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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7월 22일 야곱의 우물- 루카 10, 38-42 /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작성자권수현 쪽지 캡슐 작성일2007-07-22 조회수550 추천수7 반대(0) 신고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그때에 예수님께서 어떤 마을에 들어가셨다. 그러자 마르타라는 여자가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셔 들였다. 마르타에게는 마리아라는 동생이 있었는데, 마리아는 주님의 발치에 앉아 그분의 말씀을 듣고 있었다. 그러나 마르타는 갖가지 시중드는 일로 분주하였다.
 
그래서 예수님께 다가가,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 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마르타에게 대답하셨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 그리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을 것이다.”
(루카 10,38-­42)
 
정 세라피아 수녀(포교성베네딕도수녀회 대구수녀원)
한동안 저는 이 복음을 읽을 때마다 마치 내가 마르타인 것처럼, 예수님이 왜 마르타의 입장을 배려해 주시지 않는지 섭섭했습니다. 마르타는 집에 오신 귀한 손님 시중을 드느라 혼자 경황이 없었습니다. 마리아가 눈치껏 나와 도와주면 좋으련만 얌체같이 꼼짝도 않고 예수님 발치에 앉아 이야기만 듣고 있었습니다. 참다 못한 마르타가 예수께 도움을 청하는데 뜻밖에도 예수님은 마리아의 편을 드시며 “마리아는 좋은 몫을 선택하였다.”라고 하시니 말입니다. ‘누구는 공주처럼 가만히 앉아 예수님 말씀 듣고 싶지 않은가?’ 일복이 많다고 생각하는 마르타의 항변이 들리는 것 같습니다.
 
 
마르타의 역할은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를 모르실 리 없을 텐데 복음사가가 일부러 이 일화를 넣는 것은 어떤 의도가 있어서가 아닐까 합니다. 곧 이 일화를 통해 우리 삶에서 주인은 누구이며, 무엇을 먼저 해야 하고, 어떻게 일을 해야 하는지를 말하고 싶어하는 것 아닐까요? 내 인생의 시작과 마감이 내 의지와 무관하고 또 내 삶의 주도권이 내게 있지 않고 하느님께 있음을 인정한다면 그 주도권을 그분께 넘겨야 합니다. 마르타와 예수님의 관계에서 마르타는 자신이 예수님을 접대하는 주인으로서 주도권을 잡고 있었습니다. 반면 마리아와 예수님을 보면 주도권이 예수께 있고 마리아는 무엇이든 말씀하시는 대로 하겠다는 듯 발치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수동적이지요.

 
‘자녀는 여섯 살 때까지 부모에게 줄 수 있는 모든 기쁨을 선사했기 때문에 그 이후에 부모는 자녀들에게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녀가 성장하여 할 줄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부모에게 줄 수 있는 기쁨은 줄어든다는 말입니다. 자녀가 무능하여 모든 것을 부모의 처분에 맡길 수밖에 없을 때 오히려 더 큰 기쁨을 주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에 대해서는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게리 베커의 말로 대신할 수 있겠습니다. “사랑에 빠진 사람의 효용 수준은 자신이 얼마나 만족하느냐가 아닌, 오히려 사랑하는 대상이 얼마나 행복해하느냐에 의해 결정된다.”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는 곧 자녀와 부모의 관계입니다.
 
 
“저에게 제 영혼은 젖 뗀 아기 같습니다.”(시편 131,2ㄷ)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다!’의 상황이라 생각되지 않는지요? 성녀 소화 데레사는 바로 이것을 터득했습니다. 하느님께 작은 자가 될수록 더 충만히 누리는 사랑! 그렇게 볼 때 마르타는 자신의 일로 주님을 기쁘게 해드리고 싶었지만 그것보다 더 잘하는 것은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베푸시도록 해드리는 것, 그로 인해 우리가 행복한 것입니다. 마리아는 그렇게 했습니다.
 
“마르타야, 마르타야!” 예수께서는 달래듯, 설득하듯 두 번씩이나 그녀의 이름을 부릅니다.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 가지뿐이다.”(10,41)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차려입을까?’ 하며 걱정하지 마라.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는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필요함을 아신다.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그분의 의로움을 찾아라.”(마태 6,31-33) 하느님 앞에 무능한 자가 된다 함은 글자 그대로 아무것도 행하지 않음이 아니라 사람이 빵만으로 살 수 없고 하느님 말씀으로 살아가는 것, 말씀 앞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우선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분께 귀를 기울일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게 되고, 그 뜻에 합당하게 행할 수 있습니다. 그때는 일이 기도가 되고, 기도가 일이 됩니다. 아무것도 행하지 않는 것 같은데도 일이 다 이루어지는, 노자가 말한 ‘무위의 도’가 이런 것이 아닐까요?
 
바쁜 정도가 능력을 가늠하는 기준이라도 되는 듯 사람들은 운전하면서 빵을 먹고, 휴대전화를 받으면서 일합니다. 잠시라도 옆을 보면 그만큼 경쟁 대열에서 뒤처지기에 옆을 볼 틈도 없습니다. 그러면서 어디를 향해 가는지도 모르고 질주하다가 숨 좀 돌리게 되면 그만 쓰러져 버리는 경우를 봅니다.
 
 
우리는 무엇이 그렇게 많이 필요해서 갯벌과 농경지를 없애는지, 무엇을 더 배워야 하기에 학생들은 집에서 잠만 자고 학교와 학원으로 내달리는지? 왜 빨리빨리 일하는 만큼, 정보가 빠른 만큼, 밥을 빠르게 먹는 만큼, 그만큼 여유가 생기지 않는지? 그 모든 것이 실상 필요한 것들이 아니라면 왜 포기하지 못하는지 예수님의 발치 앞에 앉아 진지하게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너희는 멈추고 내가 하느님임을 알아라.”(시편 4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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