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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 영성일지 ... 차동엽 신부님 **
작성자이은숙 쪽지 캡슐 작성일2007-07-25 조회수896 추천수7 반대(0) 신고

 


 

 

프로필 1


  때로는 과감하였다(루가 5,11)

  때로는 순발력이 있었다(마태 16,16)

  때로는 단호하였다(사도 4,10: 5,1-10)


  때로는 경솔하였다(루가 22,33)

  때로는 겁쟁이였다(마르 14,66-72)

  때로는 줏대가 없었다(갈라 2,12)

  

  때로는 대범했다가, 때로는 겁약했다가

  때로는 영웅이었다가, 때로는 사탄이었다가

  때로는 심복(요한 18,10)이었다가, 때로는 배반자(요한 18,25-27)였다가

  때로는 믿음직했다가, 때로는 불안했다가---


  이런 그에게 한결같은 것이 있었다. 큰 사랑이었다.

  ‘겉모양’이 아닌 ‘속마음’을 보시는 그분(1사무16,7)은 그것을 보셨다.

  그분을 향한 뜨거운 사랑, 그것은 언제나 식지 않고 있었다.

  그분의 형안(炯眼)은 그를 ‘반석’으로 삼았다.

  마침내 그에게 천국 열쇠를 맡기셨다(마 16:19).


  그는 우리의 거울이다. 그 안에 우리가 있다. 내가 있다.

  그는 우리의 위로다. 그의 얘기를 들으면 실수와 허물 가운데서도 괜시리 희망이 생긴다.

  주님이 원하시면 ‘걸림돌’(scandal=‘장애물’: 마태 16,23)도 ‘반석’(petra)이 될 수 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요한15,16)라셨다.

  우리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선택받는 것이 아니다. 먼저 주님이 선택해 주셨기에 자격이 있게 되는 것이다. 

 

프로필 2


  본명(本名)은 시몬. 고향은 갈릴레아 지방 베싸이다(Bethsaida). 아버지 요한(요한 1,42)또는 요나(마태 16,7), 동생 안드레아와 함께 고기를 잡던 어부. 결혼한 이후 가파르나움으로 이사하여 장모를 모시고 삼(마르 1,30). 세례자 요한의 제자(요한 1,40-42)였다가 예수님께 스카우트 됨(루가 5,10).

  본시 예루살렘의 유다인 지도층이 ‘본래 배운 것이 없는 천한 사람’(사도 4:13)으로 여길 정도로 볼 품 없는 사람이었다. 불과 3년 후 당시 종교 및 정치 1번지였던 예루살렘에서 권력층의 주요 시찰 인물(사도 12장)이 될 만큼 영향력 있는 ‘예수쟁이’가 돼 있었다. 이후 세계의 중심부였던 로마에까지 그 발자취를 깊이 남기며 그리스도교는 물론 유럽도시문화의 큰 바위가 되었다.

  특기할 것은 그가 곧잘 ‘첫 번째 사람’으로 소개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언제나 첫 번째 사람이었다.

  첫 번째가 되는 것은 1등이 되는 것과 다르다.

  첫 번째가 되는 것은 모험이다. 실패, 망신, 사기, 나아가 손가락질을 감수해야 하는 위험천만한 일이다.

  그는 첫 번째로 예수님을 따라나선 사람이었다(마르 1,16-20).

  그는 첫 번째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한 사람이었다(마르 8,29).

  그는 열두 제자 가운데 부활하신 예수님을 첫 번째로 목격한 사람이었다(루가 24,34: 1고린 15,1-9).

  그는 성령강림 후 첫 번째 설교자였다(사도 2,14-36).

  그는 첫 번째로 이방인에게 선교를 한 사람이었다(사도 10장).

  그는 예루살렘 공의회(사도 15장)에서 첫 번째로 연설(사도 15,7-11)을 한 사람이었다.

  실수가 많았던 만큼 공적도 컸던 사나이.

  그는 프런티어(Frontier)였다.

  이 ‘첫 번째’ 정신이 갈릴레아의 촌부(村夫)를 예루살렘 언덕과 로마 광장 위에 우뚝 선 복음선포의 깃발이 되게 한 것이다.


영성일지


  그는 풍요로운 영성의 샘이다. 혹은 솔선수범으로, 혹은 타산지석으로 우리네 영성(靈性)의 옹달샘이 되어준다.


#1: 나는 죄인입니다

  그물질 하는 바닥에서는 베테랑임을 자부하던 그가 밤새도록 헛탕질을 쳤다. 그런 그에게 웬 문외한(門外漢)이 조언을 하였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쳐 고기를 잡아라.”(루가 5,4) 결과는 놀라웠다.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 되고 ‘두 배에 가득히’ 차도록 고기가 잡혔던 것이다. 이에 그는 아무도 예상치 못한 말로 반응하였다. “주님, 저는 죄인입니다. 저에게서 떠나 주십시오.”(루가 5,8)

  이사야 예언자가 홀연히 천상 궁중의 하느님 보좌 앞에 서게 되자 그는 대뜸 독백을 하였다. “큰 일 났구나. 이제 나는 죽었다. 나는 입술이 더러운 사람, 입술이 더러운 사람들 틈에 끼어 살면서 만군의 야훼, 나의 왕을 눈으로 뵙다니---”(이사 6,5)

  ‘주님’(루가 5,8) 앞에서는 허물을 숨길 재간이 없다. ‘야훼’(이사 6,5) 안전에서는 터럭 하나라도 크게 보인다. 도망갈 재주가 없다. 그저 ‘발 앞에 엎드려’(루가 5,8) 이실직고 하는 것이 상책이다.

  마지막 때에 이런 일이 벌어지면 그것은 비극일 것이다. 그러니 그 분들 앞에 서기 전에, 미리 자복(自服)할 일이다. 일찌감치 자백(自白)할 일이다.


#2: 살려주십시오

  주님만 보고 걸을 때에는 문제가 없었다. 두려움도 없었다. 하지만 ‘거센 바람’에 한 눈을 팔자마자 ‘그만 무서운 생각이 들어 물에 빠져 들게 되었다’(마태 14, 30).

  ‘오너라’(29절)하시는 말씀 한 마디만 붙들고 있을 때는 못할 일이 없었다. 불가능(不可能)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주변을 돌아보았을 때는 금세 한계의 물 속에서 허위적 거릴 수 밖에 없었다.

  오늘도 나는 몇 번이고 ‘살려주십시오’하고 외쳐댄다. 불경기, 실패, 낙방, 질병, 이혼--- 등등의 ‘바람’에 휩싸여 ‘무서움’의 호수에 빠져서 구조를 청한다. 그런 나에게 주님의 응답은 한결 같다. “왜 의심을 품었느냐? 그렇게도 믿음이 약하냐?”(31절)


#3: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영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제자들에게는 예수님도 통하지 않았다.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들의 관심사와 별 상관이 없는 듯이 보이자 ‘많은 제자들’이 말씀이 어렵다는 핑계를 대고 ‘예수를 버리고 물러갔으며 더 이상 따라 다니지 않았다.’(요한 6,66) 사실인즉슨 말씀이 어려워서가 아니었다. 예수님의 말씀이 자신들이 원하던 잇속과는 거리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요즈음 다원종교문화에 빠져서 이 핑계 저 핑계를 대고 주님을 떠나는 이들이 제법 많다. 주님은 우리에게도 물으신다. “자, 너희는 어떻게 하겠느냐? 너희도 떠나 가겠느냐?”(67절)

  그 때는 그가 실망하시는 주님을 위로하였다. “주님 주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는 말씀을 가지셨는데 우리가 주님을 두고 누구를 찾아가겠습니까?”(68절)

  시방 나는 뭐라고 답해야 할까.

   

  #4: 주님, 안 됩니다.

  그건 아니었다. 주님이 ‘고난’을 받고‘죽게’된다는 것(마태 16,21)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스도’(16절)가 고난을 받고 ‘하느님의 아들’(16절)이 죽게 된다니 그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도무지 납득이 가질 않았다.

  안 되겠다 싶어 그가 극구 말렸다. “주님, 안 됩니다. 결코 그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22절)

  날벼락이 떨어졌다.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장애물이다.”(23절)

  정신 차려야 한다. 때로는 주님을 위한다는 것이, 교회를 위한다는 것이, 주교님을 위한다는 것이, 신부님을 위한다는 것이, 수녀님을 위한다는 것이, ‘사탄’을 돕는 격이 될 수 있다. ‘위해 바친다’는 것이 일을 망쳐버릴 수 있다. ‘하느님의 일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일만을 생각하는’꼴이 될 수 있다. 누구고 얼을 차려야 한다.   


#5: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

  이제껏 한번도 보지 못했던 모습이었다.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눈부셨다.”(마태 17,2) “그 옷은 어떤 마전장이도 그보다 더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새하얗고 눈부시게 빛났다.”(마르 9,2) 엘리야와 모세의 모습도 보였다. 모두 함께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가 주님께 말하였다. “주님, 저희가 여기에서 지내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괜찮으시다면 제가 여기에 초막 셋을 지어 하나는 주님께, 하나는 모세에게, 하나는 엘리야에게 드리겠습니다.”(마태17, 4)

  얼떨결에 나온 말이지만 진심이었다. 충심이었다. ‘머리 둘 곳조차’ 없이 돌아다니시며 배척, 질시, 심하게는 폭행(루가 4,29)까지 당해왔던 주님이 안쓰러웠기 때문이었다.

  저 정도의 경지시라면, 굳이 사람들을 찾아다니실 이유가 없어 보였다. 애써 고생하실 이유가 없어 보였다. 소문만 나면 도처에서부터 제자들이 스스로 모여들 것이 분명하였다. ‘명상(瞑想)센터’라 불러도 좋고, ‘선방(禪房)’이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홍보만 되면 인재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올 일이었다.

  이럴진대, 주님은 또다시 그를 실망시켰다. 결사코 산에서 내려오셨다(마태 17,9). 영광의 자리를 박차시고 그예 고달픈 속세로 다시 내려오셨다. 고통, 상처, 좌절, 죄악을 짊어지고 각축하는 사람들의 틈서리로 내려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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