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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7-23 조회수816 추천수10 반대(0) 신고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왔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마태 10,34-36)



  저는 언제나 이 대목에 이르면 울컥하고 가슴이 메어집니다. 예수라는 시인께서 왜 평화와 칼이라는 대조적 이미지를 사용해서 당신의 말씀을 전하려고 하셨는가하는 의문이 한 시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집안 식구가 원수가 된다.” 는 보충 글귀까지 하나 같이 충격적인 내용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알아 왔던 예수님, 사랑과 용서와 자비의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바로 알아듣기 어렵습니다.


  이 부분은 마태오 저자가 의도적으로 모아 놓은 ‘파견 설교’ 부분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에게 당신을 믿고 따르라는 말씀인 것은 틀림없습니다. 각자 어떤 희생을 각오하더라도 마지막 선택의 순간에 주님을 선택하라는 뜻인 것도 분명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정도 깊이 밖에 되지 않으시는 분이 아닙니다. 단순히 제자 몇 사람에게만 발설하신 내용이 아닐 것입니다. 인류 전체에게 알아들으라고 피를 토하시며 하신 말씀일 것입니다. 보다 보편적이며 심오한 의미가 담겨 있을 것입니다. 당신 몸을 바쳐가며 말씀하신 피 맺힌 절규일 것입니다.


  우리는 그 깊은 내용을 발견하기까지 쉼 없이 묵상하고 말씀을 알아들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지금 살아가고 있는 인간의 지력이 닿을 수 있는 한 최대로 궁구하여야 합니다. 신앙의 선배들이 깨달은 바를 다 섭렵해 보고 또 새로운 사고의 틀을 적용해 보아서 조금이라도 가깝게 다가가려고 시도하여야합니다. 그리고 묵상을 하더라도 제한하지 말고 자유롭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지금까지는 우리가 이렇게 이해하고 있을 뿐이니 나중에 나오는 후손들에게는 더 깊고 넓은 묵상을 하라고 겸손한 마음 자세를 지니고 있어야 하겠죠.


  우리는 보통 어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하고나면 대개 그럴 줄 알았다라고 반응합니다. 특히 잘못 된 행동을 보이면 더 그렇게 반응합니다. 그를 이해하려한다면서도 먼저 그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원인을 따지고 분석합니다. 그가 그렇게 행동한 적당한 이유를 찾아내려고 합니다.

  누가 범죄를 저질렀거나 윤리 도덕적인 실수를 저지르면 그 원인을 찾아 그의 가족 환경이나 성격, 교육, 지식정도 등등으로 열심히 분석합니다. 그리하여 수긍이 될 때야 비로소 그칩니다. 적당한 이유를 갖다 붙입니다. 네가 이러저러한 잘못을 저지른 이유는 다 이런 것 때문이라고 기어코 둘러 댑니다.


  그리고 그에게는 그 원인을 제거하라고 강요합니다. 실상 그 말은 그에게는 더 이상 벗어날 구멍이 없다는 말과 똑 같습니다. 어떤 원인에 의해 발생했다면 그가 무슨 수로 그 결과에서 벗어 날 수 있겠습니까? 그 말은 그가 그 결과를 무조건 수용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가 아무리 회개하고 새 사람이 되고자 해도 그는 그 잘못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무서운 선고가 되는 것입니다.


  마치 욥기에서 욥을 위로하러 온 친구들이 위로한다고 꺼내는 어처구니없는 말과 같습니다. 친구라고 하면서도 그들은 하나 같이 욥을 분석하고자 합니다. 욥을 위협해서 없는 죄라도 얻어 내고자 합니다. 하느님은 상선벌악하시는 정의로운 분이시다. 네가 무슨 잘못을 저질렀으니 이런 벌을 받는 것이다. 아니더라도 네 가족과 자손이 지은 죄를 대신 받는 것이니 다 통회하고 죄를 낱낱이 고백하라고 윽박지릅니다. 이에 도저히 납득하지 못한 욥은 끝까지 그들의 충고를 듣지 않고 거부합니다. 오로지 자기를 변호해 주실 분이 하느님뿐이라는 믿음을 갖고 하느님을 직접 뵈려고 열망합니다. 욥의 친구들은 이제 이런 욥이 참으로 죄인이라는 판정을 내리고서는 각자 저주를 퍼부으며 돌아갑니다.


  결국엔 하느님께서 욥에게 찾아와 당신께서 하시는 일에는 또 다른 계획이 있어서 하시는 것이라는 가르침을 주십니다. 욥이 잘못해서 고통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당신만의 섭리가 있었기에 그리된 것을 깨닫게 만드십니다.


  인간은 누구나 달라질 수 있습니다. 자기를 억누르고 있던 과거로부터 벗어나 새로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것에는 아무 조건이 없습니다. 남자이든 여자이든,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머리가 좋든 나쁘든, 배운 학식이 높든 낮든 재산정도에 관계없이 새 사람이 되는 데는 모두 평등합니다. 이 세상에서 이 사실만큼 평등한 것이 없습니다.


  누구나 새로 태어날 수 있다는 진리 이것을 제외한 나머지 인간의 현실은 정말 부조리하고 불평등합니다. 오죽하면 노자는 이 세상을 한마디로 천지불인(天地不仁)이라고 갈파했을까요. 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그 부조리에 진저리쳤으며 새로운 해석을 하고자 발버둥을 쳤던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께서는 전혀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십니다. 부조리하고 모순 된 것만 같은 삶이 모두 하느님을 떠난 결과로 생긴 것이며 새롭게 방향전환을 하여 회개한다면 새롭게 태어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회개하여 옛날 악습을 끊어 버리기만 하면 그는 새롭게 태어날 수 있습니다. 그 악습을 끊는 것은 상당히 힘이 듭니다. 훼방하고 만류하는 주변 인물들이 언제나 있습니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간섭하려 합니다. 동료라는 말로 방해합니다.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는 말로 유혹합니다. 또 그런 말에 더 귀를 기울여 자기를 합리화하려는데 이용합니다.


  무엇보다 더 끈질기고 무서운 것은 ‘너는 안 돼’ 라고 삐딱하게 보는 편견과 선입견입니다. 그 편견 때문에 우리는 스스로 세뇌당하여 또 다른 죄에 물들게 됩니다. 바로 주님께서 회개하여 새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시는 것을 몸으로 믿지 못하고 입으로만 주절댄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칼을 주러 오셨다고 말씀하시는 뜻은 지금 우리 모두 과거에 저질렀고 난마처럼 얽혀진 악연에서 벗어나 새로운 문으로 들어서라고 요청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너무나 익숙하여 한 가족과 같이 여기고 살아온 옛 습관을 과감히 잘라내라는 뜻입니다. 남들이 드러내는 편견에서도 벗어나야 하겠지만 자신이 결심하지 못하고 주저하는 행동도 끊어야 합니다.


  그 문에 들어서려면 칼로 자신의 몸을 자르는 아픔을 겪겠지만 반드시 실천해야 할 일이라고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죽기를 각오하라는 말씀입니다. 칼은 죽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 칼은 다시 영원한 생명을 줄 수 있는 칼이기도 합니다.

  

  문은 밖과 연결되어 있지만 바로 그 집에 속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문에 들어 선 순간 우리 전체는 그 집에 들어선 것입니다. 그렇다면 더 이상 의심할 것이 없습니다. 발을 문 안에 걸쳐 놓았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한 집안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제 남은 일은 우리 몸에 습관처럼 달라붙은 유혹의 그림자마저 지워버리는 일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제 십자가를 진다는 것이 결국은 제 습관을 떨어드리기 위한 길인 것입니다.


  제 몸에 칼을 들이 댈 수 있는 자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어 주님께서 걸으셨던 길을 쫒아 걸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 길이 바로 새 생명을 얻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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