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 정만영 신부님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7-12 조회수891 추천수12 반대(0) 신고
 
 
                             < 로체스터의 평화의 모후 성당. 방배동 성당과 같이 윗면을 유리로 처리했으며 아래쪽도 유리를 사용한 곳이 있음. 자연친화적인 설계임>
 
 
7월 12일 연중 제14주일 목요일


창세기 44,18-21.23b-29 ; 45,1-5 마태오 10,7-15

        우리는 살아오면서 우리가 듣는 가장 말들 중에 하나가 아마도 ‘사랑’이란 단어 일 것이다.
 
이처럼 사랑에 대해 너무나 많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 사실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사랑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기 때문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또한 우리가 사랑에 대해 수많은 말들을 하지만, 정작 사랑하기도, 사랑받기도 힘들어 한다.
 
똑똑하고 능력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사랑 앞에 쩔쩔매는 것을 보면 사랑은 지식과 능력과는 무관한 것이 틀림없다.
 

        마찬가지로 용서에 대해 우리는 많은 말들을 하면서 살고 있다.
그러나 정말 우리가 용서가 무엇이고, 어떻게 하는 것이고, 왜 용서를 해야 하는가? 하는 것들에 대해 깊이 생각하며 살고 있는가하는 생각들을 해 본다.


1. 용서는 나를 위한 것이다.

        용서하지 못하는 이유들로 흔히들 내게 상처 준 사람이 잘 되는 꼴을 보지 못해 용서할 수 없다고 한다. 또는 내가 받은 만큼 고통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는 참 어리석은 것이다. 즉 줄을 놓아 버리면 되는 것인데 계속 미친개에게 끌려 다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 미친개가 계속해서 자신을 물도록 내버려 두는 것과 똑 같다.
 
가해자에게 아픔을 주기 위한다는 구실이 사실은 자신에게 계속 상처와 피를 흘리게 하는 처절한 자기 자학 그 이상인 것이다. 자학도 이런 자학도 없다.

        그러나 더 불행한 것은 가해자는 내가 아무리 미워하고 저주한다고 하더라도 내 고통과 아픔만큼 괴로워하지 않는 염연한 사실이다. 용서는 가해자를 위한 적선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이다. 나를 보듬고 사랑하는 길인 것이다.


2. 용서는 모든 것을 잊는 것인가?

        용서하면 가해자와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호형호제하며 지내야하는가? 
대답은 동시에 “예”와 “아니오”의 피해자인 나의 선택의 문제이다. 즉 ““예”라고 가해자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고 했다손치더라도 그와 잘 지내야 할 이유가 없다. 마찬가지로 아니오” 라고 선택하더라도 그것이 죄라든가 혹 비그리스도인의 모습이라고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용서의 행위는 대단히 미안하지만 피해자의 신앙과 믿음의 깊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내가 용서한다는 것은 그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지, 그 사람의 행동까지 용서하고 잊는 다는 것은 아니다. 불편하면 가해자를 피하고, 그와 나를 위해 기도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3. 용서는 하느님 체험을 한 사람만이 할 수 있다.

        용서가 힘든 것은 너무나 많은 다양한 이유들이 있기 때문인 것은 분명하다. 지금까지의 저와 지인들의 삶을 모습을 통해 볼 때,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의 체험을 한 사람, 즉 그분의 사랑을 깊이 체험한 사람만이 용서를 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는 것이다.
 
용서란 내가 용서하지 않으면 지옥 가는 두려움에서 용서를 한다든가, 혹 천국가기 위해 용서하는 것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제자들이 하느님의 나라를 전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가? ‘예수천당, 불신지옥’라는 협박일까? 반대로  "여인아, 네 믿음이 너를 살렸다. 병이 완전히 나았으니 안심하고 가거라." (마르코 5,34)라는 12년 동안 하혈하던 여인이 체험한 예수님과의 만남일 것이다.
 
또한  간음하다 잡힌 여인에게 "나도 네 죄를 묻지 않겠다. 어서 돌아가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8,11)하신 체험을 전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하느님 나라의 선포가 아닐까?
 
더블어 "나를 따라오너라." 마태오(9,9)는 마태오와 "자캐오야, 어서 내려오너라. 오늘은 내가 네 집에 머물러야 하겠다." (루까19,5)라는 자캐오의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체험> 한 사람들이 전하는 예수님의 이야기 일 것이다.
 
예수님이 자신들을 어떠한 조건을 내걸고 받아 주셨기 때문이 아니라 무조건적으로 있는 그대로 받아 주셨던 체험인 것이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10,8b)라는 오늘 복음이 이에 해당되겠다.

        따라서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한다면, 또는 자신에게 육체적, 정신적 아픔을 준 사람과 사건, 체험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내가 하느님과 깊은 만남을 하였는가?’,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것을 깊이 체험한 사람인가?’,
‘내가 예수님으로부터 용서받은 체험을 하였는가?’라는 질문에 답해야할 것이다.


4. 용서는 피해자의 몫이다.

        오늘 제1독서에서 요셉의 모습을 본다.
요셉은 자신의 상황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다. 즉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즉‘상처 받기 이전의 ’과거의 나’라는 점을 알고 있다.
 
동시에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가장 가까운 이들, 형제들부터 버림받고, 배신당한 바로 그 상처와 아픔, 고통을 지닌 ‘현재의 나’를 알고 있다.

        따라서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나’인 피해자 요셉이 그 고통과 아픔을 준 가해자 형제들에게 말한다. ‘그러나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 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역설적이게도 가해자가 피해자의 입장을 헤아리며 그들의 마음을 공감하는 대목이다.
 
어떻게 이런 놀라운 공감이 가능했을까? 피해자의 아픔이 그만큼 컸다는 것일 것이다. 그 만큼 배신감과 버림받은 분노에 치 떨며 보낸 날들이 많았다는 뜻일 것이다.

        그랬던 피해자인 요셉이 말한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가족과 공동체로부터 버림받고 축출당했던 한 개인인 ‘나’를 하느님께서는 그 가해자인 가족과 공동체를 구원하시기 위해 보내셨다고 고백합니다.
 
하느님 체험을 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한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개인에게 주어졌던 상처와 아픔을 받아들여 진주를 낳은 성숙한 사람의 고백입니다.


        나는 언젠가부터 사제이지만
육체와 마음, 특히 영혼의 상처를 입은 사람에게 ‘용서’하라는 말을 하지 않기 시작했다. 아니 ‘용서’하라는 말을 하지 않기로 결정을 했다. 왜냐하면 나는 피해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용서’란 철저히 피해를 입은 피해자의 몫이기에 제3자인 내게 그러한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함부로 그러한 거만함과 교만함의 권위로 감히 ‘용서’하라는 말을 하지 않는다.
 
대신 상처 입은 사람의 아픔과 분노에 귀기우리고 함께 가해자를 욕한다.  
‘그 놈 죽일 놈, 나쁜놈, 개새끼...’등은 점잖은 축에 든다.
 
아니 내가 한 술 더 떠서 동원 할 수 있는 온갖 욕이란 욕은 다 해 댄다.
사제가 언제 욕을 마음대로 하겠는가? 이때다 싶어 마음껏 욕을 해제 낀다.
그럼 나도 사실 좀 시원해진다. 얼마나 시원한지 욕해 본 사람은 안다.

......................................................
아!...시원해~~ ....................................................
나는 오늘도 함께 욕할 사람과 대상을 찾아 
어슬렁거린다....................



욕을 해야 욕이 없어지는 것 아닌지요?
간혹 욕은 하라고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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