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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7월 15일 야곱의 우물- 루카 10, 25-37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7-07-15 조회수550 추천수5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서서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말하였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그가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네가 살 것이다.”
 
그 율법 교사는 자기가 정당함을 드러내고 싶어서 예수님께,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응답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코로 내려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그를 때려 초주검으로 만들어 놓고 가버렸다. 마침 어떤 사제가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로 그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길 반대쪽으로 지나가 버렸다.
 
그런데 여행을 하던 어떤 사마리아인은 그가 있는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그에게 다가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맨 다음, 자기 노새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다. 이튿날 그는 두 데나리온을 꺼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비용이 더 들면 제가 돌아올 때에 갚아드리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하느냐?” 율법교사가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
루카 10,25-­37)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세계화’란 용어도 진부하게 들릴 정도로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합니다. 지구촌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일은 바로 이웃에서 일어난 것처럼 신속하게 아는 반면, 아파트 바로 옆집에 사는 사람이 죽은 지 며칠이 지나도 아무도 모르는 이때 ‘누가 내 이웃인가?’에 대한 물음이 새삼스레 들려옵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시는데, 오늘은 한 율법교사가 찾아옵니다. 그의 숨은 의도는 예수님을 시험하는 것, 예수께서는 또 시험대에 오르십니다. 주객이 전도됩니다. “주님, 저를 시험하시고 살펴보시며 제 속과 마음을 달구어 보소서.”(시편 26,2)라고 해야 할 사람은 우리인데도.
 
그러나 예수께서는 오늘도 승-승의 길을 이끌어 내십니다. 율법교사의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는가?’ 그리고 ‘누가 나의 이웃인가?’ 예수께서는 ‘이러이러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 또는 ‘네 이웃은 이런 사람들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훌륭한 선생님은 학생들 안에 내재해 있는 생각을 끄집어내고 스스로 답을 도출하게 합니다. 우문을 현답으로 이끌어 냅니다. “율법에 무엇이라고 쓰여 있느냐? 너는 어떻게 읽었느냐?”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하느냐?” 하시며 그의 생각과 의견을 물으십니다. 그때그때마다 율법교사는 자신의 대답을 합니다. 그리고 올바른 대답으로 판정을 받습니다. 두 사람 모두 승자가 됩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너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신명 6,5) 하느님 사랑에 대한 이 말씀은 그들이 마음에 새기고 자자손손 들려주어야 하는 말씀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손에 표징으로 묶고 이마에 표지로 붙이고, 문설주와 대문에도 써놓으라고 하셨습니다. 다행히도 그는 율법교사답게 막연한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는 말씀도 놓치지 않았기에 예수께 “옳게 대답하였다.”고 인정받았습니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그렇게 하며 사는 길’입니다.
 
이쯤하면 알아듣고 이야기가 끝날 것 같은데 그는 물러서지 않습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10,29) 내심으로 ‘율법 규정이 무엇인지 잘 알고 그대로 지키는 사람, 경제적인 능력이 있기에 자선도 많이 하는 사람, 단식과 기도를 많이 하는 거룩한 사람들이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닌가요? 그렇다면 그들이 내 이웃이지요? 당신이 어울리는 창녀나 세리 같은 죄인들은 율법도 모르고, 자선도 하지 않고 기도도 제대로 하지 않는, 하느님도 사람도 사랑하지 않는 족속이 아닌가요? 그러니 내가 맞고, 예수 당신이 틀렸소.’라며 정당성을 유도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드십니다. 거룩한 성직자 부류는 부정을 타면 하느님 대전에 나갈 수 없었기 때문에 강도를 만나 초주검을 당한 사람을 보고는 멀찍이 길 반대쪽으로 지나갔습니다. 세 번째로 지나간 사람을 예수께서는 사마리아인이라고 하셨습니다. 가여운 마음을 품은 사마리아 사람은 우선 응급처치를 한 뒤 나그네를 자기 노새에 태우고 여관에 데려다 주고 돌보아 달라고 합니다.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오는 길에 갚아드리겠다고. 마음에서 ‘누르고 흔들어서 넘치도록 후하게’(루카 6,38) 베풀었습니다(‘베푼다’는 용어도 그에게는 맞지 않지만). 이런 사람들이 바로 ‘언제 자기가 병든 주님을 돌보아 드렸는지 모르는 사람’으로서 세상 창조 때부터 준비한 나라를 차지하는 사람입니다(마태 25,34).
 
이야기를 마친 예수께서는 “자, 이제 너의 이웃이 누구이냐?”가 아니라 “너는 이 세 사람 가운데에서 누가 강도를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었다고 생각하느냐?”(10,36)라고 물으십니다. 이웃을 결정하는 기준이 나(율법교사) 중심이 아니라 상대방(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 중심입니다. 그 이웃은 내가 정한 범주에 속하는 고정된 이웃이 아니라 장소와 시간과 대상도 수시로 바뀔 수 있는 이웃입니다. 율법교사는 언급하기 어색한지 ‘사마리아인’이라 하지 않고 “그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10,37ㄱ)라고 대답합니다. 사실 그 대답이 훨씬 현명하긴 합니다. 자비를 베푸는 사람이 꼭 사마리아인이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기에 말입니다.
 
성경 공부만 하는 학자보다 말씀을 사는 사람이 더 신앙인답듯이 율법을 공부하는 학자보다 율법도 잘 모르는 사마리아인이 참으로 율법을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10,37ㄴ) 과연 그가 가서 그렇게 하였을지 궁금합니다. 그가 의지해 왔던 관념을 뒤집어엎고, 그가 누렸던 안전지대를 포기할 수 있었을까요? 사회적·종교적 관습이 쌓아놓은 장벽을 허문다는 것은 물결을 거슬러 가는 것이요, 도전과 시련과 박해의 위험에 자신을 노출시키는 것입니다. 타인들의 요구에 자신을 내어 놓는 것이며 좋은 뜻만으로도 부족한 자신의 한계를 인정해야 하고 선의에도 불구하고 돌아오는 비난과 시기 질투로 인해 상처를 받을 각오가 되어 있는 것입니다. 가서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요?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은 사랑한다. 너희가 자기에게 잘해 주는 이들에게만 잘해 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그것은 한다. 너희가 도로 받을 가망이 있는 이들에게만 꾸어준다면 무슨 인정을 받겠느냐? 죄인들도 고스란히 되받을 요량으로 서로 꾸어준다.”(루카 6,3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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