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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하늘나라 가는 고기!
작성자임성호 쪽지 캡슐 작성일2007-08-02 조회수711 추천수2 반대(0) 신고

 

그물에 끌어 올려 졌을 때, 버려지지 않고 선택되어 하늘 나라로 가는 길은

어디에 있는가?

결국은 우리의 믿음과 실생활의 삶에 달린 것이다. 

 

어찌보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이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임을 믿는 것은 아주 쉽다.

 

그러나, 그 분이 가신 길인 죽음과 부활의 길은 실생활에서 따라 가기는 아주 어렵다.

 

왜냐?

 단순히 믿는다고, 동의하는 것이 아닌, 

자신의 생명을 내놓는 일이기 때문이다. 남을 위해서 자신의 소유와 권리를 포기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말처럼 쉽지가 않다. 예수님은 당신이 그리스도로서 부여받은 사명을 엘리야와 모세로부터 직접 들었으면서도 피땀을 흘리는 기도를 하지 않으셨던가? 그만큼 이길은 가는 것이 힘들다는 얘기이다.

 

 사랑은 좋고 달콤하다. 그러나 사랑의 길을 간다는 것은 자신의 것을 내어놓는 것이다. 자신의 생명을 내놓는 일이다.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죽음의 길이다. 

 

 이런 역설이 없다. 인간적으로 볼 때 죽음의 길을 가는 사람이 하느님의 뜻으로는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이 역설을 어찌 할것이냐?

 

혹자는 얘기하기도 한다. 유다가 배반하지 않아서 돈을 받고 예수님을 팔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리지도 않았을 것으로 얘기한다.

 그러나, 이미 예수님의 길도,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길도 정해져 있는 것이다.

우리도 주어진 길에서 잘못살면 버려진 고기가 될 수 있다. 우리가 결정적인 순간에

선택된 고기가 되려면  제대로 복음을 살아야 함을 알수가 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 아버지께서 정하신 길을 가듯이 우리도 우리에게 정해진

생명의 길을 가야만 하는 것이다. 그 길은 가고 싶지 않다고 안 가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이미 태어날 때 부터 정해진 길이다. 그러나, 예수님을 따라 복음을 사는

그 길의 끝에는 부활이 있는 것이다. 선택된 고기가 되는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죽었다가 다시 부활한 사람은 없다. 혹 죽었다가 깨어난 사람도 있긴 하지만 스스로 그렇게 부활한다고 미리 예고한 사람은 없다.

 

나자로나 길에서 만난 장례 행렬에서 죽었던 젊은이, 방에서 죽었다고 사람들이 얘기한 소녀와 같은 사람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지만 그것은 본인들이 부활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능력으로 가능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 중에 어느 누구도 사전에 나는 부활한다고 한 사람들이 아니었으면, 죽음에서 깨어난 이후에도 나는 부활했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자로처럼 예수님의 시중을 드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었다.

 

죽음은 모든 것을 과거로 만들어 버린다. 그 사람이 이 세상에서 아무리 훌륭한 일을 했고, 부귀영화를 누렸다 하더라도 죽는 그 순간에는 그 개인과 그가 소유한 모든 것이 단절되어 버리고 명예, 돈, 지위등 일체의 모든 것이 과거의 것이 되어버린다.

 

 그래서 죽음은 인간과 신의 차이를 극명하게 드러내 주는 사건이다. 오직 신만이 죽음을 극복할 수가 있는 것이다. 오직 불가능이 없으신 하느님만이 죽음을 이길 수가 있는 것이다.

 

오직 하느님만이 죽음을 넘나들 수 있는 것이다. 죽음이 모든 것을 과거로 만들지만, 하느님의 능력을 통해서 그 과거가 미래와 현재가 여전히 소통되는 것이다.

 

인간은 죽음으로 모든 것을 잃어버리지만, 신은 오히려 그 죽음을 통해서 당신을 드러내고 잃어버린 모든 것을 되찾게 해 줄 뿐만 아니라, 나아가 죽음 이후의 세계에 대하여 희망과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갖게 한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신이라 하더라도 우리 자신을 인간과 다르게 드러내는 방법은 무었이 되겠는가? 바로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것을 통해서 신의 모습을 드러내지 않겠는가? 그것이 바로 죽음이라는 사건이다.

 

그러니 삼위일체 차원에서 신의 존재이셨던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와서 당신을 드러내는 방법은 이미 당신께서 태어나실 때부터 정해져 있었던 것이다.

 

모세와 엘리야와의 만남은  그 정해지신 길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리스도임을 받아들이는 것은 베드로에게 쉬운 일이지만, 그리스도가 가야할 길이 죽음과 부활의 길임을 받아 들이들이기는 쉽지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리스도로서 주어진 길을 가셨고, 그런 베드로 사도도 결국 예수님을 따라서 같은 길을 가신 것이다. 죽음과 부활의 길을 가신 것이다.

 

결국 우리의 갈 길도 같은 길이다. 부족하더라도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의 길도 그 본질에서는 같다.

 

우리의 삶이 어떤 다양한 모습의 삶이라 하더라도 그 본질적인 모습은 죽음과 부활의 길이다.

 

사람은 언젠가는 죽음을 맞이한다. 그 개인의 죽음 뒤에 부활이 있는 죽음인가 그렇지 않은가의 차이 뿐이다. 버려지지 않은 고기는 부활이 있는 것이고, 버려진 고기의 신세는

이를 갈고 원통해 하며, 울부 짓는 것이다.

 부활이 있는 죽음을 맞기 위해서 우리가 할일은 한가지 뿐이다. 사랑이다.

 자신을 버리는 사랑을 통해서 내가 만나는 시간과 공간에서 이웃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게 하는 것! 그 숫자가 미미하더라도 상관 없다. 몇 만명을 사랑한 사람이나 몇 명 만을 사랑한 사람이나 하느님 눈에는 별로 차이가 없다.

천년도 하루같은 하느님 눈에는 몇 십년의 차이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내가 사랑한 사람의 수도 마찬가지다. 몇 만명을 사랑했건, 몇 명을 사랑했건 하느님은 그 마음을 보는 것이다. 진실로 사랑한 그 마음을 보는 것이다.  

하느님은 양적인 분이 아니시고 질적인 분이시다. 마음을 보시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늘 마음 속에 사랑을 품고, 그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

얼마나 많이 사랑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을 사랑하더라도 진실로 사랑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오늘 내가 만나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이웃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게하기 위해서 그 이웃들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

 그것이 전부다.

 

마음에 드는 이웃이든... 그렇지 않은 이웃이든...

 

선인이든... 죄인이든...

 

하느님의 햇빛이 모든 이에게 빛을 비추는 것처럼 모든이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비가 모든 이에게 비를 내리는 것처럼 모든이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내는 것이다. 그것이 전부다.

 

바로 십자가의 길이다. 죽음과 부활의 길이다.

 

내가 하느님의 자비는 아니지만, 하느님의 은총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낼 수는 있는 것이다.

 

내가 바로 하느님은 아니지만 하느님의 은총과 허락하심으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낼 수는 있는 것이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바로 모든 이웃들이 자신의죄, 혹은 이웃의 죄로 힘들어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모두가 완전한 인간이 아니지 않은가?

 

모두가 다 사랑을 갈구하고 있는 존재들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만인에게 친구가 되신 프란치스코 성인처럼 모든 성인들은 죽음과 부활의 길을 가신 것이다.

 

만인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고 죽음과 부활의 길을 가신 것이다.

 

죄인이고 한없이 부족한 우리도 하느님의 자비는 전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럼으로써 우리의 죄도 씻어지지 않겠는가?

 

우리의 부족함도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는 노력에 의해서 메꾸어지지 않겠는가?

 

 

오직 사랑을 표현 할 뿐인 것이다. 이웃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 수 있도록 사랑을 표현 할 뿐이다.

 

 

사랑을 표현하면서 이웃들이 사랑받고 있음을 알게 하고 그럼으로써 죽음과 부활의 길을 가는 것이다.

 

사랑이신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면서 죽음과 부활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웃이 원하는 것을 해 주면서 죽음과 부활의 길을 가는 것이다.

 

이웃을 배려하면서 죽음과 부활의 길을 가는 것이다.

 

하느님의 자비로 이웃이 원하는 것을 해 주면서 이웃에게 사랑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이 죽음과 부활의 길을 가는 것이다. 자기를 버리는 것이다.

 

오직 이웃이 원하는 것을 해 줄 뿐이다. 얼마나 자유로워지는가?

 

여기에는 적의도 없고, 경쟁도 없다. 오직 선의만이 있을 뿐이다.

 

오직 호의만이 있을 뿐이다. 오직 만인의 벗이 될 뿐이다.

 

모든 만남이 우호적이 되는 것이다. 사랑이 꽃피는 것이다.

 

천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사랑의 공동체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원하는 것을 해주는 곳, 바로 그곳이 천국이다.

 

부활이 있는 곳이다.

 

오직 이웃이 원하는 것을 해 줄 결심을 할 때 부활 준비를 하는 것이다.

 

 

나는 이제 죽음과 부활의 길을 갈 준비가 되어 있다.

 

나는 이제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해 줄 준비가 되어 있다.

 

 

오직 당신이 원하는 것을 해줄 뿐이다. 그럼으로서 하느님의 자비를 드러낼 뿐이다.

 

 

하루를 살더라도 사랑의 대상인 

모든 죽어가는 생명이 

원하는 것을 해줄 뿐이다.

 

하루를 살더라도 사랑의 마음으로 이웃이 원하는 것을 해 줄 뿐이다.

 

바로 여기에 영원한 자유가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영원한 해방이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하나됨이 있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행복이 있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이웃이 원하는 것을 해 즐 뿐이다.

 

하루를 살더라도 이웃이 원하는 것을 해 줄 뿐이다.

 

죽음과 부활의 비밀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이웃이 원하는 것을 해 줄 뿐이다.

 

여기에 하느님의 참 평화가 있는 것이다.

 

여기에 하느님의 참 사랑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 하느님의 참 자비가 있는 것이다.

 

 

하루를 살더라도

 

오직 내가 지금 이웃이 원하는 것을 사랑의 마음으로 표현 해 줄 뿐이다.

 

이것이 쌓이면 우리는 하늘 나라 가는 것이다. 

그럴때 우리는 버려지지 않고, 선택된 고기가 되어 하늘나라를 갈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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