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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두려움과 체면과 영의 목소리
작성자윤경재 쪽지 캡슐 작성일2007-08-04 조회수651 추천수5 반대(0) 신고
 
 
 
 
 

<두려움과 체면과 영의 목소리> ... 윤경재


“그 사람은 세례자 요한이다. 그가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난 것이다. 그러니 그에게서 그런 기적의 힘이 일어나지.”

“그 여자를 차지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헤로데는 요한을 죽이려고 하였으나 군중이 두려웠다. 그들이 요한을 예언자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이다.

헤로디아의 딸이 손님들 앞에서 춤을 추어 그를 즐겁게 해 주었다.  헤로데는 그 소녀에게, 무엇이든 청하는 대로 주겠다고 맹세하며 약속하였다.

소녀는 자기 어머니가 부추기는 대로, “세례자 요한의 머리를 쟁반에 담아 이리 가져다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임금은 괴로웠지만, 맹세까지 하였고 또 손님들 앞이어서 그렇게 해 주라고 명령하고, 사람을 보내어 감옥에서 요한의 목을 베게 하였다. (마태 14,1-12)



  언제나 인간의 행동 뒤에는 어떤 판단 기준이 있습니다. 그 기준에 따라 실행에 옮기기도 하고 보류하기도 합니다. 자기가 정한 기준에 다다르지 않으면 짐짓 모르는 체하고 넘어가지만 그 기준을 넘어서면 대부분 사람들이 안면을 싹 바꾸게 됩니다. 그 행동의 기준을 어디에 두는가에 따라 평생 씻을 수 없는 화를 가져 올 수도 있고, 또 칭찬을 받게 되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움직이는 행동 기준을 성경에서 말하는 인간의 3대 구성요소에 대입해 보면 이해하기 쉽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은 인간이 육신과 마음(정신)과 영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여겼습니다. 사도 바오로도 이런 기준으로 인간을 분석하여 육적인 인간과 영적인 인간으로 나누어 설명하였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람들이 드러내는 행동이 이 세 가지에 따라 나타난다고 볼 수 있습니다.자신의 행동 기준을 육신에다 두는 사람, 마음에다 두는 사람 또 영의 가르침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이 세 가지 기준은 어느 때는 서로 독립적으로 영향을 미치기도 하고 어떤 때는 서로 상충되기도 합니다. 서로 독립적으로 기준이 될 때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기준이 서로 상충할 때에 어느 면에다 더 큰 행동 기준을 두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행동 양식을 보이게 됩니다.


  헤로데는 육신의 욕구를 판단 기준으로 삼아 자기 동생의 부인을 왕비로 맞아 들였습니다. 이때의 기준은 오로지 욕정을 채우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의 행동이 가지고 올 영향에 대해서는 싹 무시하고 오로지 자신의 쾌락만을 위해 인륜도 무시하였던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이 그 잘못된 행동을 비난하자 헤로데는 요한을 감옥에 가두고 죽이려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그는 어떤 마음이 행동의 기준이 된 것입니다. 그는 군중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그 일은 육신의 욕구와는 달랐기 때문에 그는 새로운 판단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두려움이라는 정신적 기준이 작용한 것입니다. 육신의 욕구를 잠재울 수 있는 정신이 작용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헤로데는 곧 시험에 빠지게 됩니다. 체면과 약속이행이라는 새로운 도전을 겪게 된 것입니다. 이 경우에 다다르자 그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그의 판단 기준은 오로지 체면이었던 것입니다. 더 어려운 판단을 내려야 할 때가 닥쳤지만 그는 새로운 판단 기준을 갖지 못하고 있었기에 오직 마음에만 기준을 둔 것입니다.


  한 사람의 생명을 빼앗고 예언자를 죽였다는 불명예와 군중을 두려워했던 판단 기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럴 때 그가 영의 기준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는 이렇게 함부로 행동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로마서 2,14-15절에서 인간은 양심이라는 본성이 있다고 말합니다. “다른 민족들이 율법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서도 본성에 따라...... 그들의 양심이 증언하고 그들의 엇갈리는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기도 하고 변호하기도 하면서, 그들은 율법에서 요구하는 행위가 자기들의 마음에 쓰여 있음을 보여 줍니다.”


  이 양심은 영의 수준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육신과 마음의 욕구를 제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헤로데는 그 당시 이 양심의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체면을 더 중시했기 때문에 그만 묻혀버리고 만 것입니다.


  헤로데는 이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일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역사에서 가장 비열하고 줏대 없는 사람으로 낙인이 찍힌 것입니다.

 

  우리도 행동의 기준을 어디에 두어야 하는지 깨달아야 합니다. 육신의 기준과 마음의 기준 또 영의 기준을 확실하게 마련해 두어야 합니다. 특히 영의 기준을 분명히 새겨 놓아야 합니다. 육신의 기준과 마음의 기준이 우리를 시험하려 들 때 분명한 영의 기준을 지니고 있다면 우리의 행동은 거리낄 것이 없을 것입니다. 영의 기준은 사랑과 용서와 관용의 기준이며, 무엇보다  생명을 우선으로 합니다.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사태는 영의 기준으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기준, 정신의 기준에 의해서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영의 기준으로 행동한다면 사람의 생명을 그렇게 함부로 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런 사건을 기화로 종교 무용론을 주장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런 주장은 바로 정신의 기준을 영의 기준보다 우위에 두려고 하는 어리석음입니다.


  종교 간 갈등은 종교를 정신적 수준으로 떨어뜨렸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입니다. 종교를 이데올로기로 전락시켰기 때문에 벌어진 사고입니다. 종교는 정신의 영역을 뛰어넘는 영적인 면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이 두 가지 사실을 확실하게 구분하지 못합니다. 바로 이 점이 불행의 씨앗입니다.


  타 종교를 비방하는 것도 어찌 보면 종교를 정신적 수준으로 격하시킨 것 때문에 발생한 것입니다. 종교를 이데올로기로 삼았기 때문에 과격한 선교를 하는 것입니다. 종교를 영적인 수준에 까지 끌어 올린다면 타인의 영혼과 생명을 무시하는 듯 한 행동을 벌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더 테레사께서 베푸신 사랑의 행위는 바로 영적인 수준의 행위입니다. 종파를 떠나서 사랑을 베풀었고, 종교를 개종해야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로 정신적 종교를 넘어서 사랑을 우선하는 영적인 종교를 향하는 거룩한 모습인 것입니다. 이 혼란의 세기에 우리가 지향해 나아갈 방향을 하느님께서 마더 테레사라는 성녀를 통해서 보여 주신 것입니다.


  참으로 영적인 신앙인이 되려면 어떤 길을 따라야 하는지 겸손한 자세로 하느님께 여쭈어 보아야 하겠습니다.

  

 추신; 이 묵상은 제 개인의 묵상이며, 저와 다른 의견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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