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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좋은 이웃이 되는 길" --- 2007.7.15 연중 제15주일(농민주일)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07-07-16 조회수723 추천수7 반대(0) 신고
(이수철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강론 말씀)
 
 
2007.7.15 연중 제15주일(농민주일)                            
신명30,10-14 콜로1,15-20 루카10,25-27

                                                    
 
 
 
 
 
 
"좋은 이웃이 되는 길"
 


주님 향한 열렬한 사랑은 찬미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주님을 찬미하라.”
 
우렁찬 주님 찬미 기도로
오늘 주님의 날을 시작한 여기 수도자들입니다.

어제 미사 강론 중 함께 웃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죽음에 대한 묵상으로 강론을 시작하다가,
“아마 50년 후에 이중에 남아 있을 사람은
  엘리야 수사님 한 분 뿐이 없을 것입니다.”
라는 대목에 모두들 웃었습니다.

긴 인생 같은 데 50년도 금방이요,
여기 계신 대부분의 형제자매들도
50년 후에는 거의 뵙기 힘들 것입니다.
 
제가 이야기 해놓고도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살아 온 날들보다 살날이 훨씬 짧습니다.
20-30년 남았다고 봐야 하는 데
지금까지 흘러온 20-30년 생각하면 남은 20-30년은 금방입니다.

죽음 있어 비로소 삶이 선물임을 깨닫습니다.
 
짧기에  더욱 소중하고 아름다운 선물 인생입니다.

율법 교사가 아니더라도
우리 또한 스승 예수님께 저절로 묻게 됩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받을 수 있습니까?”

사부들을 찾은 사막 수도자들의 절박한 물음이기도 했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아름답게,
영원히,
행복하게, 잘 살 수 있겠느냐는 삶의 근본을 묻는 질문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우리 존재의 뿌리인 주 우리 하느님께 돌아오는 겁니다.
그리고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이 계명은 우리에게 힘든 것도 아니고 멀리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우리의 입과 마음에 있기 때문에,
마음만 먹으면 그 말씀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머리 좋은 것보다는 마음 좋은 게 낫고,
마음 좋은 것보다는 손, 발 좋은 게 낫다합니다.
 
그러나 머리와 마음 사이, 마음과 손, 발 사이 거리는 얼마나 먼지요!
 
실천의 중요성과 어려움을 말하는 겁니다.

과연 이 가까이 있는,
우리의 영원한 생명과 행복이 달린 이 계명은 무엇일까요?

오늘 복음이 그 답을 줍니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여
주 우리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주님 역시 율법학자의 이 대답에 흡족해 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옳게 대답하였다. 그렇게 하여라. 그러면 살 것이다.”

살아있다 하여 다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의 농도에 따른 삶의 질, 존재의 질입니다.
 
사랑할수록 충만한 존재의 삶이요,
사랑 식을수록 희미한 존재입니다.
 
살아있다 해도 다 똑 같은 삶이,
똑같은 존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과연 나는 몇 %의 존재를, 삶을 살고 있는지요?

사랑은 표현을 찾습니다.
실제 그 표현을 보고 사랑을 실감합니다.
 
누구나 지닌 사랑이요 표현의 본능입니다.
 
하느님 사랑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는 기도로,
노동으로,
성독으로,
묵상으로,
이웃 사랑으로,
환대로,
자선 행위로 표현됩니다.
 
이런 열매들로 하느님 사랑의 진위를 확인하면 틀림없습니다.
 
하여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된 것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하느님 사랑은 저절로 이웃사랑으로 표현되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사제와 레위의 하느님 사랑,
반쪽이었음이 들어납니다.

반면 일개 평범한 사마리아인 온전한 하느님 사랑에,
참 인간이었음이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측은지심, 연민의 사랑입니다.
 
여행 중인 사마리아인,
강도 만나 초주검이 된 이를 보고서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즉시 구제활동을 시작합니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새삼 분별의 잣대는 율법이 아니라 지금 여기 살아있는 현실이요,
연민의 사랑임을 깨닫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 모두를,
특히 종교인들을 비춰주는 거울과도 같습니다.

핑계, 변명하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법대로 하는 것만큼 편한 것도 없지만
그만큼 무책임한 것도 없습니다.
 
법이, 율법이 잣대가 아니라
살아있는 현실을 직시하는 예수님의 측은지심이
그 잣대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사마리아인 같은 이들,
전체 신자들 중 몇 퍼센트나 될 런지요?

율법학자의 질문에 가득 담긴 자기중심적 이기심입니다.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이런 눈으론 이웃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여 마음의 눈 열린 자라면 이런 질문 안합니다.
 
마음의 눈, 멀기로 하면 오늘 사제나 레위와 똑같습니다.
 
사제나 레위, 초주검이 된 사람은 봤지만
죽어가는 이웃은 보지 못했습니다.
 
연민의 눈을 지닌 사마리아인만이 이웃을 봤습니다.

이 질문에 주님은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신 뒤,
누가 나의 이웃이냐 묻지 말고,
네가 어려움 중에 있는 이들에게 이웃이 되어주라 하십니다.
 
내 중심이 아닌 이웃 중심으로 180도 발상의 전환입니다.
 
진정 하느님을 사랑하여 마음의 눈 활짝 열리면
지금 여기 도처에서 나를 필요로 하는 이웃들을 발견합니다.

이웃 개념의 확장이 필요합니다.
 
사람 이웃에서 자연 만물 이웃에로의 확대입니다.
 
무분별한 개발과 외적 성장 추구에 따른
공해와 오염으로 죽어가는 자연들,
이런 추세라면 인간종족도 머지 안아 함께 공멸입니다.
 
자연을 나와 너의 이웃이 아닌 그것으로
마구 함부로 대했기에 자초한 화입니다.

바로 이런 생각을
저는 바오로의 콜로새서 2독서 말씀에서 착안했습니다.

세상 모든 만물들 무의미한 존재들이 아닙니다.
만물들이 그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또 그리스도를 향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그리스도 그분 안에
온갖 충만함이 머무르게 하셨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향하여 만물을 기꺼이 화해시키셨습니다.
 
매일 미사 거행을 통해 실현되는 진리입니다.

그렇습니다.
 
모든 세상 만물들이 그리스도 안에 수렴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주 만물 역사의 의미입니다.
 
이 그리스도 없으면 모두가 허무의 블랙홀에 빠집니다.
 
만물은 그리스도 안에서 존속하며
진정한 평화도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모두가 공존 공생하는
이웃 형제들이라는 자각이 참으로 절실한 시대요,
아씨시의 프란치스꼬 영성이 절박하게 요구되는 시대입니다.
 
영예롭게도 그리스도의 역할을 수행하는 우리 교회입니다.

그리스도 그분은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통해서
사람은 물론 모든 만물이 우리 모두의 이웃 형제들이 됩니다.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서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말씀과 성체의 사랑으로
우리를 충만케 하시어
어려움 중에 있는 모두에게 좋은 이웃으로 파견하시며 말씀하십니다.
 
“가서 너도 그렇게 하여라.”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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