야 합니다. 하느님께만 전적으로 매달려야 합니다.

 

  삶의 무게가 당신을 짓누를 때 하느님을 향한 희망의 끈을 잡으십시오.

 

  당신이 지고 있는 고통의 무게만큼 하느님께 부르짖으십시오. 원망하고, 울부짖으며, 소리치십시오. 애원하는 목소리에 귀기우리시고 함께 괴로워하시며 응답해 주시는 분이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이나 모세 같은 위대한 인물들의 기도뿐 아니라 카인 같은 죄인의 부르짖음과 하갈 같은 천민의 울부짖음도 들어주셨습니다. 예수님도 외아들을 잃고 슬피 우는 나인의 과부와 눈을 뜨게 해달라는 예리고 소경의 부르짖음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을 위한 하느님의 선하신 계획을 굳게 믿고 모든 것을 맡기십시오. 극심한 근심과 괴로움의 순간에도 바울로 사도의 고백 말씀을 붙들고 기도와 희망으로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들 곧 하느님의 계획에 따라 부르심 받은 사람들에게는 모든 일이 서로 작용해서 좋은 결과를 이룬다”(로마 8,28)

 

  숱한 하느님의 사람들이 이 믿음으로 역경을 이겨냈습니다.


  당신이 시련 가운데 목청껏 외쳤으나 그분은 침묵만 하고 있는 듯이 보일 때에도 그분은 당신을 눈동자처럼 지켜주고 있다는 사실을 끝까지 믿으십시오.

 

  머지않아 당신은 이 말들이 진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더욱 깊이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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