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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7-21 조회수744 추천수9 반대(0) 신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저 사람은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고을과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 그분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었기 때문이다.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 그러니 수확할 밭의 주인님께 일꾼들을 보내 주십사고 청하여라.” (마태 9,32-38)

 

   제가 복음서를 처음 읽어 본 것은 성인이 되어서입니다. 복음서를 처음 대했을 때 이렇게 훌륭한 말씀을 하신 분이라면 과연 예수님은 어떤 분인지 궁금해져서 자세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런 중에 이해가 되지 않는 대목이 몇 군데 발견되었습니다.

  요한복음서 9장 태생 소경에 대한 말씀이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또 겟세마니에서 피땀을 흘리시며 하느님 아버지께 기도하시는 장면과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실 때 큰 소리로 부르짖으시는 장면입니다. 그 말은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신 것입니다. 신이시라면 어떻게 여느 인간이 지르는 비명을 지르실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동양인으로서 제 생각은 예수님께서 격한 감정을 통제하고 평상심을 보여주셨으면 더 받아들이기 쉬웠을 것입니다. 높은 경지에 이르신 도인으로 다가 왔으면 더 이해하기 쉬웠을 것입니다.

  우리 한국인의 정서는 위대하고 존경받는 인물이라면 고통을 잘 참아내고 자신을 이겨내어 승화해야 된다는 고정관념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도 역시 그랬습니다. 예수님께서 보통사람보다 월등히 뛰어난 분이시라는 시각을 지울 수 없기에 왜 그래셨을까하고 물어 보았습니다. 달관하신 모습을 바랐습니다. 부처님처럼 죽음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시며 돌아가실 수는 없었는가 하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깊은 산속 사찰에 가서 대웅전에 들어가 보면 부처님상이나 관세음보살상은 모두 인자하시고 인생을 달관하시는 모습을 형상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부처님하면 흔히 염화시중의 미소를 짓고 있는 부처님의 모습을 떠올리게 됩니다.

   이와는 달리 특히 천주교 교회에서 나타내고 있는 예수님의 모습은 언제나 피땀을 흘리시며 얼굴을 찡그리시고 고통에 겨워 머리를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만큼 처절한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직접 겪어 내시는 분입니다. 고통에서 벗어나 자유로우셔야 할 것이라는 우리의 단순한 선입관과는 달리 지상에서는 우리와 똑같이 고난을 견디셨고 고통과 죽음의 공포를 체험하셨습니다. 특히 죽음의 공포를 느끼셨다고 말하면 아마 거부감을 표시하실 분들이 많으시겠죠. 그러나 복음서에서는 죽음의 공포를 겟세마니의 기도로 나타낸 것입니다.

   개신교에서는 가톨릭교회와 달리 상징적으로 십자표시만 허용합니다. 십자가 고상을 우상숭배라 하여 의미를 축소하고 예수님의 모습은 나타내지 못하게 금하고 있습니다. 그 이면에는 인간이 겪어야하는 고통을 애써 외면하려는 의도도 배어 있습니다. 주님께서 당하신 고통을 우리도 느껴야하는데 가능하면 피하려는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고통 없는 영광만 강조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이 대목 복음말씀에서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라는 대목은 영어 번역이나 우리말 번역이나 모두 완곡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 원문에서 사용된 그리스어 동사 ‘스플라그크니조마이(splagchnizomai)’의 어원은 ‘창자를 끊어낸다’ 에서 나왔습니다. 우리말로 표현하면 ‘단장(斷腸)의 아픔’ 이란 의미가 실려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목자 없는 양들처럼 시달리며 기가 꺾여 있는 군중을 보시고 동정심 정도만 느끼신 것이 아닙니다. 당신의 애간장이 다 끊어지는 아픔을 느끼시는 것입니다. 얼마나 군중을 사랑하시는지 단적으로 들어납니다.

   맞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에서 사람들을 보실 때 언제나 안타까워하셨으며 애달파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1,33에서는 죽은 라자로를 슬퍼하는 광경을 보시고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북받치고 산란해지셨다.” 라고 표현합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아파하시는 표현입니다. ‘통분하고 갈피를 못 잡으셨다’ 정도입니다.

   예수님께서 고통을 느끼신 것은 당신의 죽음과 아픔 때문이 아니라 바로 인간들이 겪어야하는 아픔과 죽음의 공포를 앞에 두고 안타까움을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인간이 느껴야 하는 공포와 아픔을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잘 알고 계셨습니다. 우리가 피상적으로 느끼고 어쩌면 외면하기까지 하는 그 공포와 아픔을 직시하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외면하지 말라고 당신께서 앞장서서 더 크게 표현하시는 것입니다.

   이처럼 복음서를 전체로 통찰해보면 예수님께서 직접 보여주시는 몸 언어를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도 타인의 고통을 나의 아픔으로 느낄 줄 안다면 예수님의 심정을 깨달을 수 있을 텐데, 우리는 여전히 창자가 끊어지게 아프다고 호소하는 타인의 고통보다 자기 손톱아래 끼인 가시가 주는 아픔을 더 크게 느끼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정한 예수님의 제자라고 부를 자격이 없는 것입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악마의 우두머리라고 부르는 바리사이보다 나을 것이 없게 됩니다.

  수확할 일꾼을 기다리시는 주님의 심정을 헤아린다면 우리는 타인을 비난하고 단죄하기 이전에 자신이 직접 애간장이 타는 아픔을 겪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애간장 녹는 아픔을 마다해서는 우리가 한 몸에서 나온 지체라는 깨달음을 받아들이기 어려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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