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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좌절의 계절에 ... 차동엽 신부님 **
작성자이은숙 쪽지 캡슐 작성일2007-07-30 조회수1,141 추천수11 반대(0) 신고

 

 

좌절의 계절에


  누구에게나 좌절의 때가 있다.

  계획한 일이 뜻대로 안 풀릴 때가 있다. 안 풀리는 정도가 아니라 폭삭 망할 때가 있다. 학업, 직업, 사업 등의 영역에서 처절하게 쓴 잔을 마실 때가 있다. 혹은 낙방으로, 혹은 해직으로, 혹은 부도로 인해 절망의 나락에 떨어질 때가 있다. 하여 생존을 걸고 번뇌할 때가 있다. 

  관계가 엉망이 될 때가 있다. 좋던 사이가 아예 원수지간이 되어버릴 때가 있다. 우정, 연인, 가족 사이에서 쓰라린 균열이 생길 때가 있다. 배신, 실망, 불화 등이 애간장을 태울 때가 있다. 아니 하늘이 무너질 때가 있다.

  요즈음 반가운 얘기를 접할 기회가 별로 없다. 경제와 정치 쪽에서는 신통치 않은 소식만 들려온다. 사회와 문화 쪽에서는 연일 전달되는 충격보도로 감각마비 증상까지 생겨나고 있다. 거리 어디를 가든 냉소가 춤추고, 불신이 나뒹굴고, 체념이 널 부러져 있다. 좁은 땅덩어리에서 분열과 시기가 그나마 유일한 자산인 민족적 저력을 흐트러뜨리고 있다.

  이 마당에 우리 종교인들은 과연 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불교, 천주교, 개신교가 저마다 자신의 신념을 살아가면서 제 몫을 다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과연 저마다 좌절한 이들에게 위로와 희망이 되고 있으며, 기댈 하늘이 무너진 이들에게 다시 하늘을 회복시켜 주고 있으며, 총체적 부진 속에서 탈출구를 찾고 있는 민족에게 빛이 되어 주고 있는가?

 지금은 비난의 때가 아니라 자성의 때이다. 답은 남의 눈에 있는 티를 탓하는데 있지 않고 내 눈 속의 들보를 빼내려는 자세에 있다. 너는 왜 네 몫을 못하고 있느냐를 따지는 데 있지 않고 나는 왜 내 몫을 못하고 있는지를 성찰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초점을 좁혀 자신을 보자. 자신이 좌절 속에 있거든 어떻게 그 좌절을 이겨낼 수 있을까에 골몰하자. 관계가 엉망이 되어 있거든 어떻게 그 관계를 회복할 수 있을지에 집중하자. 자신이 침체에 빠져 있거든 어떻게 그 침체를 벗어날 수 있을지를 고민해 보자. 이제껏 자신이 본분에 충실치 못했거든 어떻게 그 본분으로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를 숙고해 보자.

  

6주간 재활학교


  그 때의 제자들도 그랬다. 그들의 원대한 기대는 두목 예수의 어이없는 처형으로 졸지에 허물어져버렸다. 그 이상이었다. 잔당을 찾는 로마군의 수배를 피해 우선 목숨이라도 부지하면 다행인 그런 형국이었다. 그들의 선택은 확실하였다. 줄행랑이었다.

  “그때에 제자들은 예수를 버리고 모두 달아났다.”(마르 14,50)

  그들의 수장이었던 베드로는 예수를 세 번이나 부인하였다. 세 번째 때에는 “거짓말이라면 천벌이라도 받겠다”고 맹세까지 하였다(마태 26,74).

  계획과 꿈만 실패로 돌아간 것이 아니었다. 이쯤 되면 관계도 끝장난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이 25시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어찌된 영문인지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누구도 예기치 못했던 뒤집기가 현실이 되었다. 훗날 사도행전은 이를 종합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돌아가신 뒤에 다시 살아나셔서 사십일 동안 사도들에게 자주 나타나시어 여러 가지 확실한 증거로써 당신이 여전히 살아 계시다는 것을 보여 주시며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들려 주셨다.”(사도1,3)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40일 동안 자주 나타나시면서 흩어진 제자들을 다시 모아들이셨다. 동시에 떨어진 사기를 끌어 올리시고 동강난 비전을 붙여 세우셨다. 이를 우리는 ‘6주간의 재활학교’라고 부를 수 있으리라. 그러면 재활수업의 요점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이것이 오늘의 우리가 알고 싶은 바이다. 우리가 가든 그들이 오든 그 현장으로 들어가 보자. 재활수업은 다음과 같은 징검다리로 이어져 있다.


  하나, 갈릴레아로 가라

  부활하신 예수님은 마리아 막달레나를 통하여 제자들에게 ‘갈릴레아로 가라’는 전갈을 보내셨다.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레아로 가라고 전하여라. 그들은 거기서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마태 28,10)

  왜 그러셨을까? 무슨 이유로 예루살렘이 아니고 갈릴레아에서 보자고 하셨을까? 물론 예루살렘은 위험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만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었던 것 같다. 외부의 도전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내부의 위기감이었다는 점을 우리는 간과할 수 없다. 제자들 사이의 분열, 극심한 공포, 패배의식, 겸연쩍음 등 내부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했을 것이다.

  예수님의 약방문은 명처방이었다. 갈릴레아는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처음 만난 곳이요, 첫 번째 신앙의 결단을 내렸던 곳이요, 첫 번째 비전이 움트던 곳이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서 “처음에 지녔던 사랑”(묵시2,5)을 되살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 떨리는 감동을 회복시켜 주고자 하셨던 것이다.

  기억상실증이나 의욕상실증에 걸린 사람에게는 쓰던 물건의 냄새가 도움이 된다고 한다. 옛 정취가 기억과 의욕을 되살려 준다고 한다. 모르긴 모르되 갈릴레아 호수의 향취를 머금은 바람을 맞으며 제자들의 마음속에서는 다시 사랑이, 다시 믿음이, 다시 꿈이 꿈틀거리기 시작했으리라. 

  저마다 자신의 ‘갈릴레아’가 있다. 갈릴레아로 돌아가자. 거기서 첫 사랑, 첫 마음, 첫 결심을 만나자. 첫 믿음, 첫 비전을 일으켜 세우자.


  둘, 만져보아라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의심 많은 토마스를 나무라지 않으셨다. 오히려 토마스의 수준과 방법으로 의심을 일소해 주셨다. “네 손가락으로 내 손을 만져 보아라. 또 네 손을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요한 20,28)

  사람의 이성과 오관이 인식할 수 있는 진리는 전체 진리의 1%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기에 나머지 99%의 진리는 우리에게 미지의 영역으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99%의 세계는 엄연히 비현실세계가 아니고 현실세계이다. 우리 주변에서 ‘갑자기’, ‘이유 없이’, ‘우연히’ 발생하는 사건들이 사실은 이 99%에 해당하는 현상들이다.

  토마스는 1%의 세계에서 예수님의 행적을 바라본 제자였다. 그의 인식구조는 철저히 3차원에 갇혀있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토마스에게 ‘봄’과 ‘만짐’을 통하여 1%의 세계를 사는 이들의 인식조건을 충족시켜 주시되 거기에 머물지 않으셨다.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고 하심으로써 99%의 세계로 토마스를 초대한 것이다. 4차원의 세계에 눈을 돌리도록 하신 것이다. 이로써 토마스는 ‘갑자기’가 ‘점점’으로, ‘이유 없이’가 ‘때문에’로, ‘우연히’가 ‘필연적으로’로 새롭게 파악되는 세계의 문턱에 들어서게 된다. 문턱을 들어서며 토마스는 고백한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요한 20, 28)

  그동안 우리가 실패와 단절과 부진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던 것은 어쩌면 1%의 세계에서만 허우적거렸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과감히 99%의 세계에 마음을 열면 길이 트일 수 있다는 사실에 눈감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바보같이 고집부리지 말자. 1%의 세계에 집착하지 말자. 판단과 느낌에 매여 살지 말자. 믿음으로, 신념으로, 비전으로 사는 법을 새롭게 배워보자. 1%의 우물 안에서 갇혀 살지 말고 99%의 드넓은 가능성의 하늘을 바라보면서 살기로 하자.

  

  셋, 배 오른편에 그물을 던져라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보아라”(요한 21,6)하심으로 물고기를 153마리나 잡게 한 풍어의 기적은 잊었던 기억을 되살려 주었다. 전문 어부인 자신들이 ‘밤새도록’ 헛고생만 하였는데 주님의 말씀 한 마디로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게 되었다는 기억이었다. 곧 전문가의 지혜보다 주님의 말씀 한마디가 더 깊은 지혜를 담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해 준 기억이었다. 단지 그 이전의 말씀이 “깊은 곳에 가서 그물을 쳐라”(루가 5,4-7)였다는 점 이외에는 던져주는 메시지가 동일한 것이었다.

  이제 제자들은 선명하게 배웠다. 교훈은 명료하였다. 언제고 세상의 지식이 한계에 부딪치거든 주님 말씀을 붙들고 살라! 바로 이것을 제자들은 거듭 확인하였다. 그리하면 내가 ‘지금’ 너희와 더불어 고기를 구워먹으며 함께 있듯이 늘 같이 있겠노라. 그렇게 가까이 늘 곁에 있어 주겠노라.   

  다시 말씀을 붙들고 살자. 가르침을 따라 살고 약속을 붙들고 살자. 분부대로 실행하자. 어느 영역이든 153마리가 문제이겠는가. 


  넷,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재신임하셨다. 다시 큰일을 맡기고자 하셨다. 하지만 무조건은 아니셨다. 딱 하나 확인하실 것이 있으셨다. 그래서 물으셨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그것도 세 번이나 물으셨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예수를 세 번 배반한 이후 ‘삼(3)’, ‘셋’ 자만 봐도 경기를 하던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일부러 세 번 물으셨다.

  베드로는 꼬박 세 번 ‘사랑’을 고백해야 했다. 그 때마다 “내 양들을 돌보아라”라는 사명을 받았다. 직분을 수행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교육시키셨던 것이다.

  무엇을 하든, 누구를 대하든 ‘사랑’으로 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면 결과의 성패에서 자유로워진다.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실적, 공적, 업적은 중요한 일이 아니다. 사랑이 중요한 것이다. 사랑으로 한 일은 어느 순간에도 좌절하지 않는다. 사랑이 한 일은 실패가 없다. 그러므로 일을 추스르기 전에 다시 사랑을 추슬러야 한다. 관계를 개선하기 전에 먼저 사랑을 점검해 봐야 한다. 무엇이건 도모하기 전에 먼저 사랑을 챙겨야 한다.


  이 이상의 커리큘럼이 있을까? 세상에 이렇게 감동을 주는 학교가 다시 있을까? 단 6주만에 제자들은 상처와 좌절로부터 회복되었다. 의욕이 되살아났다. 사기와 꿈이 다시 충전되었다. 출정준비가 완료되어 있었다. 그래서 주님께 물었다. “주님, 주님께서 이스라엘 왕국을 다시 세워주실 때가 바로 지금입니까?”(사도 1, 6)

  우리도 제자들과 함께 다시 갈릴레아로 돌아가 보자. 거기서 주님의 처방대로 실행해 보자.  꿈틀거려보자. 일어서 보자. 허리띠를 바꿔 매보자. 어지간히 채비가 갖추어지거든 우리도 주님께 물어보자. “주님, 지금이 그때이니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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