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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379) 꿈과 현실의 짧은 만남 / 전 원 신부님
작성자유정자 쪽지 캡슐 작성일2007-07-26 조회수887 추천수10 반대(0) 신고
 
 
 
 
                                     꿈과 현실의 짧은 만남
 
 
                                                     글 : 전 원 바르톨로메오 신부(말씀지기 주간)
 
 
무더위가 한창 기승을 부리는 작년 여름,  제주도 남쪽 마라도를 다녀왔습니다.
그 섬을 예정도 없이 찾아간 이유는 단순히 우리나라 최남단에 위치한 관광지이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강의 때문에 제주도를 드나들면서 그곳 마라도에 누군가 와서 살아주기를 기다리는 아름다운 빈 성당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입니다.
 
도시 한복판에 살면서 일과 사람에 지쳐갈 때마다 한적한 곳에서 피정집을 하며 살고 싶다고 자주 푸념을 늘어놓던 터라, 그 이야기를 들은 순간부터 꼭 한번 그 섬에 가보고 싶었습니다.
더욱이 청소년 시절 사춘기 방황을 감당할 수 없어 외딴섬의 등대지기가 되겠다고 한참동안 열병을 앓았던 기억마저 되살아나면서, 마치 향수병이 도진 사람처럼 그 섬에 갈 기회를 찾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모슬포 항에서 관광객을 가득 실은 배는 마라도에 도착하자 벼랑을 깎아 만든 좁은 선착장에 우리 일행을 쏟아내었습니다.
더위를 식혀줄 나무 한 그루 없는 작은 섬이 더운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습니다.
 
마치 아프리카 오지의 낯선 섬에 선교사로 파견된 사람처럼, 8월 한낮의 뙤약볕 아래 땀을 뻘뻘 흘리며 섬 남쪽 부근 등대가 서 있는 자리 가까이에 있는 빈 성당 건물을 찾아갔습니다.
삼사십 명의 사람들이 들어서면 꽉 찰 것만 같은 작은 성당이 마치 한 마리의 전복이 바닷물에 잠기지 못해 목이 말라 바다를 그리워하듯 서 있었습니다.
 
콘크리트 구조물은 제법 잘 보존되어 있었지만 문을 제대로 열기도 힘들 정도로 해풍에 자물쇠들이 녹이 슬어 있었고,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냉난방 기구들은 이미 사용이 불가능할 정도로 부식되어 있었습니다.
 
그곳 성당 건물은 어느 수도회의 수사님이 그곳에서 선교를 꿈꾸며 모금을 하여 꽤 많은 돈을 들여 지은 건물이었습니다.
그러나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결국 수도회에서 그곳 사목을 포기하고 제주교구에 건물을 고스란히 넘겨 준 상태였습니다.
 
 
성당 안에 오랫동안 갇혀 있던 후끈한 공기를 뚫고서 사다리를 타듯 옥탑방으로 올라갔습니다. 한두 평 크기의 3층 옥탑방에는 누군가 잠을 자고 떠난 듯 아직도 이부자리가 고스란히 깔린 채 돌아올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개켜지지도 않은 이부자리를 보며 저는 갑자기 그곳에서 마지막 잠을 자고 이 성당의 문을 잠그고 떠난 그 누군가가 궁금해졌습니다.
 
 
 
 
어쩌면 그도 저처럼 어릴 적 외딴 섬의 등대지기를 꿈꾸다 수도사가 되어 그 섬을 찾았는지도 모릅니다.
밤하늘에 떠 있는  별과 달, 무한히 펼쳐진 태평양의 검푸른 밤바다를 바라보면서
하느님과의 깊은 만남을 꿈꾸며 그곳 마라도에서의 삶을 시작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꿈은 현실과 달라서 그는 그곳의 열악한 환경을 견디기가 어려웠으리라 쉽게 짐작이 됩니다.
 
섬에는 우물이 없어 허드렛물마저도 집수정에 빗물을 받아 써야 하고,
뱃길 30여분 거리의 모슬포 항에서 식료품과 생수를 조달받아야만 하는 불편한 환경이,
더 이상 그곳의 삶을 지탱하기 어렵게 했을 것입니다.
설령 그런 어려움을 감수하고 살았다고 해도 어쩌면 그는 그 섬에서 살아야 할 의미를 잃었는지도 모릅니다.
뱃시간을 맞추어 사람들이 밀물처럼 몰려들어왔다가, 군데군데 사진이나 찍으며
작은 섬을 돌다가 시간이 되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일과를 매일 마주하면서,
그는 그 섬에 자신이 존재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는지도 모릅니다.
 
바다는 산이나 들판과 달라서 탁 트인 듯하지만 이내 내가 한 발도 더 나갈 수 없는 장벽보다 더 암담한 고립된 공간을 만들어냅니다.
고독보다 더 무서운, 섬이 주는 고립감이 어쩌면 갈등하고 있는 그에게 더더욱 섬을 떠나도록 재촉했을 것입니다.
 
날이 새면 섬을 떠나야 할 그 사람은 이곳 좁은 옥탑방에서 이부자리를 깔고 턱을 괴고 엎드려 작은 창문으로 마라도의 짙은 밤풍경을 바라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상과 현실의 높은 장벽을 절감하면서 자신의 오랜 꿈을 접으며 깊은 고뇌 속에 마지막 밤을 지새웠을 것입니다.
 
저는 옥탑방에 여운처럼 남아 있는 누군가의 흔적을 바라보며 마치 내가 이 섬에 살러왔다가 더 이상 살 수 없는 구실을 찾아내듯,  떠난 사람의 마음을 헤아리며 내 삶의 변명거리를 찾고 있었습니다.
 
 
 
 
한 두 시간 머문 짧은 방문이었지만 마라도의 빈 성당 풍경이 여전히 머릿속을 맴돌고 있습니다. 마치 한 마리의 전복이 육지의 삶을 꿈꾸며 파도를 타고 뭍으로 올라왔다가 결국 빈 껍질로만 남아 있듯, 그곳 성당은 나의 꿈과 현실의 어떤 만남을 이야기해 주는 듯합니다.
 
그곳은 나의 꿈과는 달리 허약한 처지로는 넘어 설 수 없는 현실의 장소였습니다.
등대지기의 노랫말처럼 고독과 가난을 살아가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삶을 꿈꾸지만 
아직은 다가갈 수 없는 외딴섬의 빈 공간일 뿐이었습니다.
 
우리나라 최남단 마라도 끝자락에 목마름처럼 서 있는 빈 성당은 어릴적 등대지기의 삶을 그리워하던 나의 꿈과 현실 사이에 짧은 만남을 이루게 했습니다.
그리고 꿈과 현실의 거리만큼 한 사제로서 아직도 가야 할 먼 길이 남아 있음을 알려 주었습니다.
 
 
누군가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미완의 꿈이 담겨 있는 마라도의 빈 성당 ㅡ
꿈을 간직하고도 아직 이루지 못한 모든 이들의 현실공간은 아닐런지요?
 
                             ㅡ말씀지기에 실린  (편집자 레터)전문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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