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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이 시대의 살아 있는 성인 <2>
작성자박영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7-25 조회수762 추천수9 반대(0) 신고

 

 실천하는 사랑

다시 윤택한 생활을 하게 된 캐더린은 전에 하느님께서 자신을 굶주림에서 구해 주셨을 때 했던 약속이 생각났다. 그녀는 그 생각만 하면 마음이 불편했고 편히 쉴 수도 없었으나, 달리 벗어날 길이 없었다.

예수님께서 부자 쳥년을 초대하시는 구절(마태19,21 참조)을 읽을 때마다 그녀의 내명에서 강한 충동이 일어남을 느꼈다.

그녀 자신도 말 그대로 자신이 가진 돈을 전부 나누어 주고 가난한 이들 가운데에서 그리스도를 섬기라고 부르심 받음을 감지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수많은 기도를 드리고 아들의 앞날을 챙겨 주고 주교의 격려를 받은 끝에 전격적으로 토론토의 빈민가로 들어가는 첫발자국을 내딛었다.

그녀의 계획은 그곳에서 소박하고 겸손한 태도로, 즉 "그들과 함께 가난하게 살면서 복음처럼 단순한 삶으로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증언하면서" 사람들을 섬기고 기도하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깊은 믿음과 하느님을 향한 열렬한 사랑에 감복한 이들이 그녀와 함께 일하고자 자청해 왔다. 초창기에 그녀와 함께 일했던 어떤 이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일찍이 하느님께 대해서 그만한 경외심과 친구 같은 그런 친근함을 가지고 말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마치 그 분이 살아 계신 것 같았다."

참으로 캐더린은 자신이 눈코 뜰 새 없어 바쁜 와중에도 주님을 향한 설레는 기쁨과 신뢰를 주위 사람들에게 전하고 있었다.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사람의 마음은 우물과 같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이 하늘에서 쉼 없이 내리는 비처럼 사람들이 길어갈 수 있게 그 우물을 가득 채웁니다."

1930~40년대에 그녀는 토론토와 시카고, 그 외 몇몇 도시에 '친교의 집'(Friendship House)이라는 이름의 공동체를 건설했다. 이곳은 가난한 이들에게 음식이나 옷가지, 그 밖의 여러 도움을 제공했다. 빈민가에 위치한 뉴욕시 분원은 백인과 흑인을 가리지 않고 봉사 활동을 펼쳐 흑인들의 시민권 운동에 예언자적 선구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한 캐더린의 활동은 저널리스트였던 에디 도허티의 관심을 끌게 되었다. 그는 캐더린이 하는 일들을 취재하여 기사를 썼고, 그 일을 계기로 두 삶은 사랑에 빠져 1943년에는 결혼을 하게 된다.

 

 마돈나 하우스의 탄생

1943년에 캐더린은 다시 한 번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는 전환기를 맞게 된다. 그녀는 자신들의 활동에 대해 그녀만큼 비전이 넓지 못했던 친교의 집 스탭들과 서로 다른 길로 갈라서는 아픔을 겪는데, 일단은 그로써 모든 게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와 에디는 농촌 지역의 빈민들에게 소박하게 봉사하고 숨어서 기도하는 삶을 찾아 캐나다의 온타리오 주에 있는 컴버미어라는 마을로 이주했다.

그러나 기도와 일에 동참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또다시 그리로 모여들었다. 1950년대에 그녀는 또 하나의 공동체를 창시하게 된다. 그녀는 그 공동체를 복되신 어머니의 이름을 따서 '마돈나 하우스'라고 이름 지었다.

 "나는 이토록 많은 삶들이 어째서 캐나다의 이 외진 골짜기까지 찾아 들어오는지 모르겠어요." 언젠가 캐더린은 감격스런 어조로 이렇게 말했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한 여인을, 자신들을 예수님께 인도할 수 있는 이를 보고 들은 것이다.

하지만 캐더린도 말했듯이, 사람들은 "마돈나 하우스에 머물면서 우리 가족, 우리 사랑의 공동체의 일원이 되는 것만으로도 삶의 자양분을 공급받기 때문"에 그곳으로 모여든다.

그녀는 이 세상이 가장 절실하게 필요로 하는 것은 더 많은 프로젝트나 프로그램이 아니라, 하느님의 손길로 곳곳에 꾸며진 작은 섬, 사랑의 공동체이면,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토마스 성인처럼 사랑이 만들어 내는 상처를 만질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살아 있는 유산

 캐더린은 남편 에디가 죽은지 거의 10년이 되는 1985년 12월 14일에 컴버미어에서 타계했다. 그녀가 남긴 가장 큰 성과라 할 수 있는 마돈나 하우스는 오늘날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는데, 가톨릭 교회에서 '공인된 그리스도교 신앙인 단체'로 공식 인준되었다.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는 18개의 분원에는 2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속해 있으며, 130명의 사제와 부제, 주교가 협력관계에 있다.

마돈나 하우스는 캐더린이 남긴 살아 있는 유산으로서, 우리가 어떻게 서로 사랑하면 복음을 실천할 수 있는지를 보여 준다. 종신회원들은 가난과 정결, 순명의 삶을 살기로 서약하며, 자신들에게 필요한 것을 얻어 쓰는 탁발생활을 하며 살고 있다.

 "우리는 이렇게 살아감으로써 이 세상의 가난한 이들, 즉 그리스도인 그들과 일치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캐더린은 설명했다.

그 공동체의 '삼위일체' 리더쉽은 그리스도 공동체 안에서 남녀가 어떻게 함께 살 수 있는가를 보여 주는 건강한 모델이 되고 있는데, 독신남과 여성, 사제를 위한 영적 지도자를 각각 한 명씩 두는 체제이다.

또한 마돈나 하우스의 사제와 평신도들이 각기 자신들에게 알맞은 역할 안에서 더불어 일하면서 관계를 맺는 방식도 좋은 모범사례가 되고 있다. 캐더린의 사제직에 대한 깊은 사랑과 이해를 바탕으로 사제 회원들은 그에 걸맞은 존경과 숭배를 받는다. 또한 마돈나 하우스는 창립자의 영성을 반영해서 동방 가톨릭과 로마 가톨릭의 교회 전례를 모두 인정하고 존중한다.

 

 작은 일, 큰 사랑

나는 교회로 다시 돌아온 지 일년 만에 처음으로 컴버미어를 방문했다. 주차장으로 차를 몰고 들어갈 때에 집으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이 나의 전신을 휘감았다. 그날 저녁 식사 시간에 나는 북미 전역과 그보다 더 먼 곳에서 온 사람들이 폭넓게 섞여 있는 마돈나 하우스의 '가족' 전부를 만났다.

나는 그들 사이에 얼마나 소박하며 편하게 대화가 오갈 수 있는지 깨닫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2주간 나는 마돈나 하우스에 찾아온 수천 명의 다른 '일하는 손님들'처럼 자신들의 공동체 생활을 영위하는 회원들의 삶에 동참했다. 그들은 설거지, 빨래, 청소, 화장실 청소, 풀베기, 땔감 만들기 같은 단순한 일을 하면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매일 미사를 하고 함께 식사를 하고 성경을 읽고 얼마간의 자유 시간을 보냈다. 그것은 나자렛 성가정처럼 겸손하고 드러내지 않는 생활이었다.

마돈나 하우스의 회원들은 '그 순간에 주어진 임무'를 열심히 행하면서 아니 같은 단순성을 기른다. 캐더린이 가르친 대로 그들의 영성은 '오로지 하느님의 사랑만이 동기가 되어 작은 일 하나하나를 지극한 정성으로 행하는 정신'이다.

리지외의 소화 데레사 성녀가 걸어간 '작은 길'처럼, 이 영성의 특징은 어느 누구에게나 완전히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사람의 나이가 몇이든 직업이 무엇이든 사는 곳이 어디든 누구나 실천할 수 있다.

보수를 받는 직장일이건 허드레 집안일이건 남을 대접하는 일이건, 심지어 장을 보거나 청구서를 지불하거나 기저귀를 갈거나 개를 산책시키는 일 같은 세속적인 일상사에서건 모든 일에 적용될 수 있다.

나는 컴버미어에 손님으로 머무는 동안 아무리 하찮은 일이라도 사랑으로 그 일을 하면 하느님과 더욱 가까워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까지도 나는 마돈나 하우스에서 배운 식대로 수건을 개고 비닐봉지를 씻으면서, '그 순간에 나에게 주어진 임무'를 완수하는 데에서 오는 평화와 은총을 체험한다.

나는 캐더린 도허티 덕분에 하느님의 광대무변한 계획 안에서 사랑으로 행할 때는 무엇이나 가치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말씀지기의 "내안의 말씀"> 에서

 

       

*이 글을 쓴 메리 바제트 나도는 뉴욕 주의 클라크 밀에 살며, 23년째 마돈나 하우스와 친교를 나누고 있다. 마돈나 하우스를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www.madonnahouse.org를, 캐더린 도허티에 대해서는 www.catherinedoherty.org를 방문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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