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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7-26 조회수883 추천수9 반대(0) 신고
 
 

<비유로 말씀하신 이유>


“내가 저 사람들에게 비유로 말하는 이유는 저들이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기 때문이다.”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가진 자는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진 것이 없는 자는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마태 13,10-17)



  인간의 언어는 어떤 사실을 전달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언어는 그 특성상 말하는 사람이 지닌 뜻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이해시키며 전달하는 데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더군다나 사물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사람의 생각이나 느낌을 전달하기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닙니다. 사물을 가리키더라도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설명하여 이해시키기란 너무나 어렵습니다. 그러다 보니 듣는 사람이 이해할 수 있도록 그가 아는 내용으로 비유해서 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듣는 사람도 체험을 다양하게 하여 말하려는 사람이 무엇을 의도하는지 새겨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사회적 약속이며 언어의 역할입니다.


  불가에서는 이렇게 말로 전달할 수 없는 경지를 언어도단(言語道斷)의 경지라고 표현합니다. 자기가 이전에 알아 왔던 언어체험과 경험을 넘어서 思考의 유추를 끊어 버려야 깨달을 수 있는 세계가 있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지금 언어도단의 경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누구도 보고 또 생각한 적이 없는 하느님나라와 당신의 아버지를 그려 보이고 있으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 가리켜 보이시는 세계를 눈으로 본 적이 없지만 그 세계를 말씀하시고 계시다는 것은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만 정신을 팔 것이 아니라, 말씀하실 때의 상황과 어투, 표정과 제스추어를 모두 종합적으로 그려보아야 합니다. 그래야 말씀하시는 의도를 조금이나마 올바르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이 대목에서 열쇠가 되는 장면은 “너희의 눈은 볼 수 있으니 행복하고, 너희의 귀는 들을 수 있으니 행복하다. 많은 예언자와 의인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고자 갈망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듣고자 갈망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라고 말씀하시는 장면입니다.


  너희는 보고 들었다고 선언하시는 모습을 우리는 느껴 보아야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어떤 모습을 하시고 계셨을까, 제자들은 어떤 생각을 했었을까하고 관상해 보아야합니다. 이 장면이 제대로 관상이 되면 나머지 이상야릇한 표현은 그야말로 바른 길로 이끌기 위한 방편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 말 뒤에 숨어 있는 또 다른 세계를 깨우칠 수 있습니다.


  그럼 제가 어제 쓴 시를 예를 들어 어떤 생각을 전하려고 했는지 설명해 보겠습니다.


<이슬과 땀방울> ... 윤경재


동틀 무렵/ 두텁게 가슴을 감싸 안으며/ 피어오르는 새벽안개는/

맑은 꽃잎에 맺혀질/ 영롱한 사랑/ 아침이슬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조명이 꺼진 뒤/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간/ 향기와 꿈을 건져 보려 애쓰는/

단역배우의 무대 아래 인사는


익숙해져/ 너무 익숙해져 진부한/ 몸짓과 표정을 재창조하기위해/

새벽이 오기까지 몸 열어두고/ 땀 흘리는 수련입니다


또로록 맺힌/ 이슬과 땀방울 안에는/ 연민을 담아 둘 공간이 없습니다/

오직 살아 있다는 느낌뿐


가을걷이 끝난 들판/ 춤추는 고추잠자리를/

맨손으로 잡아채는/ 꼬마아이의 희열입니다.


이 시에서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자아를 일상 속에서) 재창조하기 위해 몸 열어두고” 입니다.


  이 한 줄의 정서를 표현하고 독자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새벽안개, 이슬, 손가락 사이로 빠져 나감, 초짜 배우, 수련, 연민, 살아 있다는 느낌, 가을, 고추잠자리, 맨손, 꼬마아이, 희열이라는 상황과 수식어가 동원된 것입니다.


  어렵지 않은 시이지만 자칫하면 다른 방향으로 감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주제를 확실하게 파악하는 것이 시 감상에 도움이 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요지는 바로 이 것입니다. “이스라엘인들이 여태껏 배워온 대로가 아니라 하느님나라는 다른 모습으로 왔다고 말해 주었다. 그것을 위해 내가 모든 것을 다 보여 주고 다 말해 주었다. 너희는 나와 함께 살아오면서 무엇인가 깨달은 것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나라를 가리켜 보인 것이다. 내가 말하고 몸으로 보여준 것이 바로 하느님나라이다. 그러니 언제나 그 내용을 기억하고, 기쁨과 어려움들에 마주칠 때마다 되새겨 보아라.”


  이 말씀을 들은 제자들은 이제 확실하게 하느님나라가 어떤 모습인지 깨달았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생각하듯 자신들과 전혀 동떨어진 세계가 아니라 주님과 함께 살아왔던 그 자체가 하느님나라라는 것을 분명히 알게 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은 아무리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들어오셔서 당신의 현존을 보여주고 말씀해 주셨어도 알아들을 수 없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들어오신 주님을 그냥 흘려보낸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세상에 현존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인식하면 모든 의심이 사라질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시다는 믿음을 붙잡아야 하는 것입니다. 현세가 그저 하느님나라를 향해 거쳐 가는 길목이 아니라 이미 들어온 하느님나라라는 말씀을 보아야 합니다. 그러기에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어 행복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 외에 다른 것은 어쩌면 수식어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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