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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 차동엽 신부님 **
작성자이은숙 쪽지 캡슐 작성일2007-08-10 조회수1,557 추천수6 반대(0) 신고

 

 

나를 보지 마시오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날마다 예루살렘 성전으로 통하는 ‘아름다운 문’ 곁에서 구걸을 했던 앉은뱅이가 멀쩡하게 걸어 다니는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늘 같은 자리에 앉아서 동냥을 했던 그가 신이 나서 껑충껑충 뛰기도 하며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을 목격한 사람들은 “그에게 일어난 일에 몹시 놀라서 어리둥절해졌다.”(사도 3,10)

 

  사방에서 그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이 때 베드로가 입을 열었다.

 

  “이스라엘 동포 여러분, 왜 이 사람을 보고 놀랍니까? 왜 우리를 유심히 쳐다봅니까? 우리 자신이 무슨 능력이 있거나 경건해서 이 사람을 걷게 하여 준 줄로 생각합니까?”(사도 3,12)

 

  사람들이 놀란 눈으로 예전의  앉은뱅이와 자신을 번갈아 보는 것을 금세 알아챈 베드로는 저간에 일어난 일에 대하여 증언하기 시작하였다. 요지는 간결하였다.

 

  “이것은 그 이름을 믿는 우리의 믿음으로 된 것이며 예수를 믿는 그 믿음이 여러분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한 것입니다.”(사도 3,16)

 

  베드로는 정직한 사람이었다. 이제 그는 겸손한 사람이었다. 더 이상 이전처럼 ‘인간 베드로’로 살지 않고 오로지 ‘예수’의 이름을 내세우는 사람이었다. 그날 베드로의 증언은 200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생생하게 메아리치고 있다. 하여 오늘 우리를 각성시키고 있다.


  친애하는 형제들이여 자매들이여,

  저 사람을 보지 마시오, 나를 보지 마시오,  오로지 그분의 권능만을 보시오.

  내가 아니었소이다. 

  여러분이 매일이고 봐왔던 태생 ‘앉은뱅이’ 저 사람을 일으킨 것은

  내가 아니었소이다.

  나는 그저 그분이 하라시는대로 한 마디 명(命)했을 따름이올시다.

  “나자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어 가시오”(사도 3,6).  

  그러니 시방 여러분이 의아해 하는 권능의 근원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름인 것이올시다.


  명심하시오.

  못할 것이 없는, 진정한 능력의 원천은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야곱의 하느님이시며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이신 그 하느님”(사도 3,13)이시요, “그 종 예수”(사도 3,13)이시요, “성령”(사도 8, 18)이올시다.

  내가 아니올시다.

  인간이 아니올시다.

  인간은 역시 인간일 따름, 결코 기적의 참 주인이 아니올시다.

  설령 나의 기도를 통해 놀라운 이적(異蹟)이 일어난다 해도, 그것은 나의 초능력(超能力)이 아니라 성령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의 선물”(사도 8,20)이올시다.


  그렇소이다.

  이 권능은 금화(金貨)로도 못 사고 수련(修練)으로도 못 이루는 영묘한 능력이올시다.

  마술사 시몬이 돈으로 매수하려 했으나 오히려 “죄에 얽매여 마음이 고약한”(사도 8, 24)    소치라며 불호령만 된통 얻어맞은, 그런 거룩한 권능이올시다.

 

  그 어떤 수행으로도, (초월)명상이며, 요가며, 기수련이며, 최면으로도 결코 이룰 수 없는    참으로 신령한 것이올시다

.

  그러니 세상에 난무하는 온갖 마술과 신통력은 거짓이요 속임수임을 명심할 일이외다.   


왠지 아시오?


  내친김에 베드로는 추상같이 선언하였다.

  “이분을 힘입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신 이름 가운데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이름은 이 이름밖에는 없습니다.”(사도 4,12)

 

  아, 얼마나 많은 지성인(知性人)들이 이 짤막한 고백 앞에서 좌절했던가! 얼마나 많은 학자들이, 철학도들이, 신학도들이 이 단언에 걸려 넘어지고 갈등했던가! 반론과 회의는 또 얼마나 많이 있어왔던가!

 

  “이는 독선이다. 편협이며 위선이며 편견이며 오만이다. 그리스도교의 핵심가르침인 사랑에 대한 모순이다. 어찌 예수만이 구원이랴. 서울로 향한 길이 어찌 한 길 뿐이냐. 동서남북에서 다 모여들지 않느냐?”

 

  휴머니스트, 자유주의자, 무신론자, 회의론자로 통하는 이들에게는 베드로의 저 주장이 옹졸하게 들릴 따름인 것이다.


  더욱이 이 시대에는 베드로의 저 주장이 반시대적, 반문화적, 반인류적인 것처럼 들리기 쉽다. 엄연히 다원주의시대요 상대주의 시대가 아닌가. 동양인은 동양인대로, 서양인은 서양인대로, 흑인은 또 흑인대로, 한국은 한국식으로, 일본은 일본식으로, 미국은 미국식으로, 유럽은 유럽식으로 --- 등등을 주장하는 문화적 상대주의가 마침내 철학적 내지 종교적 상대주의를 강권(强權)하는 시대가 아닌가. 문화(文化)에 여러 가지 양태가 있듯이 진리(眞理)에도 여러 가지 답이 있다는 대중의 함성에 감히 누가 항변할 것인가. “그것이 너에게는 진리일 수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강요하지 말라. 나에게는 다른 진리가 있노라.---”

  

  이런 거센 도전에 대하여 베드로는 요지부동으로 답변한다.


  왠지 아시오? 

  세상의 종교창시자들은 하나같이 인간이었으나 예수님만이 하느님이었기 때문이오.

  예수님만 옳고 저들이 그르기 때문이 아니오.

  예수님만 선하고 저들이 악하기 때문이 아니오.

  예수님만 도덕적이고 저들이 비도덕적이기 때문이 아니오.

  예수님만이 하느님(필립비 2,6)이셨기 때문이오.


  왠지 아시오?

  원죄(原罪)의 현실 때문이오. “한 사람이 죄를 지어 이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죄는 또한    죽음을 불러들인 것”(로마 5,12), 이것이 인간이면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삶의 처지이기     때문이오.

 

  왠지 아시오? 왜냐하면 이 치명적인 태생적 상흔(傷痕)을 치유할 유일한 의사는 창조주     하느님이시기 때문이오. 마치 도자기가 파손을 입었을 때 도자기 스스로가 아닌 도공의     손길을 통해서야 온전히 복구될 수 있듯이, 마치 가구에 손상이 생겼을 때 가구 스스로가    아닌 목공이 가장 잘 복원할 수 있듯이, 마치 자동차의 핵심부분이 고장났을 때 자동차     스스로가 아닌 제작사의 손길을 거쳐야 고쳐질 수 있듯이, 꼭 그렇게 인간 영혼이 입은     치명상을 치유할 능력은 인간 스스로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을 만드신 창조주    하느님에게 있는 것이기 때문이오. “죽이는 것도 나요 살리는 것도 나며 찌르는 것도 나    요 고쳐주는 것도 나다. 내 손에 잡은 것을 빼낼 자 없다.”(신명 32,39)

 

  그러니 세상이 높이 추앙하는 성자(聖者)들도 실상은 스스로 ‘원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    하는 한낱 인간일 뿐, 결코 다른 인간의 구원자가 될 수 없는 것! 인간이 인간을 구원하    는 것이 아니라 마땅히 하느님이 인간을 구원하셔야만 하는 것! 이것이 진정한 자연(自     然)이요, 이것이 진정한 이치(理致)요, 이것이 진정한 질서(秩序)요, 이것이 진정한 진리     (眞理)인 것!


  왠지 아시오?

  하느님이셨던 예수, 사람이 되신 예수,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한 14,6)이신 예수, 그가 ‘은’    이나 ‘금’이 아닌 자신의 ‘귀한 피’로 죄 값을 지불하고 우리를 원죄의 굴레로부터 구원해    주셨기 때문이오(1베드 1,19).

  그가 십자가와 부활로 우리의 죽음을 이기고, ‘흙의 인간’에서 다시 ‘하늘의 인간’(1고린     15,48)이 되게 해 주었기 때문이오.

 

  그러므로 내가 알고 있는 유일한 답은 이것이외다.

  “회개하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한 사람도 빠짐없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    고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시오.”(사도 2,38) “그러면 하느님께서 여러분의 죄를 깨끗이    씻어 주실 것이며 여러분은 주께서 마련하신 위로의 때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사도 3,19)


  왠지 아시오?

  인간은 스스로가 하느님이 될 수도 없고 또 하느님이 되고자 해서도 안 되기 때문이오.     자고로 스스로 “눈이 밝아져서 하느님처럼”(창세 3,5) 되고자 했던 욕망이 인간을 몰락시    킨 유혹이었기 때문이오.

  왠지 아시오? “영원한 생명은 곧 참되시고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 아버지를 알고 또 아버    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한 17,3)이기 때문이오.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변할 것이 있고, 변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있다. 사람의 손에 달린 것이 있고, 오로지 하느님의 전권에 속하는 것이 있다. 다른 것은 몰라도 베드로의 위대한 고백 “당신은 살아계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십니다”(마태 16,16)라는 이 고백은 만고에 불변하는 진리이다. 교회의 변혁을 줄곧 주장한 저 대담한 신학자 한스 큉 조차도 “예수는 그리스도시다”라는 고백이야말로 그리스도교 불변의 정체성(identity)이라고 못 박아 두었다. 


  오늘 도처에서 여러 목소리들이 들려온다. 교회 밖이고 안이고 구분할 것 없이 여기저기에서 미구에 사라지고 말 상대주의의 목성 돋우고 강변하는 소리들이 들려온다. 

 

 “당신들은 무슨 권한과 누구의 이름으로 이런 일을 하였소?”(사도 4,7)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단단히 일러두었는데도 당신들은 어쩌자고 온 예루살렘에다 당신네 교를 퍼트리는 거요?”(사도 4,28)

  그 때 사도 베드로는 목숨을 걸고 답변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보다 당신들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보시기에 옳은 일이겠는지 한번 판단해 보시오.”(사도 4,19) “사람에게 복종하는 것보다 오히려 하느님께 복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사도 4,29)

  그 때라고 오늘 현대문명의 이름으로 내세우는 저런 상대주의적인 주장들이 전혀 없었을까? 그 때라고 사도 베드로는 신학적인 지평(地坪)이 좁아서 저런 주장을 했던 것일까? 그 때라고 그는 아직 뭘 몰라서 경솔하게 이 신념을 고수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던 것일까?


  물론, 하느님의 자비는 우리가 모르는 당신의 방법으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섭리해 오셨을 터이다. 그러기에 칼 라너(Kahl Rahner)는 ‘익명의 그리스도인’이라는 용어를 도입하여 양심을 통해 하느님의 은총을 인식하고 수용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던가. 하느님의 무량한 사랑이 베푸시는 오묘한 구원의 손길에 대해서 사람의 판단이 선(線)을 그을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그럼에도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이라면 20세기 동양 유수의 종교사상을 섭렵했던 한국 가톨릭계의 영적 거인 구상 세례자 요한(1920-2004)이 왜 만년에 다음과 같이 고백했는지 그 경지(境地)를 경탄하게 되리라.

  “이 밑도 끝도 없는 / 욕망과 갈증의 수렁에서 / 빠져나올 수 없음을 / 나는 알고 있다.

// 이 밑도 끝도 없는/ 고뇌와 고통의 멍에에서 / 벗어날 수 없음을 / 나는 알고 있다.

// 이 밑도 끝도 없는 / 불안과 허망의 잔을 / 피할 수 없음을 / 나는 알고 있다.”

 

  이 것은 80평생 참 구원의 길을 모색한 한 구도자가 도달한 값진 깨달음이다. 도통이 인간에게는 한갓 신기루일 뿐임을 절감한 한계의식인 것이다. 그러기에 그가 고백하는 믿음은 우리의 알량한 양지(良知)를 비추는, 더욱 빛나는 등대이다. 

 

  “그러나 나는 또한 믿고 있다. / 이 욕망과 고통과 허망 속에 / 인간 구원의 신령한 손길이 / 감추어져 있음을, / 그리고 내가 그 어느 날 / 그 꿈의 동산 속에 들어 / 영원한 안식을 누릴 것을 / 나는 또한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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