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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김대건 신부께 감사하는 마음
작성자지요하 쪽지 캡슐 작성일2007-07-26 조회수519 추천수7 반대(0) 신고

                                김대건 신부께 감사하는 마음 


        


▲ 천주교 대전교구는 지난해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순교 160주년을 기념하여 '유해 순회 기도회'를 실시했다. 김대건 신부의 유해는 교구내 신학교와 각 성당과 수도회들을 순회하던 중 9월 12일에는 태안 성당을 찾았다.  
ⓒ 지요하

매년 7월 5일은 한국천주교회 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가톨릭 교회들이 한국의 김대건 신부를 기념하는 날이다. 이름하여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聖)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대축일'이다. 이날은 세계의 모든 가톨릭 교회들이 한국인 최초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순교 성덕을 기념하고 그의 전구(轉求)를 기원하는 미사를 지낸다.

7월 5일이 김대건 사제 순교자 대축일인 것은, 1925년 7월 5일 비오 11세 교황이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79명의 한국 순교자들을 '복자'의 반열에 올린 것으로부터 유래한다. 1949년 11월 25일 비오 12세 교황은 김대건 신부를 '한국 모든 성직자의 수호자'로 선포하였고, 1984년 5월 6일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을 맞이하여 서울 여의도에서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103명의 한국 순교자들을 '성인'의 반열에 들게 했다.

천주교회에서 '복자(福者)'란 한 개 국가나 일정 지역에서 공경하고 기념하는 분들이고, '성인(聖人)'이란 전 세계교회가 함께 공경하고 기념하는 분들을 이르는 이름이다.

또 천주교회에서는 기념일을 '축일'이라고 부르는데, 일년 365일이 다 축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축일이 많다. 예수부활대축일과 예수성탄대축일, 교회 창립기념일인 성령강림대축일을 비롯하여 성서에 등장하는 수많은 크고 작은 사건들을 기념하는 축일들이 있고, 여기에 교회에서 선포한 축일들과 성인들을 기념하는 축일들이 있다.

하나같이 '교회력/전례력'에 명확히 표기되는 날들이다. 그러니까 세계교회가 한가지로 사용하는 매년의 교회력에 7월 5일은 '한국 성직자들의 수호자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 순교자 축일'로 표기되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전국의 거의 모든 성당들이 7월 5일 당일에 '경축미사'를 지내고, 또 축일 다음에 오는 주일에도 '경축이동 미사'를 지낸다. 신자들은 매년 김대건 사제 축일을 지낼 때마다 세계교회가 오늘 한가지로 한국의 김대건 신부를 기념한다는 사실에서 남다른 자부심을 갖는다.

김대건 신부는 26세, 꽃다운 나이로 이승의 삶을 마감하신 분이다. 짧은 생애였지만 참으로 극적인 일들이 많았고,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그는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두 명의 동료와 함께) 서양 학문을 종합적으로, 또 체계적으로 공부한 사람인데, 그의 천재성은 큰 경탄을 자아낸다.

그는 16세 때 신학생으로 선발된 직후부터 라틴어를 배웠다(라틴어는 모든 천주교 사제들이 기본적으로 배우는 언어로서 서양 각 언어들의 모체이기도 하다). 그리고 압록강 변문에서부터 중국 대륙을 걸어서 마카오에 도착하는 6개월 동안 중국어를 익혔다.

마카오에서 프랑스 신부들에게서 철학과 신학을 배우는 동안 프랑스어를 완벽하게 익혔다. 또 마카오의 민란으로 두 번 필리핀 마닐라에 피신해 있는 동안에는 당시 필리핀이 스페인 식민지였던 사정과 관련하여 스페인어도 배우고 동시에 영어도 공부했다. 그리하여 그는 라틴어는 물론이고 4개 언어를 능통하게 구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16세 어린 소년이 부모와 생이별하고 고향을 떠나 중국 대륙을 6개월을 걸어서 이역만리 마카오로 가는 과정도 극적이지만,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긴 험난한 그의 신앙 역정은 우리로 하여금 절로 하느님 존재를 생각케 하면서 옷깃을 여미게 한다.

몰론 가장 처절하고도 극적인 부분은 순교를 하는 과정이다. 연평도 부근 순위도에서 관헌들에게 체포된 그는 서울 포청으로 압송되어 3개월 동안 무려 40차례의 문초를 받았다. 혹독한 고문과 많은 회유가 그를 괴롭혔다. 조선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서양 학문을 배우고 여러 개 언어를 구사하는 그를 나랏일에 활용해보려고 조정에서는 집요하게 회유를 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하느님을 배반하지 않고 순교를 원했고, 1946년 9월 16일 마침내 한강 새남터에서 군문 효수형으로 순교의 화관을 썼다.

그는 다수의 옥중서신을 포함하여 도합 25통의 편지를 남겼는데, 한글과 한문, 라틴어와 프랑스어 등으로 씌어진 편지들은 그의 신앙 세계와 사상을 알게 하는 귀중한 자료로 오늘에도 잘 보존이 되고 있다.

나는 매년 7월 5일 김대건 사제 대축일과 9월 20일 '한국순교자대축일'을 지낼 때마다 김대건 사제에게 각별한 고마움을 느낀다. 그가 만약 순교를 하지 않고, 혹독한 고문과 조정의 집요한 회유에 못 이겨 배교를 했다면, 그 후의 한국교회와 더 나아가 한국 사회는 어떤 형태로 오늘에 이르렀을까 하는 의문을 가져보곤 한다.

한국인 최초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만약 배교를 했다면, 한국교회의 모습은 결코 영광스럽지도 않고, 튼실한 상태일 수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한국 사회의 가치관에도 매우 부정적인 영향을 지속적으로 끼칠 것임이 분명하다.

한국천주교회는 한국인 최초 사제인 김대건 신부의 '순교'라는 참으로 튼실하고도 보배로운 기반 위에 서 있다. 그 기반에는 또 103위 순교 성인과 1만 명이 넘을 것으로 추산되는 유명/무명 순교자들이 있다. 그 영광스러운 한국교회의 기반 위에서 한국 사회 전반에도 알게 모르게 매우 긍정적인 작용이 생겨날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한국인 최초 사제가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복음을 증거한 순교자라는 사실, 세계교회가 한가지로 기념하고 공경하는 분이라는 사실은 개신교 신자들에게도, 더 나아가 종교를 초월하여 모든 한국인들에게 긍지를 심어주는 일이 될 것으로 믿는다.  


덧붙이는 글

이 글은 충남 태안의 <태안신문> 7월 26일치 '태안 칼럼' 난에 게재된 글입니다.

  
  2007-07-26 12:08
ⓒ 2007 Ohmy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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