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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섬기려 오신 예수님(마태복음20,1~34)/박민화님의 성경묵상
작성자장기순 쪽지 캡슐 작성일2007-07-25 조회수732 추천수9 반대(0) 신고

 

 2007년 7월 25일 연중 16주간 수요일

포도원의 비유는 구약 이사야서 5,2에서 나오는 예화를

예수님께서 다시 풀어주십니다.

 

하느님은 포도원 밭에서 돌을 골라 내고 좋은 포도나무를 심었는데

들포도가 열렸다는 것입니다.

 

'좋은' 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토브'라는 단어인데,

 창세기 1,3 에서 "빛이 생겨라 하시니 빛이 생겼다." 고 하시고

"보시니 참 좋았다." 라고 했습니다.

 

이 때 '좋다'는 뜻은 원래 '선하다'이고,

'선하다'는 뜻은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들포도는 이방인을 상징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로 심었는데 하느님의 자녀가 되지 못하고

육의 자녀 즉 이방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1 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참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20,1 에서는

포도원인 하느님의 밭에서 일을 하는 일꾼들에게

일당을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마태 20,4 에서는

상당한 삯을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는데

상당한 삯이 헬라말로 '디카이스'로서,

의로움 즉 예수님 자신을 주겠다고 약속을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침 9 시에 일을 하는 사람이나,

12 시에 일을 하는 사람이나,

3 시에 일을 하는 사람이나,

오후 3 시에 일하는 사람이나,

오후 5 시에 일을 하는 사람이나,

똑같은 삯인 한 데나리온을 주시는 것입니다.

 

오후 6 시까지 일을 하니까 한 시간 일을 하는 사람이나,

아침 9시부터 8 시간을 일을 하는 사람이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시는 이유는

이 돈인 데나리온은 세상에서는 상금이 돈이지만,

천국을 가는데는

예수님을 받아야 하며 그 상금은 예수님입니다.

 

이 '데나리온'은 헬라말을 보면

헬라말에는 문법에 파싱(parsing=문법분해)이 있는데

N-NM-S 라고 되어 있는데,  

N(noun)은 명사이고, 

N(nominative)은 주격이고,  

M(muscline)은 남성이고, 

S(singular)는 단수라는 뜻으로,

명사이고  주격이고  남성 단수일 때는

유일하신 하느님을 나타낼 때 사용하시는 파싱입니다.

 

이 '데나리온'이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이 한 '데나리온'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모르니까,

아침 9 시에 일을 했던

사람들이 돈을 더 받으려니 하며 불평을 하는 것입니다.

 

5 시에 일을 하는 사람은 불평 없이 감사를 했습니다.

이 '데나리온'을 세상의 돈이라고 생각을 하면

노사분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불평을 하니까 

"내 것 가지고 내 맘대로 하는데 무엇이 잘못되었느냐?" 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말째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말째가 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포도원은 우리들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일을 하는 곳입니다.

아침 9 시에 일을 하는사람은

세례를 먼저 받은 사람일 수도 있고,

이스라엘 시대에는 바리사이들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들이 교회에서 봉사를 하거나 집에서 모든 일을 할 때,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쁜 마음으로

봉사를 하지 않거나 불평을 했을 때,

나는 아침 9 시에 일을 하는 사람이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매일매일 기도하고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오후 5 시에 일을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됩니다.

 

우리들은 내가 9 시에 있는가, 오후 5 시에 있는가

묵상해 봅시다.

하느님을 만나지 못하는 사람은 늘 불평을 합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사람은 항상 기뻐합니다.

 

선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마태 20,1~16) 

 

1  "하늘나라는 이와 비슷합다. 어떤 포도원 주인이 이른 새벽에

    일꾼(교회의 봉사자)을 구하러 밖으로 나왔습니다.

 

설명: 포도원 주인은 예수님을 상징합니다.

        우리들이 교회에서 봉사를 하는 것이

        포도원에서 농사를 짓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 봉사자로 택함을 받게 되면

        기쁘게 받아들여 불평을 하지 말고 봉사를 해야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입니다.

 

        반장으로 신부님께서 임명은 하시지만

        예수님께서 신부님의 마음을 움직여서 나를 불러서

        하느님의 포도원 일꾼으로 직책을 주시는 것임을 믿고

        기쁘게 봉사해야 합니다.

 

2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예수님 자신을 상징함)을 주기로

    합의하고 포도원으로 보냈는데, 

 

4  '당신들도 포도원으로 가시오. 정당한('디카이오스' 즉 의로움

    인데 이 의로움은 예수님 자신을 말합니다.) 삯(이 삯도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합니다.)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16  이와 같이 말째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말째가 될 것입니다."

 

설명: 우리들은 천국 가는데 그리스도 하나면 됩니다.

        그래서 일을 많이 하는 분이나 적게 하는 분이나

        한 '데나리온'인 그리스도를 주시는 것입니다.

 

        만약 그리스도 둘을 더 달라고 한다면

        예수님이 두 번 세 번 오셔서

        십자가에서 못박혀 돌아가셔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그리스도를 만나면 넘쳐 흐르니까

        더 달라고 하지를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못 만나니까 많이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침 9 시부터 오후 5 시까지 해(예수 그리스도 상징)

있는 동안, 즉 빛이 있는 동안 일을 해야 그리스도를 만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요한 8,12에서 예수님께서 "나는 세상의 빛이다." 고 하셨고,

        "빛이 있는 동안 일하고 걸어가라." 고 하셨습니다.

 

첫째와 말째는 신앙 생활을 먼저하는 것이 순서가 되는 것이 아니라,

나중에 봉사를 해도 주님을 만나서 불평 없이 기쁘게 사랑으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이 첫째가 되는 사람입니다.

 

여기에서는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고난을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세번 째 이야기를 하시는데,

 

큰 제목을 보면,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의 간청은

곧 인간의 마음과 육의 마음인 욕망을 예수님께 간청하는 것입니다.

 

내 아들 하나는 예수님의 오른편에

하나는 왼편에 있게 해달라는 것인데,

이런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고 "섬기는 사람이 되라." 하십니다.

 

또 오른편은 천국이나 왼편은 지옥이므로

그렇게 청하면 영적인 소경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제로 예리고의 두 소경을 치유하시면서

그렇게 모르고 청하면

예리고의 두 소경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들도 하느님의 말씀을 모르고 육안으로 보고 그렇게 기도를 하면

하느님께서 영적인 소경으로 보실 수 있으니까,

성서를 잘 볼 수 있도록 즉 사랑으로 볼 수 있도록,

깨달을 수 있도록 묵상하고 기도합시다.

 

수난과 부활에 대한 세 번째 예고(마태 20,17~19)

 

17  예수께서 예루살렘(예루살렘이라는 단어는 '하느님의 평화'

     라는 히브리말입니다.)으로 올라가실 때

     열두 제자를 따로 데리고 길에서 말씀하셨다.

 

18  "보시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갑니다.

    거기서 인자(인자는 예수님을 말합니다.)는 대제관들과

    율사들에게 넘겨질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인자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19  그를 이방인들에게 넘겨주어 조롱하고 채찍질하며 십자가형에

     처하도록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자는 사흗날에 일으켜질 것입니다.

 

설명: "일으켜질 것입니다." 라는 말은 헬라말로 '에게이로'인데,

         이는 부활한다는 뜻입니다.

         물론 걸어가다는 뜻과 일어선다는 뜻도 있습니다.

 

         여기에서는 예수님께서 세 번째 수난받고 죽으시고 부활할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들도 우리들의 십자가를 지고 죽어서

         우리들의 의 즉 사람의 의를 십자가에 못 박아야

         새로 태어날 수가 있습니다.

 

         우리들은 자존심 때문에  

          "속상하다. 마음상하다." 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리고 "자존심 상하다."고 말하며,

조금만 자존심을 건드리면 화를 내고 싸움을 하는 수가 있는데,

이는 아직 자존심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의 심령에 십자가 사건이 일어나서

       우리들의 마음을 버리고 죽어야 하는데 우리들의

       마음이 살아있기 때문에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간청(마태 20,20~23)

 

설명: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삼일 만에 부활하여

      새로운 나라를 세운다고 하시니까 세상의 나라인 줄 알고

  두 아들 중 하나는 우정승, 하나는 좌정승으로 써달라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영의정은 베드로 사도가 있으니까

        달라고 하지 못하고 우의정 좌의정을 달라고 하는데,

 

        예수님께서 세울 나라는

        하느님 나라라는 것을 모르고 청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서열의 다툼이 생기는 것입니다.

 

       하늘나라는 왕직, 섬기는 것 즉 봉사라는 것을 설명해 주시며

        하늘나라에서는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어서

        세상의 왕처럼 권력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 봉사를 하라고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22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청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들 있구려. 내가 마시려는

     잔(고난의 잔, 즉 죽음 상징.)을 마실 수 있습니까?"

     그들이 "할 수 있습니다." 하자

 

섬기는 사람이 되라(마태 20,20~28)

 

우리들은 세례를 받을 때

평신도 사제직과 예언직과 왕직을 받았습니다.

 

에수님께서 우리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수난받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처럼

 

우리들도 우리들의 십자가를 지고 죽어야

겸손하게 봉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자존심이 남아 있으면

화가 나서 봉사는 커녕 상처를 주고 싸움만 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변화되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우리들보고 자기들의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하십니다.

십자가를 지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처럼 우리들도 죽으라는 것인데

이 죽는 것은 마음을 버리라는 것입니다.

 

평신도 사제직 - 미사에 참례할 때 우리들의 희생과 삶을 가지고

                미사에 참례하므로써 우리들도 사제직에 참여

                하는 것입니다.

 

평신도 예언직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예언직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평신도 왕직 - 세상의 왕처럼 권력을 휘두르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섬김을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섬기러 오신 것처럼

우리들도 남을 섬기는 것이 왕직입니다.

 

물론 신부님들께서는

성직 사제직, 성직 예언직, 성직 왕직이 있는 것입니다. 

 

예리고의 두 소경을 낫게 하시다(마태 20,29~34)

 

여기에서 예리고의 소경 둘을 실제로 치유하시면서,

야고보와 요한에게 서열 다툼을 하면

너희들이 영적인 소경이라고 하시며 치유를 하십니다.

 

이 예화를 통해서 사도들 뿐만 아니라

오늘날의 이 성서를 읽으신 모든 분들도

야고보와 요한처럼 이 세상에서 서열 다툼을 하고 있으면

우리들보고도 영적인 소경들이라고  하실 것입니다.

 

반드시 우리들의 이 인간적인 마음을 치유받아야만 하겠습니다. 

 

30  맹인 두 사람(야고보와 요한을 가리킴)이  길가에서 앉아 있다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고

"불쌍히 여기소서, 다윗의 아드님( 메시아라는 뜻임)!" 하고 외쳤다.

 

31  군중이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으나 그들은 더욱 크게 외쳤다.

     (부르는 것이 기도입니다.)

     "불쌍히 여기소서. 주님, 다윗의 아드님!"

 

32  예수께서 멈추어 서서 그들을 불러 "무엇을 바랍니까?" 하시니

 

33  그들이 "주님, 눈을 뜨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설명: 물론 눈을 보게 하는 것을 통해서 영적인 눈을 떠서

        예수님을 메시아로 알아 보게 되었으며

        죄사함을 받고 부활을 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는 성서를 깨달아서 성서의 내용이 보이는 것이

        즉 성서가 열리는 것이 소경이 눈 뜨는 것입니다.

 

34  예수께서 측은히 여겨 눈을 만져 주셨다.

     (눈을 예수님께서 만져 주시는 것이 재창조, 새 창조입니다.)

     곧 그들은 다시 보게 되었고 예수를 따랐다.

 

설명: 보는 문제는 요한복음 8장에 자세히 나옵니다.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간음한 여인을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보는 것은

        잘 보는 것이고 살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사이들처럼 율법으로 보는 것은

        돌로 사람을 쳐서 죽이게 되며 잘 못 보는 것입니다.

 

        육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영안으로 보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사랑으로 완성을 하시는 것이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사랑의 안경을 끼고 볼수 있는 영적인 눈을 달라고 기도를 드립시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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